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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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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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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BY 꿈을 이루다. 2008-10-08

살다보니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도 간접적인 얘기만으로도 상식을 쌓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바람 난 남편들의 행동거지나 가본 적 없는 곳의 명물이 뭐였는지 등등...

치매기가 있는 어른들을 모시고 있는 가족들의 애환과 시련들까지... 치매에도 종류가 있는 줄을 몰랐다. 욕으로 푸는 치매, 잠자는 치매, 돌아다니는 치매... 젊은 나이에도 치매를 앓을 수 있다는 얘기까지 익히 들은바있는 세나였다.

어쨌든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실제로 곁에서 본 적은 없었기에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된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서늘한 바람에도 세나의 등줄기로 식은 땀 한줄기가 간지럼 태우듯 타고 내렸다.

“요즘은 다들 표정이 밝지 않아... 너도 나도... 새댁은 어때요?...”

세나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이 살갑게 말을 꺼냈다.

“...... ”

행인지 불행인지 위협적인 치매는 아닌 것 같아서 작은 안도를 느꼈지만 노인의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왜요? 내가 미친 노인 같아서?”

세나의 표정을 살피던 노인이 말을 잇더니 작은 소리로 웃는다. 세나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창피하기도, 죄송하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뭔 일이 터질 것 같던 적색 경보등이 노랑으로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요.” 어렵게 꺼낸 말이었지만 이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나는 보통 오후에 나오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일찍 나와 봤지. 이른 시간에도 사람들이 많네...”

“네...”

쉽게 일어설 기미가 없는 노인은 세나가 궁금해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을 이어나갔다. 요즘은 좋은 것들이 많이 나와요, 햇볕에 타지 말라고 쓰는 모자가 예쁘게도 나오고, 고무장갑처럼 길쭉한 장갑까지... 주로 올라오며 봤던 여자들의 패션에 대한 것들이었다. 제법 말 속엔 평범한 차림새와 달리 멋을 즐기는 분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나는 그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기회를 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네’라는 대답만 간간히 했다. 어쨌든 노인은 30분 이상 혼자서 떠들고 있었지만 한참 어린 세나에게 하대하지는 않았다.

“이쪽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내가 자주 다니는 곳인데, 새댁이 먼저 앉아 있지 뭐예요.”

노인에게 있어서는 세나 자신이 불청객이었단 말이다. 나무 그늘 아래도 한 무리의 개미들이 제 몸보다 훨씬 커다란 무언가를 들고 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름 모를 가녀린 풀들이 스치듯 밀려든 작은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 모습이 흡사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과도 같다고 세나는 생각했다. 어느새 세나의 몸을 타고 흐르던 땀들이 말라있었다. 노인이 처음 했던 말처럼 추운마저 들었다.

“저 때문에 운동에 방해가 되셨겠어요...”

“아니아니, 방해라니요. 말동무 생겨서 반가웠는데.”

“말씀 놓으세요.”

말을 들을수록 노인이 치매환자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괜한 걱정이었음을 알았다.

올림픽 공원과 가까운 아파트 단지에서 제법 큰 평수에 살고 있는 잘나가는 아들의 어머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노인이 말을 이을수록 노인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노인이었다. 자기 자랑같은 이야기를 쏟아놓은 노인의 어서도 자만을 느낄 수 가 없었다.

“새댁 힘들지? 노인이 되니까 주책은 드나봐. 남의 일에 신경 쓰이고 남의 아픔이 보여. 그냥 지나 칠 수도 있었는데, 새댁 주변으로 잔뜩 떨어져서 수북하게 쌓여있는 상념들이 길을 막지 먼가.”

참 편안한 분이다. 처음 보는 사이에도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어...세나는 서서히 귀 기울여졌다. 노인의 말씀에.

“내 나이 올해로 이른 하고도 셋이네. 많이도 살았지... 아들이 하나있는데, 23에 낳았으니 아들도 50이 넘었어...세월, 참...”

노인의 말이 계속 이어질 때마다 세나는 추임새라도 넣듯 ‘네’라는 대답만 간간히 대꾸했다. 그 연세에도 눈망울이 빛나는 것 같은 노인의 시선이 좀 전에 세나가 바라보던 이름 모를 풀들의 흔들림에 멈추었다.

“내 아들은 유복자야. 나는 결혼을 늦게 했어. 22에 집에서 쫒기 듯 남편에게 가야했지. 싫었어. 결혼이...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여자들의 삶이 싫었던 게야. 매일 울었어. 집에 간다고. 호호호... 철부지였지. 그 나이에 남자가 싫다고 집에 간다고 했으니...그런데 남편이 그런 나를 다독였어. 경성에서 정미소를 하는 아주 괜찮은 집 아들이 어쩌다가 결혼한번 했다가 일찍 첫 번째 부인을 잃고 상심해 있다가 나를 맞았는데 여간 각별하게 대하지 않았어... 어쩌다가 내가 임신을 했고 기뻐하던 남편이 며칠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떴지... 내가 벌은 받은 게지... 그리곤 고생의 시작이었어. 지나온 긴 세상 어찌 모두 말하겠누...남들은 겉모습의 나를 보고 복이 많은 여자라고 했어. 복 많은 내가 죽으려고 모진 짓을 다했는데...오히려 명을 이섰나봐. 지금까지 살아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