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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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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분수 (1)


BY 둘리나라 2007-09-16

 

제목: 분수



사냥에서 승리를 한 사자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냥감을 주저 없이 물어뜯었다. 뚝뚝 살점들이 떨어져 나간 사냥감은 이미 세상과의 인연이 다했는지 심장박동을 멈추고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끝없는 초원의 나무 아래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는 사자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전리품처럼 묻어있었다. 화면을 통해 피비린내가 전해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물의 세계’를 거의 빠짐없이 보며 강자의 무소불위 권력에 몸서리를 치면서 난 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까?

볼 때마다 조금씩 약에 취하듯 몽롱한 기분이 들며 지금의 내 모습을 사냥감에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서서히 강도를 높여 가는 약발에 어쩌면 스릴을 동반한 쾌감을, 아니 열에 들뜬 오르가슴을 갈구하며 밤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이 증폭되고, 두려움에 불안이 커져 동공이 흔들리고, 입안이 메말라 갈라져가는 긴장의 최고조였다. 조금 후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는 심장은 이제 지칠 때도 되었건만 박동수가 빨라지고 숨이 가빠지고 얼굴의 근육도 굳어졌다.


시계를 바라보니 7시의 문턱을 아슬아슬하게 넘고 있었다. 순간, 방문이 야수의 비명처럼 거칠게 열리며 시커먼 얼굴의 한 남자가 시뻘겋게 충혈 된 눈으로 먹이를 향해 숨 가쁘게 돌진해 왔다. 언제 온 걸까. 발자국 소리도 나지를 않았는데…….


“이년이 서방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서방을 도대체 뭐로 보는 거야. 쓰벌”


술 냄새가 방안에 퍼지며 비위를 상하게 했다. 취기가 오른 얼굴에는 오늘은 이걸로 시비를 걸어 널 때릴 거야라고 적혀있었다. 그랬다. 무슨 건수를 잡아서라도 내 몸 구석구석에 손과 발을 갖다 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말을 하면 한다고, 안 하면 안 한다고, 쳐다본다고, 운다고 잔다고, 밥상 늦게 차린다고, 심지어는 화장실 간다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코뼈가 내려앉고 온몸에 피멍이 들고 구석에 나뒹굴어 신음도 못 낼 정도가 되면 어김없이 바지의 지퍼가 내려갔다. 짜인 순서가 진행되듯 꼬투리를 잡아 구타를 하고 일방적인 혼자만의 성(性)의 배설이 이어진 게 2년째였다.


남편의 몸이 위로 올라오자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다리에는 마비증상이 생겼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묻어있는 몸과 역한 김치냄새가 나는 입이 훑고 지나가는 곳마다 얼음처럼 세포들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몸 안의 반응은 뜨거운 오르가슴에 미칠 듯이 경련이 일어났고, 희열을 주체할 수 없어 절정의 신음들이 쏟아졌다.

맞을 때는 오히려 가슴이 펄떡거리며 쾌감이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난 머리와 육체가 분리된 기형적인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머릿속은 ‘정말 끝내고 싶다 이제는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를 끊임없이 되뇌면서, 육체는 벗어나지를 못하고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남편이 사냥해주길 기다리며 초원에 서성거리는 나를 발견하며, 이성과 본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떠나지 못하고 살아갈게 될 것이라는 것을 또 느낀다.


미친 새끼! 입안에 맴도는 말을 입술에 피멍이 맺히도록 씹으며 참았다. 배설을 끝낸 미친 새끼는 대자로 뻗어 코를 천장이 무너져라 골며 승리자의 포만감을 즐기고 있었다. 벽을 타고 얕은 한숨이 기어올랐다. 형광등 불빛이 기어오른 한숨을 마시며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눈이 시리다. 밝은 빛이 눈 안으로 들어와 아픔 한 덩이를 던져주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방안에 듬성듬성 널려 있는 머리카락을 주웠다. 금방 몸의 일부였는데 떨어져 나가서는 철수세미처럼 돌돌 꼬여서 나에게 욕을 했다.


‘이 바보 병신아. 네년이 미친년이지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래. 네 눈 까리 네가 찌른 거지. 네 몸의 일부였다는 게 부끄럽고 창피하다.’


손안에 가득 잡힌 그들의 욕지거리가 싫지 않음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에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구석구석 찾아서 모조리 넣고 천천히 일어서서 거울을 보았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그랬나보다. 누가 나를 서른이라고 할까. 목이 아파 왔다.

군데군데 머리카락이 뽑힌 머리는 벌초 잘못한 산소처럼 볼썽사납고,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어오른 눈은 개구리 눈처럼 툭 튀어나와 버렸다. 초점 없이 흐린 눈에는 생기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뼈가 몇 번이나 내려앉았던 코는 움푹 패여 무섭기까지 하고, 새까맣게 기미가 낀 얼굴에는 바닷바람에 그을려 땟국이 줄줄 흘렀다.

옷은 또 어떤가. 6,25 때나 입었음 직한 똥 색 월남치마는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뜯어져 걸레도 쓰기도 힘들어 보이고, 진한 고동색 니트 사이로 금방이라도 가슴이 튀어나올 듯 단추 몇 개가 불안하게 간신히 붙어있을 뿐이었다. 갈라 터진 손과 기형인 듯 짧은 엄지발가락은 보면 볼수록 소름이 끼치고 흉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여자가 거울 속에서 머리를 산발하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으로 자꾸만 흐려졌다. 이게 아닌데 정말 이게 아닌데…….

삶이란 놈은 언제나 내가 원했던 바람대로 되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평선과 수평선처럼 만날 수 없는 묘한 선을 긋고 서로 쳐다만 볼뿐. 가벼운 눈인사 한번 나눈 적이 없었다. 아마도 10년 전 그날 예감으로 알았다. 나에게 행복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았음을.

방향을 잃어버린 나침반이 되어 거리를 헤매던 그날 밤.

어둠에 가려진 달을 보며 피 울음을 울었을 때부터 내 인생은 끝이 났다는 걸 알면서 애써 도리질하며 부정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고 분해 가슴이 터져 죽어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에 쉴 새 없이 도리질을 하며 내 것이 아니라 절규했었다.


이불 밑에 숨어있던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빨갛게 타들어가는 영혼이 연기로 방안을 나른다. 마른 재가 바닥에 떨어지며 타버린 잔해의 숨소리가 멎는다. ‘씨발!’ 담배도 제 영혼의 마지막을 남기는데 나는 도대체 무언가.

비어 버린 가슴과 욕망으로 가득 찬 동물적 본능만 남은 몸뚱이가 이성적 판단이라곤 전혀 할 수 없는 멍청한 머리와 함께 나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담뱃재보다 못한 인생을 허덕거리며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연기 한 모금을 들이키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며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에서 작은 서러움들이 흘러내려 입안으로 들어왔다. 짭짤했다.

눈에서 나오는 물은 소금기가 많아 먹으면 먹을수록 목이 말랐다. 영혼이 맛이 있다면 아마도 지독히 짤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입 안 가득 들어찬 영혼을 지금 맛보고 있다. 서러움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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