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 되자 옷깃을 여밀 만큼 벌써 추워지기 시작했다.
승민은 이제 직장과 학교생활에 어는정도 적응이 되어갔다.
며칠전 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밤새 열이나서
아침에 직장에 가지를 못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1시까지 학교에 가야 한다.
열이 식어서 그런지 몸이 몹시 춤고 떨렸다. 두꺼운 외투를 꺼내입고
투벅투벅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앞에 낯 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지만 금방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승민은 목이 잠겨 있어지만,
작게 소리를 내었다.
"정옥아~, 정옥아~"
두차례 부르자 정옥이는 알아듣고 고개를 돌렸다.
정옥이는 승민이보다 키가 약간작고 통통한 편이었다.
머리는 단발머리에 얼굴은 매우 촌스럽게 생겼다. 언듯 보면
40대 아주머니 처럼 보이기도 할 만큼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타입이다.
정옥은 승민의 부르는 소리에 아주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정옥아, 너 이길로 다니니? 근데 왜 한 번도 만난적이 없었을까?"
승민은 불러 놓고도 어색해서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물었다.
"얘~에는, 지금 만났잖아! " 정옥은 살짝 눈을 흘기며 반문을 했다.
'아! 그렇구나!' 승민은 더 어색해지는 느낌이라 속으로 뇌까리기만 했다.
정옥은 무엇이 좋은지 아주 벙글벙글거리며
승민이에게 딱 붙어서 걸었다.
승민도 이상하게 정옥이와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얼굴만 익혔을뿐 아는척
하지 않고 지냈었는데, 오늘 몇 마디 말 밖에는 하지 않았지만, 꽤 다정하고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민은 정옥이가 갑경이와 근덕이와 셋이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직장도 셋이 같은날 그만두고 다른데를 다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옥이 혼자서 학교에 가는 것을 보니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옥아, 너 개내들 하고 같이 안 지내니?"
하고 묻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어. 사실은 셋이 원래 같은 교회에 다니고 친하게 지냈는데, 갑경이가 자꾸 나를 따돌리는 것 같았어.
셋이 친구이다 보니까, 둘씩 있게 되면 왠지 없는 친구 험담하게 되고, 그리고 오해두 생기구
그렇게 되더라."
정옥이는 살짝 뒷말을 흐리면서 눈에 눈물이 고이는 듯 했다.
그리곤 이내 감정을 추수리며 승민을 보고 관심있게 물었다.
"그런데, 승민아 너 어디 아픈거 아냐?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여."
"어 , 조금..."
승민은 약간 머쩍은듯 대답했다.
정옥은 승민의 가방을 재빨리 뺏어서 들었다.
승민은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또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윤주와 단짝이지만,
왠지 정옥이라는 아이가 한치의 거리감도 없이 가깝게 느껴졌다.
"승민아, 너 4반이지?
있다가 수업 다 끝나면 집에 같이 가자."
승민은 순간 윤주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지만, 알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어차피 윤주는
집이 같은 방향이 아니기때문에 큰 문제가 될것은 없겠다 싶었다.
그리고 요즈음 윤주는 숙자와 집에 같이 가기 때문에 오히려 학교 사거리에서 헤어지게되면
혼자 가는것 보단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 정옥은 정말 승민의 교실로 와서 승민이를 기다렸다. 숙자와윤주 모두 안면은
있는 터라 첫만남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윤주는 오히려 승민이가 혼자 집에
가지 않게 되서 기쁘다고 까지 했다. 숙자 역시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성격인지라 정옥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학교길이 끝나는 사거리에서 윤주와 숙자는 동쪽길로 가고승민이는
정옥과 북쪽길로 향했다. 걸으면서 정옥은 친하게 지냈던 갑경이와 근덕이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었다.
셋은 원래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고,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처음부터 셋이 모두
친했던건 아니었고 초등학교때는 정옥이와 근덕이만 단짝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면서
부터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되어 서로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셋이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갑경이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교회에서는 남학생들 한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갑경이는 집안 형편이 많이 안좋았지만
티를 내지 않아 모두 갑경이가 부잣집 애라고 생각을 했었던듯 싶다. 정옥이는 정옥이대로 갑경이와 더 친해지고 싶어하고 근덕이는 근덕이대로 갑경이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근덕이는 갑경이에게 정옥이 흉을 보기 시작했고, 갑경이는 근덕이 말을 신뢰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서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갑경이가 부잣집 딸이 아니어서 근덕이와 같은 야간고등학교에 들어 가게 되자, 같은 교회 친구들이 위선자라고 하며 싫어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근덕이는 더욱 갑경이와 가까와 지게 되었다. 그리고 정옥이는 자연스럽게 그애들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옥은 언덕길을 오르며 숨이 차 하면서도 그간의 상황을 보고 라도 하듯 승민에게 자세히 털어났다. 승민은
정옥의 이야기를 듣는중에 정옥이가 그 친구들과 얼마나 많은 정을 나누며 가까이 지냈었는지... 그리고 무엇 보다
정옥이가 얼마나 그 애들을 진심으로 좋아했었는지 알것 같았다. 그리고 정옥이 왜 이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승민에게 털어났는지 이해가 갔다. 승민은 정옥이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언덕을 넘어 갈래길에서 정옥은 멋적은듯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승민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 승민아, 잘가." 하며 이내 쏜살같이 집쪽으로 뛰어갔다.
딱지 모양의 종이를 펼치니까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편지지가 되었다.
동글동글 예쁜 글씨모양이 꼭 예쁜 정옥이의 마음을 닮은듯 하다.
승민은 윤주와 그렇게 오래도록 친구로 지냈지만, 이런 편지를 주고 받은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에게 처음 받는 쪽지가 굉장히 가슴을 설레게 했다.
자신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어달라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정옥은 짧은 시간에 마음을 담아 글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썼다.
승민 역시 아까 낮에 잠깐 정옥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미 정옥이와 친구가 될 것을 예감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정신적인 깊이가 있는, 정옥이가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편지까지 전해줄줄은 몰랐다.
승민은 너무나 기뻐 발이 땅에 닿는 느낌도 없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예쁜 편지지를 꺼내 최대한 예쁜 글씨로 답장을 썼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정옥이와의 만남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