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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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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게 들려오는 바람


BY 데미안 2012-03-24

 

1.

예정시간보다 늦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는 신여사를 만류하고 준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불이 훤히 켜져 있는 집을 보는 순간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훈훈하면서도 저릿한 기쁨 같은 감정이 일어 준수는 가슴이 벅찼다.

눈가에 주름이 일만큼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윤설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말갛게 웃으며 그를 반기고 있었다.

집안에는 따스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고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도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의 등뒤로 띠리릭...문이 닫히고 준수와 설은 그렇게 이렇다할 말없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음이 가는대로 안고 싶었다.

마음이 원하는대로 안아 버리고 싶었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그냥 꼭...안고 싶었다.....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준수는 그녀 앞에 섰다.

그녀가 두손을 가지런히 잡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한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컬었다.

 

[잘 지냈어?]

웃음이 묻어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그렇게 보이는군]

[제가...저녁 해 놓았는데...]

[그런것 같군...그런데 우선, 씻고 와서... 괜찮지?]

[네...]

그가 다시 또 그녀의 머리를 헝컬이고는 방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가 헝컬어 놓은 머리를 가만히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히죽, 웃었다.

바보같아.....

그녀의 얼굴이 발개졌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런 감정이 유치해도 좋고 사춘기 소녀같아도 좋았다.

 

그가 샤워를 하고 깨끗하면서도 간편한 차림으로 주방에 들어서자 설은 딱맞춰 그의 자리에 수저를 놓았다.

[저녁은 너무 과하게 먹으면 건강에 별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간단하게 준비했어요. 버섯들깨국인데...먹을줄 알아요?]

맞은편에 앉으면서 내심 걱정스런 투로 그녀가 말했다.

[아니, 먹을줄 몰라도 먹어요. 몸에 좋은 거예요. 포만감도 그만이고...밥은 잡곡이예요. 조그만 먹어도 배가 부를거예요. 밤에 포식하는 건 좋지 않거든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준수는 숟가락으로 버섯들깨국을 한숟갈 뜨서 먹었다. 고소했다.

그가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괜찮죠? 몸에 좋아요]

몸에...좋다?.......

누군가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그런 말을 준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 신여사조차 그런 직접적인 말을 해준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신여사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엄마가 음식을 맛깔나게 정말 잘하세요. 그래서인지 제 취미가 요리예요.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왠만큼 하거든요. 드시고 싶은게 있음, 말씀하세요. 다음에 해드릴께요]

그가 피식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내 전속 요리사로 취직하는 건 어때? 선생 월급만큼 줄 수 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웃었다.

[조만간...실업자가 된다고 걱정해 주는 거예요?]

[생각 있어?]

[음...글쎄요. 요리는 그냥 취민데...나중에...정말 나중에 제가 설 자리가 정말 없으면...생각해볼게요]

[기다리지]

 

휴대폰이 울렸다.

[예...음...]

무언가 심각한 표정에 심각한 어조였다.

[1시간 후, 호텔 로비에서 보자구...그래...]

[호텔에...나가봐야 하는 건가요?]

[음...너도 같이 가야 돼]

[나...요? 왜요?]

[가보면 알아. 일단 밥부터 먹고...]

 

2.

정확히 1시간 후 설은 준수와 함께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그는 곧바로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날 찾아 온 손님은?]

[선배님!]

준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젊은 남자였다.

[따라와]

다짜고짜 준수는 남자를 데리고 엘리베이트로 향했다.

남자는 준수의 손에 꼭 잡혀 있는 설의 손과 얼굴을 거리낌없이, 호기심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선배님, 소개 좀...!]

[신경 꺼, 임마]

준수의 매몰찬 말에도 남자는 히죽 웃었다. 아마도 준수의 그런 태도에 만성이 된 듯 했다.

[안녕...하세요]

민망한 마음에 설은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가 환하게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저는 준수 선배님의  독보적인 후배, 안국태라고 합니다.  컴퓨터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이죠. 잘 부탁드립니다]

성격 한번 화통한 것 같았다. 그녀가 내민 손을 안국태는 덥썩 잡았고 그 온기를 느끼기도 전에 준수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 뺐다.

[신경끄라고 했다!]

[미인이십니다]

안국태는 굴하지 않았다.

설의 얼굴이 엷게 붉어졌다.

형수님.....형수님...

설레면서도 참 아프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준수의 사무실이었다.

준수가 한 컴퓨터를 가리켰다.

[시작해. 어느 정도 걸리겠어?]

[문서 하나 찾는데 뭐... 깡그리 지웠다해도  30분이면 족합니다. 국방부나 청와대에 접속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입다물고 시작해]

[선배님. 저한테 빚 지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요]

 

설은 의아했다.

두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그가 그런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근래에 들어 미스 한과 만난 일이 있었어?]

[미스 한?...지원이 말이에요? 네에...그런데 그건 왜...?]

[한지원과 친했어?]

[아뇨...학교때도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어요.  지원이는 모범생이었어요. 공부잘하고 똑똑하고 예쁘고 완벽한... 저랑은 비교도 안될...!]

[됐어 그럼]

그가 그녀의 볼을 쓸었다.

[그렇다면 크게 충격받지는 않겠군...]

그는 알수없는 말을 했다.

[왜...]

[곧 알게 될거야...]

 

정말 오래걸리지 않았다.

[찾는게 이거...맞습니까?]

안국태의 말에 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선배님?]

[안국태. 이제 가봐. 전화할게...]

[알겠습니다. 전화주세요]

[그래...수고했다]

준수는 안국태의 인사를 받는둥마는둥...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형수님]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가는 그에게 설은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윤설...이리와]

영문을 몰라하며 설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떼지 못하는 화면에 눈길이 가는 순간 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이...이건....!]

문제의 그 메일이었다.

익명으로 교장선생에게 보낸 그 메일의 내용이 고스란히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가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준수는 내용을 한자도 놓치지 않고 읽었다.

그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그녀가 보았고 그녀의 교장이 보았던 내용이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녀가 받았을 그 충격을, 그 굴욕을, 그 수치스러움을 그는 이제야 안 것이다.

 

[이...이게...왜...여기에?...어떻게 이게...?]

그녀의 음성이 떨렸다.

[여긴...한지원의 자리야. 한지원의 컴퓨터고]

그녀가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준수는 마음이 쓰라렸다.

그 익명의 제보자가 친구였으니  놀라운 건 당연하겠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믿을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아...니예요...지원이가 그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하지만 범인은 한지원이다]

[아니...예요]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그녀를 준수는 그저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3.

그의 집으로 오는 내내 설은 복잡한 머리로 아니라는 말만 했다.

그럴리가 없었다.

믿을수가 없었다.

있을수가 없었다.

이해할수 없었다.

아닐것이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것이다.....

지원이가 왜....?

의문투성이었다.

 

그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차디찬 물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가만히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주면서 그녀가 이성을 찾길 기다렸다.

[유마담...나..너...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어.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도대체 왜, 너를 그런 궁지로 몰았는지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어.  알아내는데 오래 걸리지 않더군]

[지원이라고...지원이 확실하다고 믿는...건가요?]

[백프로...충격이 큰가?  배신감이 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그냥...지원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제가 지원이에게 무얼 잘못한 게 있는지...그런데도 내 앞에선...다정하게 웃고 떠들고...]

설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믿어지지 않아요. 지원이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면 제 앞에서 그렇게 태연할 수는 없는 거예요. 아닐거예요]

[그럼 내가 확인시켜줄까?]

[아뇨!]

설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하지마요...제가, 제가 지원이를 만나 볼거예요. 제가 확인할게요. 그때까지 그냥 모른척 해줘요]

[확인해서 맞으면?]

[맞으면?...맞으면...]

머리속이 복잡했다.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아직은...확실한게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그녀는 웃었다.

[정말...지원이 짓이라면 해고할 거예요?]

[당연히 해고다]

별 뜻 없이 내뱉은 그녀의 말에 그가 가차없이 답하자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지마요...그렇게 쉽게 결정짓지 말아요. 지원이 아닐수도...!]

[그만!]

그가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그 얘기는 그만]

엄지손가락으로 그가 설의 입술을 건드렸다.

그 감촉에 그녀는 지원의 생각은 깡그리 잊었다.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오로지 보이는 건  준수뿐이었다.

며칠뿐이었지만... 그 며칠동안 그녀가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준수는 설의 눈동자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녀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보았다.

이제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이제 더이상 참지 않는다.

이제 때가 온 것이다.

 

설은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무서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갈게요.  피곤할테니...!]

그가 벌떡 일어나 그녀 앞에 섰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가 나직히 입을 열었다.

[나 없는동안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

뜨끔했다.

심장이 쿵.했다. 숨을 쉴수가 없었다.  무어라 답해야하지?...

그가 웃었다.

[네 표정이 많은 걸 말해주고 있어. 보고 싶었다고 할까?  아니라고 할까?...또 생각이지?]

그녀의 얼굴이 다시 발개졌다.

[날 그리워 했어?]

거의 속삭이듯 그가 말했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저, 전...가봐야...!]

냉큼 돌아서 가려는 그녀를 그가 뒤에서 당겨 안았다.

헉...!

그녀는 그대로 그의 품에서 얼어버렸다.

준수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팔딱이는  맥박소리를 듣고 있었다.

 

4.

[5년이야...5년동안 도 닦는 심정으로 널 기다렸다]

[......!]

설의 귓가에서 그가 속삭였다. 바람처럼 부드럽고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그날 널 보낸 걸 후회하면서 5년동안 네가 다시 내게로 돌아오길 참을성있게 기다렸어.  그 5년이 내겐 피말리는 순간순간들이었다]

지금...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심장이 내려 앉는 게 어떤건지 ...

설은 놀란 가슴으로 홱 돌아섰다.

그가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커다랗게 뜬 눈과 벌어진 입으로 그녀는  그를 보고 있었다.

준수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칼을 한가닥 한가닥 떼어주면서 눈으로 웃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다고 생각해? 왜 너를 만나고 드라이브를 하고 차를 마시고 키스를 했다고 생각해?

할일 없어서? 심심해서? ]

고개를 저으며 웃던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는 그녀의 입술에 강하게 자신의 입술을 부딪혔다.

[널 사랑하기 때문이었어]

뭐...뭐라고...그가 뭐라고....?

멍하니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지 그가  다시또 웃었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했다, 이 맹추같은 아가씨야. 아주 오래전부터...고집스런 그 눈으로 날 쳐다본 그때부터. 그리고...]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무릎위에 앉아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네가...윤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그렇지?]

할말을 잃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문이 막힌 것처럼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뭐라는거야...김준수씨가 나를...나를 사랑한다고 한거야?....

[내가...잘못 안건가?]

그의 말에 그녀의 팔이 즉각, 그의 목에 감겼다.

아플정도로 그녀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그런 그녀를 더 보듬어 안았다.

크게 그가 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다시 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까봐 오랜시간 마음 조였다.

그녀를 찾았다.

그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사랑해, 윤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