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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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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바람은 오는가 -2-


BY 데미안 2012-04-22

 

 

1.

설은 찬바람에도 아랑곳않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프다....

그 순간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원이 원망스럽고 미워야하는데도  그런 감정들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왜 지원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고 눈에 밟히는지...설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밉다....

그저 밉다....

지원의 그 말에 설은 가슴이 철렁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미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이나 했겠는가.

 

[학교때 넌 항상 고상한 척, 모든 걸 다 이해하는 척 미소를 띄며 다녔지. 그 모습이 정말 짜증났어.  내가 아무리 잘해도 있는 자의 특권을 따라갈 수가 없는 거 아니겠니?]

 

있는 자의 특권...?

지원은 그렇게 말했다.

학창시절 자신이 그랬던가?

한번도...한번도 설은 자신의 집이 부유하다는 걸 티 낸 적이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한숨도 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솔직하게 말할까?  너네 집이 망했다는 소리 들었을 때  안됐다는 생각, 들지 않더라. 네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했지...그런데 네가  우리 회사로 들어왔을때  깜짝 놀랐어.  사장님과 어떤  사이인지 궁금했어. 그래서 좀 뒤를 캐봤어. 너 정말 당돌하더라? 어떻게 우리 사장님 같은 거물을 꼬셨는지...그러고도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 보면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그렇지않니? 난 네가 선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아니니?]

 

새삼 눈물이 났다.

설은 찬바람보다 더한 지원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도...그래도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나한테 물어볼 수도 있었잖아. 네가 친구라면 한번쯤은 내게 물어보고 결정할 수도 있었잖니.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 일이... 그 한번의 일이 내게도 속박이고 마음의 빚이었어.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만했던 그 절박함을 ...그 방법밖에 없었음을...그 상대가 다행히 김준수씨였다는 걸...너에게 변명이라도 할 기회를 줄 수도 있었잖니? ...선생님은 내 오랜 꿈이었고 힘들게 얻어낸 노력의 댓가였어. 그것을 포기하는 게 얼마나 고통이었는지...넌 아니?]

[그래도 너에겐 김준수라는 대단한 남자가 버티고 있잖아?  난 또다시 모든걸 다 잃게 생겼는데 내가 널 동정해야겠니?

김준수씨가 알았으니 날 가만 두지않겠지... 속시원하지 않아?]

 

지원이 왜 그렇게 비뚤어져 있는지 ...

그렇게 아름답고 똑똑한 애가 ...

 

[바람이 차군...]

언제 왔는지 준수가 따스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며 다가왔다.

[이런 쓸쓸한 모습은 보고싶지 않아]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으나 설은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 쳤다.

[바람은 차도...생각을 정리하기에는 딱이네요]

[생각?]

준수는 옆에 앉으면서 한 팔을 벤치뒤로 돌려 그녀를 감쌌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찬바람으로 인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얼굴인데? 얘기해봐...]

그가 그녀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놀란얼굴로 받아쥔 설은 그 따스한 열기에 다소 몸이 녹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모금 마셨다. 미소가 절로 나왔다.

 

2.

[내가...밉데요...내가 미워서 그랬다는군요. 여고때부터 미웠다는군요]

[...이유는?]

[그냥요...그냥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잖아요. 지원이에겐 내가 그랬나봐요. 그리고...]

[...그리고?]

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준수를 바라보았다.

흔들림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참 멋진 남자다.

바르고 강하고 세련되고 배려있고 ...이런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데 대해 설은 새삼 감사했다.

[생각말고 바로 말해. 그리고 다음이 뭐야?]

그가 눈썹을 세웠다.

[한지원이 너를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야?]

[당신요]

[뭐?]

[당신을 사랑하는가봐요. 그래서 그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는데...내가 나타나니깐...]

[한지원이 날 사랑해? 웃기지도 않는군]

[그랬는데 미운 내가 당신 옆에 있으니 더 미웠는가봐요]

[한지원은 날 사랑한 게 아니라 내 배경을 사랑하는거겠지. 내가 그 정도도 파악못 할 바보로 보여?  그래서 그 어리석은 질투로 너를 몰아붙인건가?  친구인 너를?  그런 비겁한 방법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미울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것도 친구인 지원에게... 그래서 마음이 좀..그래요. 지원이가 학교에 알리기전에 내게 먼저 물어보았다면 난... ]

[참 어리석은 여자군...편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이 병든 여잔줄은 몰랐군.  재능이 아까워]

[지원이를...어떻게 할 거예요?]

[해고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사람은 내 밑에 둘 수 없어]

일말의 망설임없는 준수의 말에 설은 가슴이 철렁했다. 지원이도 그럴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에 있어 가차없는 사람이다. 지원이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은 그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다고 했다.

설 또한 선생이 되기까지 힘든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그 일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관두게 되었을때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마도...지원이 또한 그런 심정일 것이다.

 

[그냥...이번일 눈감아 주면 안될까요?]

[뭐야?]

[지원이, 비서일 좋아해요. 당신 말대로 재능도 있고 똑똑한 친구예요.  나로 인해 그 애가 모든 걸 잃게 되는 건 원치 않아요. 그 기분이 어떤지 난 잘 알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어쨌던 지원인... 내 친구예요. 기회를 줘요]

[기회? 한지원을 용서한다는건가?]

그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용서한다는게 아니예요. 날 더 미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아마 지원이도 마음이 편할것이라고는 생각 안해요.  그 애한테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까지 빼앗고 싶지 않아요. 부탁이에요]

준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걸 알수는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친구는 더 이상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았다.

쯧......!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씀씀이가...

한지원을 용서하라고? 돌겠군......

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너 너무 오래 앉아 있었어]

[어디...가요?]

[어디 가긴...오늘은 그냥 집에 보내주는거야. 생각따윈 잊고 푹 쉬는게 좋아. 내일 오후에 집으로 와. 알았지?]

설은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준수가 고마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당겨 그의 차가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좋아요...정말로]

찬 겨울 바람이 한방에 날아갈 정도로 달콤하고 따스한 말이었다.

준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랑스러웠다.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는 가슴안으로 그녀를 보듬어 안아 바람을 막아주었다.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

준수는 그곳이 강변도로라는 것도, 사람들이 더러 눈에 띈다는 것도 안중에 없이 맛보다 만 그녀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웃었다.

 

3.

한지원이 결근이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전화기가 꺼져있는지...!]

[한지원씨 전화번호 주십시요. 내가 연락해보죠]

준수는 당황해하는 남비서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리고 전화 번호를 건너받았다.

[뉴욕 호텔팀과의 미팅이 열십니까?...  다른 일 없으면 오후 3시 이후 스캐줄은 잡지 마십시요]

[알겠습니다]

 

숨어있으시겠다?....

회장실로 이동하면서 준수는 지원의 부재에 대해 그렇게 냉소했다.

그래, 일말의 양심은 살아있군...

 

오후 점심 시간, 준수는 신여사의  호출을 받고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점심은 될수 있는한 가족이 함께 하기로 신여사가 결정했지만 서로 바쁜 까닭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해봤자 신여사, 준수, 현수...달랑 셋이지만 말이다.

 

[얘, 속시원히 얘기 좀 해봐라]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신여사가 말했다.

[대운 건설이 어떻게 해서 지금의 위치까지 왔는지 덕분에 알아서 다행이긴하나 네가 갑자기 그 일에 대해 그렇게 목숨거는 이유가 궁금해.  대운의 회장이 만남을 요청해 왔다. 자신들에게 당연히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 계약이 갑자기 돌아선 것에 대해 몹시 궁금해 하는 눈치야. 조정도 해 보겠다는 얘기도 나왔어]

[마음이 흔들리십니까? 그 자들이 힘없는 소중소 기업을 어떻게 빼앗아왔는지 알면서 말입니까? 조만간 법적으로까지 문제가 발생할겁니다. 일체 선을 그으십시요]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너의  갑작스런 그 태도다.  대운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게냐? 속시원히 좀 알자]

준수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신여사와 현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 할 때가 된건가...?!

 

[제가 언젠가 얘기 했을겁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러니깐! 그게 대운이냐? 그들과 원수졌니? ]

신여사의 성급한 어조에 준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은...여자가 있습니다]

[여자?...여자?네에게 말이냐? 너 사고쳤니?]

[어머님]

옆에서 현수가 조용히 신여사를 진정시켰다.

[제 여잡니다. 윤설. 스물일곱. 그 애를 사랑합니다]

[사랑? 네가 여자를?]

신여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몇해전...자살한 중소기업 사장, 윤대동사장님을 아십니까?]

[윤...대동...윤대동...아! 그래, 윤대동사장.  사람좋기로 유명했던 성실한 기업이었지]

[그랬을겁니다. 그런데 그 윤대동 사장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대운의 회장이입니다. 윤대동사장이 그렇게 믿고 믿었던  박종철이 사기를 쳐서 한 기업과 한 집안을 풍비박산시켰지요. 그 윤대동사장의 딸이 윤설이고 제가 사랑하는 여잡니다.  그녀 집안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대운이라는 걸 저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하게 된 겁니다]

[그렇군...그럼 네가 해결해야 할 일이란게...여자였니?]

이번에는 현수가 물었다.

[아니, 그럼 다 망한 집안의 여식이라는거니?]

어이없어하는 신여사의 말에 준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관있습니까?]

[허!...쉽게도 말한다. 그래, 도대체 그 망한 집안의 여자는 뭐하니?  설마 놀고 먹지는 않겠지?]

[얼마전까지 선생이었습니다]

[선생? 얼마전까지?  무슨 소리냐?]

준수는 잠시 말문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에 서서 잠시 바깥 경치를 감상하는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5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된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최근이고...그런데 저로 인해 그녀가 선생직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너때문에? 왜?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5년전...제가 아직 대학생인 그녀를...가졌고  힘든 상황에 있는 그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왜곡되어 학교에 알려지는 바람에  교사 생활에 종지부를 찧게 된 겁니다]

준수의 말에 신여사와 현수가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