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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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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은 불어오고-3-


BY 데미안 2011-12-10

 

1.

핵폭탄같은 그녀의 웃음 한방은 그의 서른 다섯생을 한번에 박살냈다.

그리고 그 속에 윤설이란 여자를 채워버렸다.

모래사장을 거닐며 미소짓던 그녀...

해물탕을 맛있게 먹던 그녀...

그녀 집 근처에서 내려 주었을 때 그에게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 준 그녀...

그 순간들이 되풀이...되풀이되면서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이 어미 말, 듣고 있니?]

신여사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에 준수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소파에 깊숙이 기대 뭔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준수를 신여사와 현수가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니, 신여사는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준수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그 시선이 싫어 괜스레 양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게냐?]

[무슨...고민 있어?]

신여사와 현수가 번갈아 가면서 물었다.

고민?...그렇지, 큰 고민에 빠졌지...심각한...

[쯧...신경 끄십시요....제가 어디까지 듣고 있었습니까?]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너 내 아들 맞냐? 어떻게 에미가 하는 사업에 도통 관심이 없니? 사업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지?]

[심통부리지 마십시요. 관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한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준수말이 맞습니다, 어머니]

매사에 차분하고 부드러운 현수가 거들었다.

[말씀 하십시요]

건조한 어조로 준수가 말했다.

[업자들 초대해서 발표회를 가지신다고, 그래서 너도 꼭 참석하라고...그 말씀 중이셨다]

[반드시 참석해. 명령이다. 오너로서의...!]

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여사가 얼른 일침을 놓았다.

준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2.

[윤설, 너는 정말이지 변하지 않았어]

선우가 저녁을 샀다.

그래서 혜지랑 같이 셋이 저녁을 먹고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사람좋은 웃음을 웃으며 선우가 말했다.

[너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

설이 웃음으로 보답했다.

[여전히 소년같고 잘 웃고...]

[군대도 갔다 왔는데 남자다워지지 않았냐?]

흰 이를 드러내보이며 선우가 농담조로 말했다.

[오우, 이선우가 윤설에게 남자로 보이고 싶은가 보네?]

혜지가 슬쩍 끼어 들었다.

설이 그런 혜지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선우, 너 솔직히 까발려봐. 설이 좋아하지?]

혜지는 설을 무시하고 선우에게 따지듯 물었다.

[장혜지 너!]

[너, 눈치챘냐?]

선우가 장단을 맞췄다.

[선우 너까지 왜그러니?]

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불편한 속내를 내보였다.

 

사실이었다.

선우는  봉사활동단체에서 설을처음 봤을때부터 마음에 들어 했다.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그녀를 보면 절로 미소가 스며 나왔으니깐...

설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도 다행스러워했고 남자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고마웠다.

그녀를 두고 군대 가게 되었을 때, 선우는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러다 어느날 편지가 끊겼다.

궁금해 미칠것 같았다.

그리고 제대후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속이 뒤틀렸었다.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이제라도 힘이 되어 주고싶어서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여전히...그녀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윤설, 너 나랑 연애하지 않을래?]

불쑥, 선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진심에서 한 말이었으나 설은 피식 웃었다.

[농담도 참...]

[어? 농담아닌데...나 괜찮지않냐?  군대도 갔다 왔고 능력도 있고... 너 애인없음 나랑 연애하자]

씨익 웃으며 선우가 그녀 코앞에서 말했다.

애인?...

왜 그때 준수가 떠오를까...

설은 애인이란 말에 준수의 까칠한 얼굴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아니...가슴이 저릿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왜...!!!

익숙치않은 감정이고 낯선 설레임이었다.

[쟤 진짜 농담 아닌가보다, 설아]

혜지가 묘한 눈빛을 하고 선우와 설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얜...친구끼리 연애는 무슨...그런 농담, 재미없어 선우야]

설은 고개를 저었다.

선우의  실망한 듯한 표정을 읽지 못한듯...

 

그후로 몇번 선우의 전화가 있었다.

밥 사줄게 나올래?... 영화보러 갈래? 아니면 뮤지컬...

그런데 그녀는 한번도 오케이 하지 못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니?]

혜지의 충고였다.

[밥 먹고 영화보고...그러다보면 우정이 사랑이 될 수도 있는 거지. 사랑이 별거니?  그리고 여자는, 자고로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자한테 가야  편한거야. 너, 선우만한 남자도 없다?]

[걘 친구야]

[친구가 애인되지 말란 법 있니?  연애는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거야]

그래도 설은 내키지 않았다.

선우가 좋은 남자라는 건 알고 있으나 그 좋은 남자가 그냥 친구이기를 더 바라는 것이다.

[어머, 눈이다!!!]

 

첫눈이다.

그것도 12월 1일에 내리는 첫눈이었다.

아이들에게 알려준다면서, 혜지가 호들갑을 떨며 교실로 사라졌다.

하나둘 내리던 눈이 점점 더 하얗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교실로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재잘재잘대는 소리가 교실마다 퍼져 나오고 있었다.

 

3.

학교앞이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제법 쌓이기도 했다.

방과후, 아이들이 갈 생각을 않고 운동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강아지들마냥 이리뛰고 저리 뛰고 난리였다.

설은 어김없이 혜지와 교문을 나오면서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한번 웃어주었다.

그 모습을 차안에서 준수가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녹는다.

눈이 간다...그녀에게로...

그가 교문밖에 있다는 걸 모르는 그녀는 친구와 한참을 얘기했다.

눈이 오는데 운전할 수 있겠냐...

뭐 이 정도야...

대충 그런 내용인 것 같았다.

준수는 혜지의 차가 빠져나가는 걸 지켜 보았다.

그녀 또한 조심스레 친구의 차 꽁무니를 지켜 보면서 집으로 발길을 뗐다.

준수가 앞으로 쭉. 나가 차를 세우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힐끔, 보던 그녀가 준수를 확인하고는 가까이 왔다.

[얼른 타지?]

그의 말에 그녀가 군말없이 올라탔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위에 눈이 내려 앉아 있었다.

[눈이 와요]

차에 타자마자 웃으면서 그녀가 한 말이다.

돌겠군, 저 웃음...

온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웃음이었다.

[그런것...같군]

나즉히 중얼거리며 준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눈을 쓸어주었다. 그 차가운 기운이 그의 손안에서 그대로 녹아내렸다.

[왠일이예요? 연락도 없이...]

그녀가 또 웃었다.

이제 그녀는 그의 앞에서 자연스레 웃고 얘기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다.

보기좋은 징조였다.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요?]

[저녁먹기는 이르고...눈구경 할까?]

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면 반가웠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꽃봉오리가 햇빛을 보면 활짝 피 듯이 자신이 그를 볼때면 그런 마음이었다.

이제는 그와 마주해도 부끄럽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변화에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자신의 가슴한쪽에 김준수라는 남자가 자리를 잡게 될까봐..

[그래, 며칠동안 뭘 했소?]

[한 것도 없어요. 매일 똑같죠. 아이들과 놀고...]

[그 동창이란 놈은 만났소?]

[누구...요?...아, 선우. 그앤 동창놈이 아니라 이선우예요. 김준수씨]

그녀의 말에 그의 눈에 힘이 빡 들어갔다.

[하여튼. 만났소?]

[한번요.왜요?]

[왜 만났소?]

[이봐요, 김준수씨. 친구 만나는데 이유가 있어야 해요?]

[친구? 그건 당신 생각이고 그 친구놈은 아닐 수도 있잖소. 남녀간에 친구는 무슨...!]

가소롭다는 듯한 그의 말에 설은 뜨끔했다.

[그,그러는 김준수씨는 뭘 하고 지냈어요?]

그가 휙. 그녀를 보았다.

말을 더듬는다?...무언가 편치 않은 게 있다는 증거군...일단, 그건 그냥 넘어가고...

[내 이름이 김준수라는 건 알고 있으니 그만 부르지?]

우선은 호칭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게 참...신경 쓰여요]

[무엇이? 그냥 준수씨라고 하면 되지]

[준수씨?]

그녀가 그의 말을 따라했다.

그런데 그 말에 준수는 머리끝에서 발끝가지 찌릿해져 오는, 순간적인 황홀감에 하마터면 운전대를 놓을 뻔 했다.

마치, 그 소리가 그녀의 손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미치겠군...이러다 진짜 미쳐버리지..

[그럼, 준수라고 부를수는 없잖소.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으니깐]

그는 일부러 퉁명스레 내뱉았고 설은 우습다는 듯 웃었다.

[맞아요. 준수씨라고 하는 게 가장 타당한 것 같아요. 앞으로 그렇게 부를까요?]

대답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차를 세운 곳은 어느 한적한 오솔길을 한참이나 올라서였다. 그곳이 정상인 듯 했다.

도시가 내려다 보였다.

빽빽하게 들어선, 온기없어 보이는 도시가 눈으로 덮히자 이내 포근하고 올망졸망한 곳으로 탈바꿈했다.

한군데...두군데...불빛도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워요]

도시는 밤이 되어야 진가를 발휘한다고 하더니 그런 것도 같았다.

감탄한 얼굴로 눈내리는 도시를 보는 설을 준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고 바라보고 있었다.

참 가식이 없는 얼굴이었다.

싫은티...좋은티...수줍은티...놀란티...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눈은 금방, 그녀의 머리위를 하얗게 덮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위 눈을 쓸어 주는 척 하면서 정겹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고 한번 웃어주더니 다시 눈내리는 도시에 정신을 쏟았다.

[차안에 들어가서 보는 게 좋겠군. 이러다 눈사람 되겠어]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는 차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서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소]

그랬다.

지대가 높아서 차안에서도 충분히 바깥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가 오면서 커피숍에 들러 사온 커피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아직 뜨거워요]

그렇겠지. 하지만 내 몸이, 내 마음이 더 뜨거워, 이 아가씨야...

준수는 그 소리를 삼키며 쓴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 소리를 내뱉았다간 그녀는 아마도 십리...아니 천리밖으로 도망가겠지...

버릇처럼 그가 혀를 찼다.

 

[그런데 당신 이름이 왜 설이지?]

한쪽팔을 운전대 위에 올려 놓은 채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아...그건 제가 태어났을 때 눈이 많이 왔다고...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생일이 겨울이군]

[네에...눈처럼 희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라고...]

회상에 잠겼다.

일기예보에도 눈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후 접어들어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겨울이면. 특히 눈이 내리는 오늘 같은 날...아버지가 많이 생각나요...그립구요...우습죠?]

하면서 그녀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우릴...두고 가신 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다 버렸어요. 어쩌면 제일 힘들고 고통스러운 분은 아버지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을 했어요]

준수는 그녀가 부친을 몹시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사랑이 있고 입가에는 쓸쓸한 그리움이 감돌고 있으니깐...

그리고 부친이 그렇게 가고 난 후 대책없이 남겨진 가족들을 보았을때 그녀가 겪어야 했을 그 절망감과 두려움을 그는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그 보다 더한 가족에 대한 사랑때문에 자신을 붙들어야했던 그녀의 절박함.

그것을  그는 직접 보지 않았던가...!

새삼, 이제와 그는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 작은 어깨위에 드리워졌던 짐을 이제와서 덜어 주고 싶어졌다.

안아서...감싸서...

그의 마음보다 몸이 빨랐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가 들고 있는 커피를 빼았아 조수석앞에 올려 놓았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는 그녀. 준수는 그녀의 머리속에 한손을 넣어 자신에게로 당기더니 그대로, 정확하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더이상 참을수가 없었다.

달달한 커피맛이 나는 그녀의 입술은 따스했다.

머리가 핑 돌것같아 준수는 부드러움따윈 던져버리고 거칠고 야무지게 그녀의 입술을 맛보기 시작했다.

천국의 맛이다. 금단의 열매가 이보다 달까...

그 달콤함을 베어 물듯 준수는  자신의 뜨거운 혀를,놀라서 벌어진 그녀의 입안으로 밀어넣어 그녀의 달짝한 혀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