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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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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은 불어오고 -2-


BY 데미안 2011-11-30

 

1.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햇살처럼 따스하게...깃털처럼 가벼웁게...그의 입술이 그녀 입술에 내려 앉았다.

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상이 멈춘 듯 했다.

자신의 심장마져 멎어버린 듯...오로지 존재하는 건 꿈결처럼 와닿은 준수의 입술 감촉뿐이었다.

온몸이...마치 인어공주가 거품이 되어 사라지듯, 자신 또한 사르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손끝 하나, 눈꺼풀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반면,

준수는 자신의 오장육부가 잠에서 깨어나는 듯 꿈틀대는 기분이었다.

죽어있는 육체에 비로소 온기가 공급되는 것 처럼...

입술을 움직여 그녀를 더 깊이 맛보고 싶은 충동이 머리꼭대기까지 뻗쳐 올랐으나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지금 그녀를 맛본다면 그녀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이다.

더 나아가면, 겨우 열린 그녀의 마음이 다시 닫혀 버릴 것 같아서이다.

빌어먹을...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준수는 힘겹게 자신을 추스리며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떨어졌다.

촛점없는 눈이 동그랗게 떠져 있고 키스할때의 상태 그대로 입술도 벌어져 있었다.

참나...!

웃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준수는 마법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그녀의 입술을 살짝 건드리며 손을 뒤로 뻗어 문고리를 돌렸다.

[내가...데려다 줄까?]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2.

[너희 둘,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고 했지?]

설이 자리를 비우자 기다린 듯 지원이 혜지에게 궁금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소식 들은게 있어서 말이야...설이 집, 완전 망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거야?]

[휴우, 그랬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심장병으로 오늘내일 하고 계셨지]

[어머니도...돌아가셨어?]

[돌아가실뻔 했지.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땡전 한푼 없었거든. 어느 누구 한사람 도와 주려고 하지도 않았고... 설이 걔...망망대해 혼자 떠 있는 심정이었을거야.  동분서주 뛰어다니느라 애가 꼴이 말이 아니었어. 무슨 짓이라도 할 판이었거든.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키다리 아저씨같은 사람이 나타나 어머니 병원비를 해결해 주셨어. 이모님이 아시는 분이라고...]

[키다리 아저씨?...그게 누군데...?]

[모르지. 설이도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라면서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 어쨌던 덕분에 어머니도 살고 설이도 학업을 마쳤고. 지금은 어머니도 건강하셔]

혜지는 무슨 무용담 늘어놓듯 술술 털어놓았다.

키다리...아저씨...?

준수가 연상되었다.

사장님이 이유없이 설이에게?...설마!...아니겠지...

[혹시 뭐...남자 친구라든가...그런 관계의 사람이 도와준 건 아닐까? 아니면...애인?]

[설이한테 남자가 어딨어. 걔는 미팅도 안했어. 절박한 마음에 엄마를 살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팔겠다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답답한 맘에서 한 소리였고...하여간 설이 주변에 남자는 없었어]

없었다고?...자신을...판다...?...

확실히 무언가 있어...! 그래, 윤설. 니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내가 반드시 알아낼거야. 반드시...!

싫다. 한지원은 윤설이 싫다.

그냥...윤설이 웃고 있는 모습이 싫다.

싫은데...그냥 싫은 설이, 자신의 완벽한 사장과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니 더 얄밉고 미웠다.

 

단아한 모습으로 화장실 간다던 설이가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를 ...!

역시...사장님과 무언가 있어...!

설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준수의 모습.

지원의 가슴속에서 분노와 질투가 부글거렸다.

밉다...그냥 밉다.

준수의 눈길을 잡고 있는 윤설이 밉다.

그는, 김준수는 한지원이 입사한 순간부터 이미 찍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설 사람은 그뿐이라고...!

그의 비서가 되기까지 한지원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윤설이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3.

올가을엔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하늘이 흐리다.

아니, 흐린가 싶으면 맑은 것 같고 그런가 싶으면 다시 흐리다.

변덕이 죽끓듯하다.

[제게 선약이 있었으면 어쩌려고 묻지도 않고 나오라고 했죠?]

학교 임시 휴일임을 어찌 아는지 점심도 되기 전에 설은 준수의 전화를 받았다.

-나오지?-

그녀의 스캐줄이 어떠한지 묻지도 않았다.

[취소하라고 했겠지]

[너무 독단적이군요]

[왜,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소?]

[그런건 아니고...]

[있었다고 해도 취소하라고 했겠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를 보며 설은  기가 막혔다.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을 것이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하는 표정이군]

놀랠 노.다.

[알긴...아는군요]

그녀가 작게 내뱉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모른척 했다.

[그런데 이런 가을 날, 사람들은 보통 산으로 가지 않나요? 바다가 아니라...]

[난 북적대는 분위기가 싫어. 체질상]

[사업하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아이러니 해요. 무슨 은둔자도 아니고...혹시 밥도 혼자 먹고 그래요?]

[술은 혼자서 마시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가족이 없나요? 왜 혼자 밥을 먹죠?]

그녀의 계속된 질문에 운전대를 잡은 채 그가 홱 돌아보았다.

[앞을 보세요. 전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생각만 많은 줄 알았더니 이번엔 별 걱정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난 가족도 없어 보이오?]

[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아요]

[쯧...어머니 살아계시고 위로 형님 한분. 사이가 원만하오. 끝]

[그런데 왜 혼자 생활해요?]

[이 나이에 그럼, 부모와 같이 살까?  불편해]

김준수씨 당신이 불편한 게 아니라 어머님이나 형님이 불편해 하시겠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설은 참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 선우...!

그녀는 힐끔 준수를 보고는 젼화를 받았다.

[선우?]

-윤설!...나를 잊지는 않았네...-

유쾌한 선우의 음성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윤설, 어디야? 오늘 학교 쉰다며?-

[으응, 어떻게 알았어?]

-혜지 만났지, 우연히.  지금 집이야, 밖이야?-

[밖에 나왔어]

하면서 설이 준수를 보는데 때맞춰 그 또한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남자 목소리...

목소리로 봐선 친근하다.

게다가 미소까지 짓고 있다.

준수는 못마땅했다.

뭐하는 놈이지...?

-지금 통화하기 곤란?-

[응, 옆에 동행이 있어서]

준수는 혀를 찼다.

동행...?

준수는 사납게 날이 선 눈으로 설을 한번 노려 보았다.

동행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 그럼, 나중에 전화 할래?-

[그럴게]

-꼭이다!-

[약속할게...안녕]

웃으며 설은 전화를 끊고 준수를 바라보았다.

[대학 동창이예요]

[누가 궁금하다고 했소?]

그가 비꼬았다.

유치하군, 김준수...!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렇단 얘기예요]

[그래? 그럼, 그냥 동창인거요, 아니면 캠퍼스 커플이었소?]

그의 물음에 그녀가 활짝, 소리내어 웃었다.

순간, 준수는 가슴 한쪽이 찌릿했다.

그녀의 웃음...

작은 핵폭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