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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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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은 불어오고


BY 데미안 2011-11-27

 

1.

김준수, 황보혁, 이장희.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생이다.

준수는 법을 공부했었다. 좋아서라기보다 늘 바쁜 부모님의 부재가 준수로 하여금 책속에 묻혀 살게 만들었는데 그러다보니 까다로운 법률쪽에 지대한(?) 관심을 쏟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법대를 간다고 하자 부모님은 물론 반대를 했었다. 그러나 준수의 고집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뉴욕으로 날랐다.

 

황보 혁. 그는 내과의다.

그의 부친은 경찰이다. 형도 경찰이다.

그는 경찰이 싫었다. 뛰고 땀흘리고 싸움박질하는게 싫어서 죽어라고 공부했다.

그래서 의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장희.

덩치가 산만한 이 남자.

그는 외아들이다. 부친은 고지식한 구청 공무원, 모친은 선생이시다.

그러나 그는 공부와는 담쌓은 골통이요 학교짱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걸리적거렸던 게 김준수였다.

그의 부모가 그토록 원하던 모범생!

한번 신나게 후려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준수에게 한방 크게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인간이 이장희다.

극과 극인 세 남자가 만나 우정을 쌓고 군대를 가고 서른 다섯 생을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2.

[우리 와인 한 잔 할래? 내가 쏠게]

여자 세 명이 모여 떠는 수다는 지구를 통째로 들었다 놓았다 한다고 했다.

그만큼 수다를 떨어도, 헤어질 시간이 왔는데도 못내 아쉬운지 한지원이 제안한 말이다.

시간이 열한시를 넘고 있었다.

[어디, 괜찮은 곳이라도 있니?]

술이라면 마다않는 혜지가 이게 웬 떡이냐는 얼굴로 덤볐다.

[물론이지. 최고를 자랑하는 곳이 있어]

한지원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앞장 섰다.

[설아, 지원이 쟤. 생각보다 괜찮은 구석이 있네? 여고때의 그 도도하고 새침한 고자질쟁이 한지원이 많이 변한 것 같지?]

의외라는 혜지의 말에 설또한 그런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내가 지원에게 느끼는 건 괜한...기우일 수도 있겠어....

설은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붙어있던 지원에 대한 의구심을 날려버렸다.

[어머, 여기는 내가 재혁씨랑 와본 곳인데...야, 한지원. 너, 여기, 보기보다 비싼 곳이야. 알고 온거야?]

지원이 멈추어 선 곳을 본 혜지가 나즈막히 놀라며 물었다.

[그럼. 뭐...한번쯤 이런 곳에도 와봐야 하는 거 아니니? 걱정마. 나 능력있는 여자야]

새침스런 표정으로 지원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쟤, 간덩이가 보통아니네? 여기, 분위기는 죽인다~]

혜지가 설의 팔을 잡으며 좋아라 했다.

입구부터가 유럽풍이다.

작고 심플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이름하야 [심플 와인]

 

3.

세남자중 술이 약한 사람은 이장희다.

덩치값도 못하는 남자.

그리고 세 남자중 유일한 유부남. 애가 벌써 둘이다.

[야, 김준수. 너 이제 뉴욕과는 작별한거냐?]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희가 물었다.

[조만간...들어가야지]

[어째 자신이 없는 말투다? 너, 가기 싫은거냐?]

황보혁이 아몬드 하나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그러더니 몸을 쑥. 내밀었다.

[너, 그 예쁜이 때문에 망설이는거냐? 아직도 '멈춤'상태야?]

그들 세 남자는 비밀이 없었다.

그래서 윤설의 존재를 안다.

준수가 혁의 병원으로 설의 엄마를 보내면서 당부를 했었다.

그리고 윤설을 보는 순간 혁은 준수와 설의 관계를 넘겨 짚었고 준수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다만, 윤설과 자신의 하룻밤관계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절친한 두 친구에게도.

[마음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없으면 말해. 내가 데쉬해보게.  한달에 한번씩 엄마대신 약타러 가끔 오는데, 예쁨을 넘어서서 이제는 매력이 치명적이야. 너 모르는건 아니겠지?]

혁의 농담반 진담반의 말에 준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미친놈...]

빌어먹을...치명적이라고? 미치고 팔짝 뛴다...

[너 임마, 너무 자신하는 거 아니냐?  내 아는 동기 의사놈이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야]

[김준수가 마음대로 못하는 여자도 있냐?]

장희가 우습다는 듯 웃었다.

[죽는다, 황보혁. 함부로 했다간...]

준수가 나즈막히 내뱉았다.

[아, 짜식...누가 함부로 한데?  속이 터져서 그렇지.  도대체 그녀에 대한 니 맘이 뭐냐구!]

[관심 꺼. 그녀 얘기는 니 놈들과 하고 싶지 않다.  술이나 마셔]

[아, 치사한 놈...너 아끼다 똥 된다는...! 어, 한지원이다]

무심코 출입문쪽을 보던 혁의 눈이 동그래지며 입가엔 절로 미소가 번졌다.

[역시...우리의 미스 한 미모는 어디서든 빛을 발한다니깐....! 어라..김준수, 너의 그녀다]

즉각, 준수의 눈이 먹이를 찾는 매처럼 재빠르게 그녀를 찾아 꽂혔다.

한지원과 들어서는 이는 분명 윤설이었다. 또 다른 여인과 함께...

어색한 몸짓을 하며 윤설이 조심스레  한지원 뒤를 따라 자리에 앉는 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뭐야, 미스한과 너의 그녀가 아는 사이야? 와우! 이런 행운이..]

[조용히 해라, 황보혁]

심기불편한 음성으로 말하면서도 준수의 눈은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합석할까?]

기대에 부푼 눈으로 혁이 준수에게 애원하듯 말했으나 돌아온 것은 준수의  도끼날같은 시선이었다.

[나도 반대. 다른 여자랑 있는 거 울 마누라 알면 나, 쫓겨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장희가 거들었다. 이번에는 혁의 도끼눈이 장희에게 꽂혔다.

[저 놈의 공처가. 하여간 내삶에 도움이 안돼!!]

[술이나 마셔, 이 바람둥이야]

장희가 히죽 웃었다.

 

4.

설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여인에게 정신이 쏠렸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스툴에 앉아 어슴프레한 조명 불빛아래서 그 분위기에 맞게 은은하게 노래 부르는 여인.

목소리가 허스키한게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 준다고나 할까...

절로 잔잔한 미소가 스며 나오게 만들고 있었다.

빨간 드레스, 빨간 립스틱, 빨간 매니큐어, 빨간 구두...

열정적인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듯한 파도의 목소리를 가진 여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취할 것 같았다.

건배를 했다.

피빛같은 와인의 맛이 달다.

그래서 설은 한모금 더 마셨다.

[이곳, 분위기 어때? 난 여기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아서 좋아. 그리고 럭셔리해서 좋아]

[분위기는 모르겠고...]

혜지가 와인잔을 들어 보였다.

[와인맛은 끝내줘!]

에구...누가 애주가 아니랄까봐...

[조심해, 지원아. 혜지 얘, 술 들어가면 끝장보는 애니깐..]

곱게 눈을 흘기며 설이 말하자 혜지가 혀를 빼보이며 웃었다.

[그래도 설이 넌 나를 버리고 가지는 않잖아. 그렇지?]

혜지의 애교에 설이 웃었다.

[너희 둘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니?]

한지원이 부러운 시선을 하고는 물었다.

[그럼, 기쁠때도 슬플때도 붙어 지냈지. 그렇지 윤설?]

[그래...]

설은 지원에게 웃어보였다.

[내가 힘들때 항상 옆에 있어 준 유일한 친구가 혜지였어]

[그...랬니?...]

살피는듯한 시선을 하며 지원이 설과 혜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래가 바뀌고 두잔째의 와인을 마시려는데 진동이 왔다.

설은 집인가 싶어 전화기를 꺼내 확인을 했다.

- 와인이 입에 맞소...-

정신이 번쩍 드는 메시지였다.

김준수다!!

와인?...내가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걸 어떻게...! 그럼....!!!....

그가 여기에 있다는 증거다...

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가만히 눈을 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내가 그렇게 밝은 것도 아니고 또 갑작스런 그의 문자에 혼란해진 터라 눈에 촛점을 맞출수가 없었다.

또 문자가 들어왔다.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와요, 갈까 말까, 또 망설이지 말도록. 내가 가는 수가 있으니...-

설은 입을 앙다물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필 그 남자가 여기 있다니...!

설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

오고도 남을 사람인지라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쪽으로 가는 설을 지원의 눈이 가만히 뒤따랐다.

분명, 지원은 설이 문자를 받고 당황해 하는 걸 보았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설을 보던 지원의 심장이 쿵했다.

 

김준수다!

자신의 사장, 김준수가  가만히 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심장이 꽉.조여오는 느낌이었다.

가끔 김준수가  <심플 와인>을 찾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김준수와 윤설이라니...!

한지원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질투와 미움이란 감정이 뱃속에서 점점이 자라나고 있었다.

 

윤설이 화장실 통로쪽으로 막 들어섰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더니 순식간에 옆 쪽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놀란 그녀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려 입을 딱 벌리는데 김준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준수는 그녀를 벽에다 밀어 붙인 채 문을 잠궜다.

[여기서 뭐하는거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꼴깍. 소리가 나게 침을 삼켰다.

그는 너무 가까이, 너무 친밀하게 가까이 있었다.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의문이 일었다.

왜! 그의 앞에만 서면 심장이 아프게 뛰는지...혼란스러운지...

그 까닭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한지원...내 비서와는 아는 사이야?]

참으로 침착하고 소름돋게 나즈막한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뭔가 말하려 그녀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젠장...!

준수는 힘이 풀렸다.

그녀의 입술이 너무나 유혹적으로 눈앞에 있었다.

맹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는 정작, 자신의 행동이 그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그녀의 매혹적인 입술을 맛볼수 있는데...

맛보고 싶었다. 훔치고 싶었다... 전부를 걸고라도...!

젠장할...!

[내 전화...왜 받지 않았지?]

잇 사이로 밀어내듯 준수가 물었다.

전화?...아, 그랬지. 그가 전화를 한 번 했었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돌아버리겠군...!

준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진짜, 바보도 아니고 이 여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남자한테 얼마나 위험한지...전혀 모르는군...

그는 숨을 토해내며 그녀를 끌어다 가까운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의자를 가져와 마주보고 앉았다.

힐끔 주위를 돌아본 설은 그곳이 룸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검은색 와이셔츠에 노타이다.

무엇이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준수를 보며 설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볼때마다 이렇게...사람 간 떨어지게 해요? 좀 평범하게 다가오면 안되나요?]

[내 질문에나 대답하지?]

그녀의 말엔 관심조차 없다는 투다.

그녀 또한 그의 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뭐하냐고 물었죠?  보시다시피 친구들과 와인 마시고 있었어요]

[두번째 질문...?]

심문하듯 그가  말했다.

그녀는 미안한듯 웃었다.

[한지원요?... 여고동창이에요. 졸업하고는 못봤는데...그날 사무실에서 보고는 저도 놀랐어요. 오늘은 지원이 만나자고 해서 만난거예요.  그때 얘기하지 않은 건 미안해요. 전 지원이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흠...그렇군. 그럼,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그건...제가 생각을 하느라...!]

그가 그녀의 턱을 잡더니 자신의 눈과 높이를 맞추었다.

[또 생각! 그 작은 머리로 무슨 놈의 생각을 그리도 많이 해!]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

[쉬워]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당겼다.

[그냥...예, 알았어요...그렇게 답하면 돼]

속삭이듯...봄의 아지랭이가 볼을 간지리듯 그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냉정하다가도 한순간에 부드러워지는 준수의 표정에 그녀의 정신이 또 멍하니, 패닉상태에 빠졌다.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가만히 움직였다.

스칠듯 간지르듯 그녀의 턱을 쓸고 있었다.

[답...하지?]

최면이다.

설은 쏘아보는 그의 눈빛에 걸려 든 자신을 알았지만 이상하게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분명 노라고 하고 싶은데 그 말이 목구멍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알았어요]

대답을 하면서도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자신의 목소리가 아닌것같았다.

그가 악마처럼 웃었다.

[내 전화...받을거요?]

설은 그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요. 만나요. 만나서 차 마시고 밥 먹고...그러자구요]

그녀는 어깨를 으슥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문으로 갔다.

[하지만 분명, 김준수씨는 후회할거예요.  저와 만나봤자....!]

돌아선 순간, 설은 자신이 먼저 후회했다.

문과 준수 사이에 자신이  갇힌 꼴이 되었으니.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 순간 설은 머리속이 하얗게 비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그의 눈동자...

이 남자의 눈동자가...이렇게...!

웃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꽉 다문 입술이 슬로우모션마냥 내려와 눈처럼 살포시...살포시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