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사 온 후 우린 그의 말대로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승강기 안에서, 주차장에서, 아
파트 앞 상가의 가게에서, 세탁소에서, 때론 놀이터 옆의 쓰레기장에서...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의 우연한 만남들이었지만 하얀 그는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가벼운 인사
말과 함께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다가 그가 그를 닮은 뽀얀 아들 녀석 때문에 나를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 왠지 모를 서운함에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편
에게 짜증을 부리곤 했다.
그에겐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그리 예쁘진 않지만 맘씨 좋아보이는 아내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조금 뚱뚱한 편이었고 얼굴에서 느껴지는 수수함과는 다르게 화려한 것을 무척
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빨간 립스틱에 브래지어 밖으로 삐져나오는 살을 감출 수
없을 만큼 꽉 조이는 스판 티셔츠를 즐겨 입었는데 한번 씩 밑단이 팬티라인 바로 아래까지
밖에 오지 않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는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 가기도 한다. 언젠가는 놀
이터에서 아들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1층에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
노동자들 몇 명이 그녀의 팬티 색깔을 맞추는 놀이를 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나
만 본 것이 아니었던지 아파트에는 이내 그녀의 속옷에 관한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고 있었
다. 어떤 이는 빨강색이라 했고 어떤 이는 물방울 무늬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속옷을 안 입고
다닌다고도 했다. 여하튼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이 일말의 사건 때문에 그녀와 그
녀의 식구들은 작은 시골 동네에서 금세 유명해졌다.
그와 그의 식구들이 동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난 정말이지 너무 싫었다. 그의 아내
가 사람들의 입에 지주 오르내리면서 동네엔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저 집 신랑 몸 좀 봐.. 운동 꾀나 하나 보네'
'무슨 남자가 피부색이 저렇게 창백해? 어디 아픈 거 아냐?'
'어이구 저 집 부부가 아주 사연이 많은 부부랴... 글씨 저이가 대학 때 무슨 큰 병에 걸려서
많이 아팠는디 저이를 짝사랑하던 지금 마누라가 글씨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댜.. 그 정성
인지 병이 나아서 결혼은 했는디 여자 집에서 아직도 인정을 안해준다네..'
어디서들 들었는지 어떤 이는 이렇게 자세한 정황까지 들어가며 이제는 그의 아내가 아닌 그
를 도마위에 올리곤 했다. 이런 저런 말들 중에서도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말들은 그의
성적 매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들이었다.
'아이구, 저렇게 멋진 남자랑 하루만 살아 봤음 소원이 없겄네..'
'나는 저 넓은 가슴 팍에 한 번만 안겨보면 좋겄구만..'
물론 재미있자고 그냥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들 인줄은 알지만, 난.. 내색할 수 없는 불쾌함
에 한동안 아파트 언니들이 차 마시러 오라 할 때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다.
처음 그와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내주었던 숙제를 끝마친 것은 두 달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땐 연말이라 여기 저기 송년회 모임이 참 많았다. 신랑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
학교 자모회 엄마들과의 모임, 초등학교 동창들과의 모임, 아파트 친한 언니들과의 부부동반
계모임 시댁 식구들과의 송년모임 등등.. 항상 12월이 되면 보름 정도는 송년회 모임 때문에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른이 되고 술을 마시면서부터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일년을 돌아보며 반성하던.. 소녀시절
의 마음은 오간데 없고 그저 여럿이 모여 연말연시 분위기에 취해 술 마시고 흥청거리는 가
운데 언제나 쓰린 속과 지독한 두통으로 새해를 맞이해 왔던 것 같다.
그해 연말도 그렇게 의미 없는 의미를 만들어 가며 나는 서른 한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새해
를 며칠 앞둔 어는 늦은 밤.. 신랑 계모임의 송년회에 따라 갔다가 열두시쯤 됬을 때 혼자서
집에 오게 되었다 (아마 신랑은 일행들과 함께 '단란한 주점'에 가는 듯 했다) 술도 적당히
취했고 시간도 늦어서 혼자 돌아오는 길에 그만 택시 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쯤 지났
을까.. 얼핏 보아도 우리 아버지 연배는 되어 보이는 머리숱이 아담한 기사님이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떳을 땐 이미 아파트 앞이었다. 젊은 여자가 술에 취해 택시 안에서 잠들었다는
게 난 너무 창피해서 만 원짜리 한 장을 얼른 드리고는 서둘러 내렸다. 허둥거리며 뛰어가는
나를 차 안에서 부르시는데, 난 못들은 척 하며 더욱 바삐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허둥거리며
집 앞에 도착했는데 이런.. 현관문 열쇠가 없는 것이었다. 차 키와 함께 키홀더에 꽂혀있던
열쇠를 남편에게서 받아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애들은 친정집에 데려다 놓았기 때문에 남편
이 오지 않으면 꼼짝없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터였다. 급하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
는데 남편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원래 남편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모임이 많은 편
인데 난 남편이 나가 있을 때는 외박을 하고 오더라도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인지 술자리에선 전화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이었다. 졸리기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날씨는 너무 춥고 이만 저만 난처한 게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아는 언니들 집
에 가 있을 수도 없고... 당장이라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로 가는지
장소라도 알아 둘걸.. 아님 남편 계모임 아저씨들 전화번호라도 하나 입력해둘걸... 계속 남
편에게 전화를 하면서 다시 일층으로 내려갔다. 소변이 너무 급해 아쉬운 대로 놀이터에서
라도 해결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놀이터에 들어선 후엔 우선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난 한쪽 구석에서 급한 일
을 해결하고 난 후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다시 남편에게 전화를 하면서 가방에서 담배 한가
치를 꺼내 물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쓰레기장을 지나 놀이터로 걸어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슬리퍼 끄는 소리와 말을 잘 듣지 않는 가스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는 소리가 동시
에 들렸다. 난 서둘러 담배를 가방에 도로 집어 넣었다. 가방의 지퍼를 잠그로 고개를 든 순
간.. 난 꽁꽁 언 내 두 손으로 내 조그만 심장을 꽉 붙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음 내 주
책같은 심장이 눈치없이 너무도 크게 뛰는 소리가 그에게 까지 들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였다. 요즘 내 심장을 자꾸만 설레이게 하는...
"어?!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하세요?"
"아..예.. 안녕하세요.. 저기.. 신랑.. 기다려요"
"추운데 왜 밖에서 기다려요.. 집에서 기다리시지..."
"아.. 상황이 좀.. 그렇게 됬어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두 바깥 분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이 시간까지 추운 곳에서 기다리고
계신 걸 보면..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남편 되시는 분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순간 나에겐 이대로 그가 날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않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 그런거 아니에요!"
갑자기 커진 내 목소리에 그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이미 엎질러진 물
이었다.
"저.. 실은, 신랑이랑 송년 모임에 갔다가 집 열쇠도 않받아 가지구선 혼자 와버린거 있죠"
"왜요? 나가서 싸우셨어요? 같이 오시지 않구선.. 그나저나 큰 일이네요.. 전화는 해 보셨어
요?"
"네. 않받으세요. 그리구.. 싸운 거 아니에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빙긋이 웃으며 날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담배 한가치를 꺼
내 물었다.
"근데.. 이 시간에 놀이터는 왠일이세요?"
트레이닝복과 슬리퍼 차림인 걸 보면 집에 있다 나온 것 같긴 한데, 이 시간에 혼자서 그가
놀이터에 온 이유가 난 갑자기 무척 궁금해 졌다.
"싸웠어요.. 마누라하고..."
"아니.. 왜요?"
그는 다시 한번 빙긋이 웃으며 나를 보았다.
'어머!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한거야? 그런 걸 왜 물어.. 바보, 바보'
난 너무나 민망하고 미안해 져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만 가봐야 겠어요."
"열쇠도 없다면서요.. 어디 가 있으려구요?"
"그게.. 저... 그냥 집 앞에 있죠 뭐"
"제가... 불편하세요?"
뜻 밖의 질문이었다. 그럴리가.. 그동안 그와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야기 해볼 수 있기를 얼
마나 기다렸었는데.. 게다가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단 둘이 있게 되었거늘...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하지만 난 더 이상 말끝을 잇지 못했다.
"그냥 여기서 기다려요. 어차피 나도 잠도 않오고 답답해서 나온 거에요. 괜찮으시면 같이
기다려줄께요. 혼자 있음.. 아마 슬퍼질거에요. 눈물도 많은 것 같던데..."
이 사람.. 내가 눈물이 많은 걸 어찌 알았을까? 설마 이 사람도 나처럼 몰래 몰래 날 지켜봤던
건 아닐까?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어찌 아셨어요? 나 잘 우는 거.."
"그걸 묻는 걸 보니 아직도 날 기억하지 못했나 봐요?"
그는 모를 듯한 미소로 날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실은 이사 오신다구 얘기하셨을 때부터 무지 맣이 생각해 봤거든요. 근데.. 아무
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제가 머리가 좀 나쁜가 봐요"
"아니에요. 내가 아마 영애씨 만큼 매력있지 못했었나부죠.. 허허 허.."
이번에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하얀 얼굴이 더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람 어찌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처음부터 말
하지 않았을까? 벌써 두 달이 지났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잠시 동안 난
멍하니 있었다.
"저... 그런데.. 제 이름을 아시네요?"
"하하.. 궁금하죠? 말해줄까요? 그럼.. 믿을래요?"
"얼른 말해보세요. 나 진짜 엄청 궁금하단 말이에요"
"음... 좋아요. 대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꼭 믿는다고 말해요. 그리구 하나 더, 날 나쁜 놈이
라고 행각하진 말아야해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
울였다.
"8년 전 이맘때 쯤 난 인천에 살고 있었어요. 우리 회사는 인천에 본사가 있고 이곳에 지사
가 있거든요. 그때 삼주 정도 이곳 지사에 파견 근무를 나왔었죠. 물론 그땐 총각이었고 마
누라도 아직 만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우리 회사 숙소가 이 아파트에 몇 채 있는 거 알죠?"
"네 알아요. 우리 층에두 있어요"
"8년 전 그때 삼주 동안 내가 거기에 묵었었어요. 영애씨 층에 있는 숙소.."
"어, 정말요? 숙소에 계신 분들은 자주 바뀌시니까.. 같은 층이라고 해도 잘 기억을 못해요'
"그러시겠죠.. 해외 노동자들도 많고 우리나라 사람들이라 해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숙
소를 자주 옮기거나 근무지 이동이 많아서 기억하기 어려울거에요"
8년 전이라.. 난 시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영애시 그때 우리.. 눈 많이 왔던 날 아침에 뒤쪽 주차장에서 잠시 만난 적 있는데..
기억나요?"
8년 전이면 내가 큰 아이를 임신해 있을 때였는데.. 이맘때 쯤이면 만삭이었을 테고..
내가 만삭일 때.. 눈 많이 왔던 아침이라.. 아침.. 눈 많이 왔던.. 추차장...
"아~! 그럼 혹시.. 그때 자동차 시동 걸어 주신 분! 그쵸? 그분 맞죠?"
"이제야 기억하시네요. 영애씨.."
난 이제야 며칠 씩 끌어 안고 있던 수학 문제 하나를 풀어낸 학생처럼.. 소리까지 질렀다.
8년 전 어느 추운 겨울 아침. 너무나 고마웠던.. 그 눈이 맑은 청년.. 그 청년이 그였다니...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있던 내 가슴이 어느새 또 다시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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