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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오는 바람 -2-


BY 데미안 2011-12-18

1.

그녀의 생일날,

아침에는 하늘이 더높아 참으로 맑게 보이더니 그 차디찬 맑음이  오후가 되자 눈발을 날리기 시작했다.

장여인은 딸의 생일이라 일찌감치 가게를 정리하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갈비를 재우고 전을 부치고 잡채를 하고 미역국을 맛있게 끓이고... 하는 내내 장여인의 얼굴은 행복으로 빛났다.

케잌은 동생인 우가 사오겠다고 했다.

올해는 초대 손님도 있었다.

장여인을 사모한다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다니는 노신사다. 혼자 사시는 분이라 장여인이 가끔 그들의 식사에 초대를 하곤 했다.

설은 고작 자신의 생일에 부산을 떠는 게 영 부담스럽고 죄스러워 간단히 케잌만 하자고 했지만 장여인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설도 포기했다.

바지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메세지가 왔다.

-당신 집 근처요. 잠시 얼굴 좀 봅시다-

정중하면서도 명령조가 다분히 느껴지는 준수의 문자였다.

하여간 참 제멋에 사는 남자라니깐.....

하면서도 설은 빙긋이 웃었다.

[엄마.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아니, 어딜 간다는거야?]

[잠깐이면 돼요~]

하면서 설은 방으로 올라가 다운 자켓을 걸치고 얼른 집을 나섰다.

눈송이가 춤을 추듯 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 준수가 보였다.

둥...둥...심장소리가 제일 먼저 그를 반겼다.

그녀는 가만히 가슴을 손으로 쓸어 내렸다.

그는 검은 진바지에 검은색 하이칼라 점퍼를 입고 팔짱을 끼고 서 있더니 그녀를 발견하고는 차체에서 몸을 뗐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자 따스한 온기가 짜릿하게 저 밑에서부터 스멀거리며 기어 올랐다.

저 여자는 이런 내 기분을 알기나 할까... 알리가 없겠지.....

 

[왜요?...무슨 일 있어요?]

천진스레, 마치 친한 친구에게 묻듯이 그녀는 해맑게 그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도 오늘은 안되는데...어쩌죠? 진짜 오늘은 김준수씨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어요]

미안한듯이 그녀는 헤벌쭉 웃었다.

요구?...하아!

그녀의 웃음에 심장이 쿵. 내려앉고 가랑이 사이에 힘이 빡. 들어가지만 준수는 그녀의 참 맹랑한 말에 어이없어했다.

내가 뭇엇을 요구하고 싶은지...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은 까무라칠 주제에...

마음 같아선...!

그래, 마음 같아선 그녀를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 가고 싶은데 지금은 무엇보다 그녀를 자신에게 익숙하게끔 만드는 게 급선무라 준수는 애써 참는다.

많이 참는다...

정말이지 절로 한숨이, 돌아버릴 것 같은 한숨만이 시시때때 밀려 올 뿐이었다.

 

2.

설의 생일 선물을 사가지고 오던 유마담은 도로가에 세워져 있는 눈에 익은 차를 발견하고 멈추었다.

그리고 준수를 보았다.

[어머, 김사장이네?...근데 김사장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반가운 마음이 앞선 유마담은 인사나 할까 싶어 다가가려 했는데 그의 곁에 있는 여자를 보고는 멈칫했다.

설...이? 설이가 왜?...

더 놀라운 건 준수가 팔을 뻗더니 가만히 윤설을 팔안으로 끌어 안았다는 것이다. 거기다 설 또한 뿌리치지 않고 그에게 자연스레 안겨 있다는 것이다.

유마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둘이...왜 저 두 사람이?...

 

품안으로 그녀를 가둔 준수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결을 쓰다듬어 주었다.

비록 두꺼운 옷에 가려졌으나 준수는 설의 따스한 살결과 욕망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흠...오늘, 안된다는 것 알고 있소...]

그가 들릴듯 말듯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놓아주고는 슬그머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하얗고 가지런한 손가락은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믿을만큼  예뻤다.

그 손을 한참이나 어루만지던 준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걸어주었다.

큼직한 시계였다. 그것도 백금의!

시계 주변에는 한눈에도 알 수 있는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줄에도 보석이 박혀 빛을 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설은 동그랗게 뜬 눈을 하고는 준수와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왜...!!!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준수는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쥐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조용히 입술을 가져가 따뜻하게 베어 물었다.

헉.

그녀는 숨을 들이 마셨다.

그러나 미처 그녀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준수는 입술을 뗐다.

[생일...축하해]

헉.

짧은 시간에 참 여러번 놀라는 그녀였다.

시계에, 키스에...생일까지...어떻게 알고?...

놀란 그녀를 보며 준수는 그녀가 어떻게 생일을 알았을까 ...또 머리를 굴리고 있음을 알았다.

쯧쯧...나를 뭘로 보고...!

준수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다소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워 하는 그녀를 돌려 세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보내 주겠소]

하지만 그녀는 힘겹게 몸을 비틀어 그를 쳐다보았다.

[저,저기...잠깐만요. 왜 내게...!]

[오늘은 그 어떤 질문도 받지 않겠소. 다음에! 다음에 만나서 얘기 합시다]

반박하려는 그녀의 몸을 다시 돌려 세우며 준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집으로 가는 거요. 곧장! 돌아보면 당신은...오늘 집에 못가는 거요]

진담반 농담반으로 그녀를 겁주고는, 것도 모자라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쳤다.

반사적으로 그녀가 그를 째려보자 준수는 양미간을 좁히며 그녀에게 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총총거리며 집쪽으로 사라졌다.

준수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계...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몇군데나 돌아다니면서 겨우 찾아낸 물건이었다.

그의 인생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여자에게 선물한 일은. 아, 물론 어머니인 신여사를 제외하고는...처음이었다.

그에게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여자들은 서로의 필요하에 만났기 때문에 굳이 그가 선물 공세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있어도 그만이었고 없어도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윤설,

그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준수의 인생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안쓰럽고 대견하고 눈에 밟히고 걱정스럽고 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 안아 보고 싶고...

젠장....! 내 속이 시커멓게 타도 저 여잔 모를거야...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멀어지자 준수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유마담이다.

소리없이 유마담이 준수에게 다가왔다.

유마담의 표정이  심상치않음을 본 준수는 유마담이 자신과 설을 지켜 보았다는 걸 눈치챘다.

[저랑...잠시 얘기 좀 할까요, 감사장님?]

[...좋습니다]

준수는 혼쾌히 유마담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멀지않은 곳에 찻집이 있어요]

그래서 둘은 찻집에 마주 앉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자신을 쏘아보는 유마담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유마담이 앞에 놓인 물컵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보았습니까?]

일말의 흔들림없이 그가 입을 열었다.

유마담은 강인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그의 모친도 쩔쩔매는 준수를 보며 절로 주눅이 들었으나 마음을 야무지게 잡았다.설이 관련된 일이다.

유마담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지금...김사장이 우리 설이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 설이의 약점을 잡고, 그 애의 여린 감정을 갖고 장난칠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그가 눈썹을 치켜 세웠다.

[그 한번의 일로...김사장이 그 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다시 생각하세요. 그 애를 건드리지 말아요. 제가 그 꼴을 못봐요. 다시는! 다시는 그 애한테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제가 막을 겁니다. 김사장님 그렇게 비도덕적이고 비겁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설이를...그냥 둬요. 돈때문이라면 반드시...!]

[유마담...]

유마담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녀의 눈빛은  절절하면서도 애원적이었다.

[부탁이예요, 김사장님...설이는 그냥...!]

[유마담!]

준수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한가지 물읍시다. 날...믿소?]

낮으면서도 강한 어조로 준수가 유마담에게 물었다.

그가 무어라 반박을 하거나 몹시 난처해 하며 변명거리를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가 자신을 나무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유마담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진지한 그의 눈빛에 유마담은 침을 삼켰다.

[...한때는...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유마담의 말이 못마땅한 듯 그가 노려보았다.

[그 한때라는 말은 못들은 걸로 하고!...믿으시오]

어떻게 들으면 명령조요, 어떻게 들으면 협박같았다.

[날 믿으시오, 유마담. 약속합니다. 설이에게 그 어떤 나쁜 일도 생기지 않게 할거요. 내가 설에게 상처주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거란 얘깁니다]

[......!]

[잠시만...잠시만 모른 척 지켜만 봐 주시오. 날 믿어요, 유마담]

도통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마담은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3.

[니 이모는 왜 이렇게 늦는다니? 금방 올것처럼 말하더니...]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그들은 유마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게. 이상하네? 전화해볼까요?]

영문을 모르는 설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어이구, 하여간 양반은 못된다니깐. 저기 오네]

장여인의 말에 설은 출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유마담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초에 불을 붙일까요?]

윤우가 얼른 초를 꺼내며 신나했다.

 

[이모, 무슨 일 있어요?]

반은 넋나간 사람 모양새를 하고 있는 유마담에게 설이 조심스레 물었다.

[응?...으응, 아니야. 밖이...그래, 밖이 너무 추워서 정신이 없네]

[그렇죠? 아유, 우리 이모 어떡해~]

하면서 설은 유마담의 팔을 막 비벼주었다.

유마담은 재빨리 설의 손목에 시선을 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준수가 설의 손목에 무언가를 채워 주는 걸 보았다.

그런데 없다!

유마담은 조심스레 설의 안색을 살폈다.

웃고 있다.

웃고 있는 설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유마담의 마음이 짠 했다.

설아...이모가 혼란스럽다. 너, 김사장은 왜 만나는거니? 그리고 이모한테 왜 말 안해? 내가 모르는 무엇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거야? 김사장...경우없는 사람, 아닌 거 알아. 좋은 사람인것도 알아...하지만 이모가 걱정하는 건 ...니가 혹여...김사장땜에 상처받을까봐...

사실, 준수가 진심으로 설이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아니야...그 집안이 그렇게 쉬운 집안도 아니고...알만한 사람 다 아는 대단한 집인데, 김사장이 설이를...가령, 설이를 사랑한다고 해도 둘은...!

가시밭길이다. 유마담은 설이가 그런 가시밭 앞에 서서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김사장은 자기를 믿어 달라고 했다. 진심이란 거... 알 수 있었다.

유마담의 마음이 복잡해져 갔다. 혼란스럽기도 했다.

 

4.

기말 시험도 끝나고 방학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이미 방학 기분이 나는지 학교에선 모였다 하면 온통,

방학 하면 뭐할거니...어디 갈거니...그런 얘기들 뿐이었다.

아이들을 보며 설은, 담임을 맡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갔구나... 섭섭하면서도 기뻤다.

만감이 교차했다.

종회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중에 상급생 아이가 그녀를 찾았다.

[선생님. 교장 선생님께서 교장실로 오시래요]

[교장 선생님이?...으응, 알았어. 고마워]

뭔 일이지 싶다.

뭐...별일이야 있겠나...하는 마음으로 설은 뒷정리를 마무리하고 교장실로 내려갔다.

 

교장실에는 교장선생뿐만이 아니라 교감선생도 계셨다.

분위기가 싸...한게 설은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슨...일이지?...

그녀는 인사를 했다.

[어서와요, 윤선생]

여교장이다. 소매와 칼라에 보석이 박혀 반짝반짝거리는 푸른빛깔의 투피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교장은 그녀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교감이 헛기침을 한번했다.

반가운 부름은 아니란 걸 설은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다름이 아니라 윤선생...]

몹시 망설이는 듯한 어조로 여교장이 다시 말문을 텄다.

[내 이메일로 이상한 글이 하나 올라와서 말이예요.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여교장이 자신의 노트북을 펼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일단, 윤선생도 봐야 할 것 같아서...]

설은 여교장한테서 노트북을 받아 들었다.

화면에 띄워진 굵고 반듯한 글자로 눈이 가는 순간 설의 가슴은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교장선생님.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