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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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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칭하길...


BY 꿈을 이루다. 2008-10-07

am 8;20분. 세나는 오랜만에 아침부터 자전거를 꺼냈다. 도심의 미로 같은 한산한 골목을 벗어나기 위한 능숙한 그녀만의 자전거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나도 제법 출세했어. 이렇게 삭막하고 틀에 박힌 듯 비슷한 건물과 길들을 헤매지 않고 다니는 걸 보면 말야‘ 서울에 정착한 처음 몇 년은 타국인양 이질감에 힘겨웠던 세나였다. 지금이야 살다보니 눈 요기꺼리 많고 여유만 된다면야 문화적 혜택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도심의 편리함에 젖어버렸지만. 올림픽 공원은 세나가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즐겨 찾는 하이킹 코스중 하나였다. 무엇에 다들 그리들 바쁜지 인도를 달리는 자전거, 자전거도로를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숨 돌릴 틈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에서 바쁜 일상 중에 한 부분을 채워가는 목적이 느껴졌다.

어딘가로 향하는 바쁜 걸음걸이의 그들과 희망, 열정, 목적의 존재여부조차 뇌리에서 사라진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은 극과 극이겠지...하고 세나는 생각했다. 그리곤 문득, 내가 저들을 보듯 저들 또한 나를 보겠지, 저들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출까, 웰빙을 부르짖으며 제 한 몸 가꿔가는 팔자 좋은 여편네쯤? 바다로 둘러 쌓인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파도 수까지 헤아리던 빠삐옹의 심정으로 절박하게 달리고 있음을 아무도 모를 거야...라는 상념에까지 도달했다.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서 나섰건만 늘 자신의 머릿속은 더한 잡동사니들로 가득해지고 만다. 세나는 머리에 붙은 벌레라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었다.

길가에 아름드리 플라타너스의 큼지막한 이파리들이 한결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만국기처럼 ‘사그락...사그락...’하고 펄럭였다. 먹이를 찾아 사람들의 발길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까딱까딱 고개 짓하는 비둘기들의 ‘우으음...우으음...’하는 한숨이 느껴졌다.

북2문에 도착했을 때는 집을 나선지 30분쯤 후.

“날씨가 추워졌어요...”

세나가 산책로 코스 중에 하나인 동산의 등허리(?) 중간쯤에 앉을만한 한곳에 엉덩이를 걸쳤을 때였다. 앉자마자 겁 없는 청설모 한 마리가 채 3m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그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올드 보이>에서 최 민식이 했던 명대사 ‘누구냐, 넌...’ 가 떠올랐다... 세나도 작은 오기가 발동한 듯 청설모의 관심에 맞대응하듯 응시하느라고 곁에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네?!! 아... 네... 그러네요.”

아이보리색의 양쪽 가슴 선을 타고 내리는 꽈배기모양이 예쁜 스웨터를 입은 쪽진 머리가 인상적인 할머님의 등장에 살짝 당황했지만 다시 안정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추운 날씨라고 표현하기엔 10월의 첫 주가 과한 것은 아닌지... 그곳을 찾으며 안면을 익힌 몇 분들과는 눈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던 세나였다. 하지만 복숭아 뼈까지 내려오는 작은 꽃문양이 인상적인 월남치마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계신 노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홀로 자유롭고 싶어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건만, 그래서 평소 남들처럼 같은 곳을 몇 바퀴씩 땀으로 흠뻑 적시며 돌던 것도 포기하고 정착해서 앉았건만... 그마저도 허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세나는 할머니께서 스쳐 지나가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청설모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하지만... 세나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손수건을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활짝 펼치는 노인을 보게 되었다. 노인은 철퍼덕 아무렇게나 앉은 젊은 처자와는 비교되게 살포시 바닥에 손수건을 내려놓고 얌전히 그 위에 앉았다.

“풀냄새가 참 좋아요...”

소시적엔 젊은 오빠들 여럿 가슴앓이를 시키셨겠구나, 얼핏 봐도 느껴질 정도로 비록 차림새는 검소했지만 외소한 몸매와 작은 얼굴엔 세월의 골도 뺏어가지 못한 기품이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이 난다던,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에게나 적법한 대사를 응용하는 노인의 목소리엔 교양도 느껴졌다. 인생은 60부터라며 평균연령 70대의 태권도 시범 할머니들의 tv출연이 아니더라도 요즘 어른들의 사고와 옷차림이 젊은이 못지않은 이때에... 90년대에도 흔치 않던 쪽진 머리스타일...

“네?!!!...네... 그러네요...”

세나는 자리를 얼른 떠야 함을 직시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옛말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세나는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고운 외모와는 상관없이 차림새로 짐작컨대 70대는 훌쩍 넘기지 않으셨을까, 짐작되는 노인이 혹여 과거에 어느 한 부분을 헤매고 계신 치매 환자가 아닐런지...

그렇다면 자신은 이럴 땐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나, 생각지도 못한 걱정 속을 헤매다가 문득, 훗날 썩어 문드러진 속으로 인해 자신이 세상을 뜨게 된다면 아마도 사람들을 김!세!나!를 칭해 박복함의 달인이라 부르지는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