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남편과 나는 아직까지 신혼이었기에
참 다정하게 지냈었다. 그 무렵 회사 사정이 어려워 여러가지 일을 도맡아
해야했던 남편은 새벽까지.. 업무상이라며 술 마시고 들어오는 일이 무척이
나 많았다. 그러다보니 남편에게는 아침에 늦잠 자는 것은 거의 생활이 되
어있었다. 그날도 8시 30분이 넘도록 일어나지 못하는 남편을 간신히 깨워
놓고 남편이 씻는 동안 그 당시 한참 유행했던 푸른색 와이셔츠에 어떤 넥
타이가 어울릴지를, 침대위에 넥타이를 모조리 꺼내 놓고는 맞춰보고 있었
다. 욕실에서 나온 남편이 오늘은 빨리 가봐야 한다며, 옷 입고 아침 먹는
동안에 자동차에 시동 좀 걸어 놓고 오라고 했다. 그 당시 난 면허증도 없
었고 겁도 무지 많았기에 도저히 할 수가 없을것 같았다.
"나.. 못할 거 같은데요. 한 번도 안해봐서 무서워요~"
"괜찮다. 걍 열쇠 낌어가~ 끝까지만 돌리믄 된다"
"진짜? 진짜 그러기만 하면 돼요? 엉?"
"그래. 얼른 갔다 온나"
거실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도 매서웠기에 난 남편의 무스탕
잠바를 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 당시 난 몸집이 아주 작은 편이어서
남편의 잠바를 입으면 임신한 사람인지 학생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
였다. 남편은 어젯밤에 술이 너무 취해서 차를 어디에 새워 두었는지 잘 기
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나 넘어질까 싶어 빙판진 길 위를 열 발가락
에 힘을 끝까지 주고 천천히 걸어갔다. 주차장에는 출근 준비를 하는 사람
들이 여러 명 있었다. 차 유리의 성에를 긁어내고, 바퀴에 체인을 감고 사
람들은 저마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앞쪽을 지나 뒤 주차장으로 갔을
때 화단 옆에 비스듬하게 새워져 있는 남편의 차가 보였다. 차문을 닫고 운
전석에 앉아서는, 남편이 하라는 대로 키를 돌리는 순간.. 이런! 차가 앞
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게 아닌가...
"엄마야~ 엄마~ 이거 왜이래~ 아저씨! 저기 나 좀 살려주세요!
저기요~! 엄마야~"
유난히 겁이 많았고 또 만삭의 둔한 몸이었기에 난 어찌할 바를 몰라 차 안
에서 바들바들 떨며 울먹일 뿐이었다. 그때 바로 앞 쪽에서 자동차 앞 유리
의 성에를 긁어내고 있던 한 아저씨가 달려와 차를 잡아주고는 괜찮냐며 얼
른 내리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어느새 눈물이 맺힌 눈으로 말없이 그
사람에게 차 키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잠깐 옆으로 가 있어요"
남자는 차 키를 받아서는 차를 안전한 곳에 옮겨주고 시동도 걸어주었다.
"사이드 브레이크가 안 채워져 있었네요"
"네? 네.. 고맙습니다.."
늠름한 모습의 남자는 나에게 활짝 웃어 보이고는 자신의 차를 타고 날렵하
게 빙판이 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나는 사이드 브레이크가 뭔지도
몰랐음으로 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날 아침 그는.. 내게 참 고마
운 사람이었다.
그는 나보다 더 그날 일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 자꾸 이
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그와 나는 차츰 친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영애씨. 정말 귀여웠어요. 물론 지금도 예쁘지만 그땐 꼭 아기천사
인형같았어요. 그때가 영애씨 스물 한 살때죠? 아마?"
"네. 근데 제 기억으론 그때 제 이름이나 나이를 가르쳐 드린 적이 없는
데요.."
"네. 물론 그랬죠.. 영애씨는 그때 하얗게 질려서는 아기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으니까.. 근데 지난번에 보니까 아이들 태우고 어디 다녀오는
것 같던데.. 이제 운전 잘 하시나봐요? 이젠 그때 생각하면 웃음나지 않
아요?"
"네.. 웃음 나요. 그치만 그때는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잠시 동안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날 회사에 가서 위층 숙소 직원들한테, 아침에 있었던 일 설명하면서
영애씨 인상착의랑 차 종, 차 넘버 가르쳐 주고는 뒷조사좀 해보라고 했
죠. 우리 회사엔 아파트에 사시던 아주머니들이 몇분 계셨거든요..
그랬더니 반나절도 않되서 녀석들이 정보를 수집해다 주었는데.."
"좀.. 실망하셨겠어요~"
"네. 그날 세상에 있는 소주.. 제가 다 먹어 없애버릴려구 했습니다. 하
하하"
우리는 조용한 놀이터에서 한참을 그렇게 소리내어 웃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옛 이야기, 요즘 이야기들을 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어머. 세시가 넘었네요. 얼른 들어가 보셔야죠"
"그럼 영애씨는요?"
"전화 다시 한번 해보죠 뭐"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신호음이 채 몇번이 울리기 전에 남편이 전화
를 받았다.
"와? 무신 일 있나? 와이리 전화를 마이했드노?"
남편의 첫마디였다.
"열쇠.. 않주셨잖아요.."
"아~ 열쇠를 내가 가 있었드노? 알았다"
남편은 조금 미안해하며 지금 곧 들어 오겠다고 했다. 남편과 통화를 끝내
고 그를 바라 보았을 때, 그는 어느새 또 한개피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본 채 였다.
"남편한테 원래 그렇게 말해요?"
"뭘요..? 제가 어떻게 말 하는데요?"
"존댓말.. 하잖아요"
"아~ 나이 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신랑이랑 열살 차이 나거든요"
"그래두 부분데.. 그게 잘 않되지 않아요?"
"글쎄요. 이제 습관이 되서 잘 모르겠어요. 대신 싸울 때는 한번씩 반말
두 해요. 많이 화났을 땐 어쩌다 '나이두 많은게~' 이런 말두 하구요"
나의 말에 우린 또 한번 웃었다. 그렇게 여러 번을 함께 웃으면서, 나는
어느새 남편이 조금만 더 늦게 오기를 바라고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한대가 들어왔다. 역시 남편이었다.
"오셨나봐요"
"네.. 얼른 가보세요. 많이 춥죠? 영애씨 감기 걸리겠어요.."
"네.. 들어 가셔야죠?!"
"네. 가야죠.. 먼저 들어가요. 전 조금만 더 있다가.."
"그래요. 그럼. 저 먼저 갈께요.."
나의 인사에 그는 8년전 그날 아침, 주차장의 그 하얀 눈처럼이나 뽀얀 얼
굴로 다시금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왠지 그 환한 웃음 속에서 순간 달 같은 쓸쓸함이 베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일은 남편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 워낙 무뚝뚝한 남편 때문에
어쩌면 의도적으로 나는, 남편에게 많이 수다스러운 편이어서, 일상의 모든
일들이나 내 주변의 사람들에 관한 일들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말하는 편
이었지만 어쩐지 그에 대해서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들키면 안 될
것만 같은 커다란 비밀처럼 난 그에 관한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 마저도 내
가슴 속에 꼭꼭 숨겨 놓았었다.
그의 이름은 '유경민'이라 했다. 나이는 세른세 살이라 했고, 아들 이름이
'영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영재아빠'라고 불렀다. 나 또한 사람들
과 이야기 할 때는 그를 '영재아빠'라 불렀지만 그와 승강기에서 만난다거
나 하여 잠시나마 둘이만 있을 때면 곧잘 '경민씨'라 부르곤 했다. 그날
놀이터에서 그가 나에게 '영애씨'라고 불러 주었을 때 난 그 흥분되면서도
낯선 느낌에 묘한 매력을 느꼈었다. 이십대 초반에 큰 아이를 낳고 난 후로
내 이름은 줄곧 '정아엄마'였기에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난..
그 동안 식민지 시대에 살면서 강제로 빼앗겼던 주권을 찾은 양 알수 없는
해방감마저 느꼈었다.
여자들이 원래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림만 하다보면 자기 이름을 잊어버리
고 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런 주부로서의 소소한 당연함에서 오는
일종의 박탈감을 남자들은 아마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쨌든 난 그날, 그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내 이름을 찾았었다.
놀이터에서의 만남이 있은 후에 우린 꽤 많이 친해졌다. 수퍼에서 만나면
서로 음료수를 권한다거나 주차장에서 마주치게 되면 서로 상대가 주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다거나 하며 말 그대로 우리는
'친한이웃'이 되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와 마주치는 날이면 우리집 식탁은 항상 풍성해졌고 그를
알게 된 후로 왠지 목욕탕 청소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이불 빨래나 베란다
청소, 서랍정리 등의 집안 살림에 나는 부쩍 열심이었다. 그 때문에 오랜만
에 생활의 활력이 생긴 것이다.
어쩌면 나는 예쁜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부터 나에겐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에도 꼭 거울
을 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나의 서른한 살은.. 이렇게 아주 작은 행복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