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아이가 보고 싶을때면 미칠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
궁금해서 달려가 찿아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잠깐 찿아가서 얼굴을 보고 오는 것으로 내 욕심은 채워지겠지만 아이에겐
혼란만 줄수가 있기에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참고 있었고 아이를 더이상
낳지않겠다는 내의사를 처음부터 밝혔었기에 내심 바라고 기대하는 듯한
말투와 행동을 보였지만 더이상 말은 하지않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기대와 요구였지만 애써 모른채하는
나도 괴롭고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
회사에서도 몇명 안되는 동료들과 사장님 그리고 나보다 세살어린 그의 아내까지도
짐짓 나를 배려해 주는척 하면서도 나를 보면 마치 불쌍한 불임녀에게 동정하듯이
여기올땐 아이를 안데리고 와야하는데 ,,,,,, 라며 생각해주는척 말을 할때면 그도
나도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고 민망했다 .
내생각만 고집할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망서리다가 아이를 낳아야 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건 동서 때문이었다 .
나보다 먼저 이집을 드나들었고 오랫동안 동거했지만 시동생과 한성한본이란 이유와
없는집 딸이여서 아무것도 없이 몸만 왔다는 이유로 데면데면 하던 시어머니가 나에겐
제대로 며느리 대우를 해준다는 생각으로 항상 나에대한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는데
둘째아들의 결혼식 이후로 더욱 나에대한 신뢰와 애정을 표시하는 시어머니가 불만스러운
동서였다 ,
그렇게 힘겨루기가 시작될줄 알았다면 시동생 잔치에 애써 힘쓰지 않았을것을 바보같이
내맘만 믿고 천방지축 참견할줄만 알았지 잔머리를 써야만 한다는걸 미처 생각도 못했다 .
시어머니는 손하나 까딱 안하고 처리한 둘째아들의 결혼식이 만족스러웠는지 동네방네
다니시며 말씀하시길 맏며느리를 잘봐서 이젠 아들들 결혼시키는 것이고 뭐고 간에 맏며느리
에게 다 맡길거라면서 자랑스레 말씀하시고 다녔다는 소리를 전해듣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
내가 내입장에서 할 몫이 있고 부모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따로 있는것이지 뭉뚱그려서 내게
모두 떠맡기겠다는 것이 그저 답답했다 .
만약 그것이 어떤 이익이 발생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든것을 내게넘겨 준다고 하셨을까 ?
내가 재혼이라는것 , 아이를 떼어놓았다는것의 약점을 모르는 동서는 아무것도 안해오고
기댈데 없는 친정에 비해 간단하게나마 구색을 갖춰왔고 친정에서 말한마디로 냉큼 자신들의
결혼자금까지 빌려올수있는 내가 부러우면서도 미웠었는데 자기가 시집오던 결혼식날
말을 이쁘게 할줄모르고 나오는데로 생각없이 하는 시어머니가 드레스를 벗고 나오는 동서에게
큰형님 똥구녕이나 쫓아다니고 그반이나마 하라했었 다며 흥분을 했었다 .
아무리 살다하는 결혼일지언정 자기가 최고의 주인공인 날에 그런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순
없겠지만 그래서 형님이 더미웠다는 말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
결혼하는 며느리에게 덕담을 그렇게 밖에 못하는분에게 오랜후에 그얘길 하면서도 마음을 삭히지
못하는 동서도 내가볼땐 매한가지로 딱했다 .게다가 음식이건 뭐건 내가한것만 최고로 치시니까
다른사람보다 질투심이 많은 동서가 오랫동안 속앓이를 했었으리라 .
남편을 시켜서 베게밑 송사를 넣었었는데 셋째동서는 친정엄마도 없는데 어머니가 형님눈치를
보느라 불쌍한 동서에게 내놓고 산바라지도 못해준다는 식으로 말을해서 은근슬쩍 남편의
동정심을 유발시키면서 세째며느리 보다는 자기가 낫다는 것을 은연중 남편에게 주입을 시켰는데
이 단순한 남자는 그때부터 차츰 쇠뇌되고 교육되어져서 나쁜여자 , 착한여자 ,니편 ,내편을
계속 만들어 갔다 .
시어머니나 큰시어머니가 무슨말씀을 하시면 나는 네 , 아니오가 분명했고 동서는 순하게
생긴얼굴로 무조건 네 였다 . 목소리도 나직나직하고 무조건 yes 인 둘째며느리와 어릴때부터
눈이초롱초롱하다는 소릴듣던 한초롱 하는 눈에 약간 고음의 목소리로 안돼요라며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큰며느리를 곁에서 지켜보자면 나쁜여자와 착한여자의 전형적인 그림일거다 .
나는 그자리에서 싫은건 싫다고 말했기 때문에 뒤에와서 할말이 없지만 네, 네 거린 yes girl 은
뒤에와서 늘 불만이었다 .
그자리에서 싫다하지 그랬어 ? 하면 어떻게 그러냐고 하면서도 쉴새없이 불만을 터트리면
차라리 그자리에서 싫다고 한 내가 무색하다 .
평생을 아이없이 살아가노라면 평생을 그에게 미안해하며 동서와 감정에 휘말릴것 같아서
병원을 다녀왔고 임신을 시도했다 .
임신 6주라는 의사의 진단에 뛸듯이 기뻐하던 어느여름날 그가 자기가 다니던 전기회사의
사장이하 동료들이 홍천강으로 야유회를 간다며 부부 동반이라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
임신초기의 입덧과 나른함으로 시달리던 나는 1박2일의 야유회가 부담스러웠지만 어쩔수없이
따라 나섰고 그곳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놀던 늦은밤에 술에취해 이사람 저사람을 붙들고
시비를 걸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준다는둥 하더니 급기야는 사장님에게 평소에 자기에게
하는 대우가어쩌고 일이 어쩌고 하며 시비를 걸더니 기어이 자갈밭에 드러누워 뒹굴며
등이 까지고 얼굴이 까져 피가 흐르고 있는것도 모른채 한참을 구르다가 잠이 들었다 .
사람들은자주 보았다는듯 " 에이 조또라이 " 하며 한쪽에서 웃고 있었다 .
막막한 늪에 빠져버린 느낌 !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불빛하나 없는곳을 더듬고 있는 느낌 이었다 .
언젠가 무릉계곡에서의 악몽이 되살아 나면서 그때 확실히 느꼈다 .
첫단추가 잘못되면 끝내 잘못 끼워지는 것이고 한번 밀리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릴수 없는 것이란걸,,,
두번의 잘못된 그림위에 다시 덧칠을 한다는 것이 쉬운게 아니었다 .
차라리 깨끗한 흰 백지가 내손에 쥐여 졌더라면 더 폭넓은 선택을 할수가 있었을까 ?
내 약점과 한계를 지니고 부여받은 선택권의 한계가 여기까지 였구나 . 라는 생각에
내운명의 무서운 한계에 치가 떨렸다 .
94년 3월 12일 오전 11시 48분 4.09 kg의 건강한 딸을 출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