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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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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부르는 바람 -1-


BY 데미안 2012-01-09

 

1.

혜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설은 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두운 가게 안, 불도 모두 꺼진 창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일주일을 버텼다.

생각해 낼 수있는 모든 방법을  머리 쥐 나도록 생각해 보았으나 해답은 늘 하나였다.

양심...

양심이 늘 앞을 막고 서 있었다.

해명이든 변명이든 해 보고 싶었으나 설은 그렇게 자신을 또다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있게 글을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알아볼 만큼 알아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틀린 것도 아니고...

해명도 어리석은 짓이고 변명도 구차할 것 같았다.

한마디로....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사표를 쓰니? 선생님이 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니?  그런데 그렇게 쉽게 사표를 써?]

혜지가 그랬다.

[안되면 빌어야지.  나에게라도 먼저 얘기를 했으면 네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편이라도 들어줄 수 있었잖아. 같이 빌기라도 하지. 바보야,  사정도 해보고 호소도 해보고 하지. 덜컥, 사표를 내?]

그래, 그렇게라도 해보고 싶었다. 간절히도...

[안되면 그 남자한테 부탁이라도 해보지.  그날밤 그런 일은 없었노라고 얘기 좀 해달라고, 말이라도 한번 해보고 결정을 해야지, 그렇게 바보같이 순진하게 학교를 그만둬?]

애가 타는 눈빛으로 혜지가 허탈해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설을 붙잡고 애달아했다.

설 또한 왜 그 생각을 해보지 않았겠는가.

준수를 찾아가 한번만 더...한번만 더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차마  그러지 못했다.

양심을 져버리고 그에게 부탁해 선생 자리를 지켜낸다고 해도 과연 자신이 떳떳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들 앞에 설 자신이 있는지...설은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물었다.

자신이 없었다.

제일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한 게 바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앞에 설 자신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녀가 사표를 써야 했던 이유였다.

아이들이 좋아서 선생이 되고 싶었던 윤설은 아이들을 위해 선생을 관둬야 하는 것이다.

참 우스웠다.

 

눈은 이 밤을 하얗게 덮어 버리기라도 하듯 묵묵히 내리고 있고 설은 그 하얀 밤을 눈물겹게 버티고 있었다.

앞으로가 문제였다.

선생을 관둔 것 보다 더 큰 문제는 가족들이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난감했다.

장여인과 유마담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산넘어 산이요 엎친데 덮친 격이다.

설은 눈물이 베어 나올 것 같아 두 눈을 꼭...감았다.

 

2.

다음 날

다행히도 눈은 그쳤다.

아침부터 설은 유마담과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겸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트리도 꾸미고 가게 안도 따스하게 바꾸어 보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혜지였다.

-기분, 꿀꿀하지? 내가 영화보여주까?-

[됐어. 마음, 비우기 연습중이야. 그러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남편이랑 시간보내. 너 지금 신혼이야]

-그러지 말고, 우리 선우도 부르고 지원이도 불러서 연말 기분 내자-

[혜지야....!]

-저녁에 시간 비워둬. 알았지? 전화할께-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혜지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그냥 주머니에 넣으려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번 울리는가 싶었는데 전화기 저편에서 나즈막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어디요?-
거두절미다. 조금은 거친 목소리였다.  설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녀가 너무 늦게 전화를 걸어서 언짢아 하는 것 같았다.

[학교가 방학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집이에요]

-한 시간 줄테니 준비하고 나와요.-

뚝.

참 그다운 행동이라 설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한시간후 그가 그녀 앞에 차를 세웠다.

냉큼, 그녀는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는 답이 없었다.

힘 들어간 눈으로 그녀를 살피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넥타이까지 맨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제가...전화도 받지 않고 전화도 늦게 해서 저한테 화난 거죠?  죄송해요. 좀...바빴어요]

[오늘도 연락이 없으면 당신 집으로 쳐들어 갈려고 했소]

[진짜요?]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

[중요한 미팅이 있소]

[중요한 미팅?..바쁘단 얘기예요?]

[그렇소. 한시간 늦추긴 했으나 30분안에 가야하오]

[맙소사! 그럼, 진작에 그렇게 말씀하셔야죠. 그랬다면...!]

[그랬다면 오늘도 그냥 넘어 가려고?]

[아뇨...그런건 아니고...제가 방해는 되지 말아야죠. 저 그냥 내려줘요]

[됐어. 중요한 미팅이긴 하나 금방 끝나는 일이오. 당신이 좋아하는 그 까페모카를   마실 시간이면 충분하오]

 

그가 도착한 곳은 궁전같은 어느 호텔이었다.

온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는 걸로 봐선 겨울 레저센타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데리고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깔끔한 정장차림의 두 남자가 총알같이 달려와 준수를 맞았다. 그 중 한 명은 준수의 사무실에서 봤던 그 남비서였다.

[사장님,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남비서는 준수 옆에 서 있는 설을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했으나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설은 무안하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기 기둥을 돌아가면 커피숍이 있소. 30분도 걸리지 않을테니 켜피마시면서 기다려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자리를 떴다.

 

커피숍은 아늑했다.

스키복, 등산복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바깥이 훤히 보이는 곳에 앉았다.

유리벽너머로 설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저만치 보였다.

설은 까페모카를 시켰다.

모락모락...따스한 커피잔을 들고 설은 다시 눈길을 밖으로 던졌다.

 

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준수는 전광석화가 무색하리마치 빨리 일처리를 끝냈다.

마무리는 비서에게 일임하고 커피숍에 들어선 준수는 한눈에 설을 찾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설에게 다가간 준수는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볼을 살짝 건드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즉각,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알아본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준수는  놓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고 잇었다는 것을 용케 알아보았다.

미간을 좁히며 그가 자리에 앉았다.

[끝났어요? 혹시 나 때문에...]

[당신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해]

그가 조용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난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이오. 됐고...난 점심 전인데 당신은?]

[나둔데...점심 사줘요]

그녀가 베시시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인상을 펴지 않았다.

[먹고 싶은게 있소?]

[여긴...어때요?]

커피숍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괜찮다면 여기서 먹어요. 준수씨 아직 근무중이잖아요. 아무리 사장이라고 해도  이렇게 사적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걸 직원이 본다면...별로 좋지는 않을거예요]

[걱정이란 걱정은 당신 혼자 다하지?]

고개를 저으며 준수는 그녀 앞에 있는 커피를 들고 마셨다. 그것도 그녀가 입을 댄 곳으로...

그러더니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달군...]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이 밝지만은 않았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거지?....

 

쏘는 듯한, 살피는 듯한 준수의 시선을 설이 모를 리 없었다.

애써 담담한 척, 쿨한 척 온힘을 다하고 있는데도 그가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보고 있자 설은 심장이 다 떨렸다.

그냥...모른척 넘어 가 주면 좋은데...

어쨌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실동안 그는 묻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살필 뿐이었다.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 봐야하죠?]

[음...퇴근후엔 한가한데...]

[오늘 저녁엔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의 말에 못마땅한 듯 그가 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 이제 시간 많아요. 준수씨랑  많이 놀아줄 수 있어요]

천진스런 그녀의 말투에 준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 뜨렸다.

그녀가 그에게 아이들에 대해 얘기를 하는 동안 차는 어느새 그녀 집 근처에 다다랐다.

왠지 아쉬운 마음에 설은 선뜻,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그것은 준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한번도 개인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미룬적이 없었다. 언제나 정확하고 확실하고 완벽한 일처리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그저 그녀를 보고픈 마음에 미팅도 미루고 그 뒤의 스케줄도 지금 펑크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온몸에 퍼져 있는 예리한 레이더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암시를 보내고 있는 까닭에 더더욱 지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설은 안전벨트를 풀고 그를 바라보았다.

[운전...조심하세요]

준수는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손을 뻗어 가만히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가만히 있었다.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그 살결의 감촉에서 떨어지기 싫은 준수는 가만히 그녀에게로 얼굴을 접근시켰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 듯 설은 그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자 눈을 감았다.

가슴속 몽글몽글 아지랭이가 피어오르고 심장이 무섭게 빨라졌다.

드디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위에 내려 앉았다. 착 달라붙은채 준수는 그녀의 입술을 강하면서도 짜릿하게 맛보았다.

[내일...봅시다]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그가 말했고 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는 그녀가 사라질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이지 않자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준수요]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유마담이었다.

[솔직히 얘기하리라 믿으며 한 가지 물읍시다, 유마담...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소?......아, 그렇습니까?...아니오. ...아무일 없으면 됐습니다....그럼 끊습니다]

통화를 끝낸 준수는 양미간을 찡그렸다.

[아무일...없다?....]

그렇게 나즉히 중얼거리는 준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