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10월이면 어김없이 퍼져 나오는 노래가 있다.
10월의 쓸쓸함과 아련한 추억과 알싸한 이별을 습관처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매기의 추억>카페에서도 10월이면 습관처럼 그 노래를 틀었다.
청량한 가을 하늘은 아니지만 선명하게 와닿는 구름 한 조각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도 같았다.
커페모카 거품이 숨을 죽일때까지 설은 두손으로 쥐고만 있었다.
생각은 많은데 정리되는 건 없었다.
머리속이 복잡한 것도 아닌데 결론이 나지 않았다.
어려울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속 시원히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휴우......
전화벨이 울렸다.
혜지였다.
- 뭐해?...집구석에 박혀 있지 말고 월드센타 커피숍으로 나와라. 알았지?...
설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일방적이다.
2.
신여사가 두 아들을 불러 들였다.
[휴일날인데 쉬시지도 않습니까?]
못마땅한 듯 준수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신여사는 그런 아들을 한번 쬐려보고는 앞에 서류더미를 내밀었다.
[넝구렁이 영감이 땅을 넘겼다. 실버타운이 완성되면 자신에게 방하나를 내달라는구나. 영감탱이, 받을 거 다 받았으면서 욕심은...!]
[알짜배기 땅이었잖습니까. 호수를 끼고 있으니...]
[누가 모르냐... 영감이 그래도 마음을 바꿔줘서 고맙긴 해]
[그래서 공사를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여전히 별로 달갑지 않다는 어조로 준수가 말했다.
[내년부터...]
[주변 환경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면야 공사 하기는 쉽지 않을까요?]
현수의 말이다.
[아암. 무엇하나 훼손되지 않게 지어야지]
[어머님께서 손수 지휘하실 겁니까?]
[현수 네가 맡아라. 회복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쪽 분야는 나보다 네가 더 우수하잖냐. 어떠냐?
신여사의 말에 준수의 인상이 굳어졌다. 날카롭게 선 눈으로 신여사를 보았다.
[그럼, 호텔쪽은 누가 경영합니까?]
[네가 해야지]
신여사의 말에 준수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제 전공이 무언지 설마,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안다, 이놈아. 법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호텔 경영이 니 적성에 맞아. 당분간 네가 계속 맡아라]
[어머님!]
[그러면 니가 이 어미랑 실버타운 한번 해볼테냐?]
[1년만!]
옆에서 현수가 중재를 했다.
[1년만 더 맡아주면 어떠냐, 준수야. 그 후엔, 싫다고 하면 붙잡지 않으마. 너도 해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떠날 수 없다면서?]
준수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신여사와 형, 현수.
어릴때부터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고 살았던 자신과 달리, 형인 현수는 무엇이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공부든 운동이든 연애든...자유로웠던 준수에 비해 현수는 부모님이 반대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일찌감치 외국으로 날라 나머지 공부를 했던 준수와 부모님의 뜻에 맞는 여자와 결혼을 했던 현수.
결국 그 결혼은 3년만에 파국을 맞았다.
그리고 일에 빠져 살았던 현수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있을때 준수는 일시 귀국을 했다.
야윈 얼굴로 병실에 누워있는 현수를 보면서 준수는 가슴 한 쪽이 즈끈. 아파오는 걸 느꼈다.
형인 현수의 짐을 나눠지기는 커녕 오랬동안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형제지만 조용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현수와 차갑고 단도직입적인 성격의 준수.
그래서 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던 형제다.
함께 놀고 싶어하는 형을 늘 외면하면서 자신의 세계속에서 살았던 준수.
그래서 둘은 같이 있으면서도 질이 다른 외로움을 느껴야했다.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는 형을 보면서 준수는,
어쩌면...형은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을것이다...라는 걸 느꼈다.
그때 아차 싶었다.
자신이 형에게 무엇하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걸...무엇하나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남기로 했다. 현수가 깨어날때까지 형 자리를 지켜주기로...
그런데 그게 이제 덫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현수는 이제 마음놓고 준수를 조종하려고 했다.
동생이 이제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자신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않을 것이란 걸...
젠장...나를 미치게 하는 인간들이 왜이리 많아진거야....
3.
기다리고 있던 혜지가 설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혜지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언뜻,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뒷모습에 설은 설마하면서 다가갔다.
한지원이다!
지...원이가 왜?....
당황스러웠다.
준수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지원과 자신의 어색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설아, 너 한지원이 알지?]
얘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이다...
설은 지원을 응시했다. 지원이 샐쭉이 웃었다.
걱정마. 그곳에서 널 만난 얘기는 하지 않았으니깐...
지원의 미소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리마치 지원과의 만남이 설은 편치않았다.
[으,으응...]
[지원이 얘, 졸업하고 연락없더니 갑자기 연락이 왔지 뭐니? 보고싶다길래 만나기로 한거야. 너도 보고싶어하길래 내가 부른거야. 반갑지?]
아무것도 모르는 혜지의 들뜬 음성에 설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이지? 넌 옛날 그대로네?]
지원의 말이다.
[지원이 쟤, 대기업 사장 비서래. 근사하지 않니?]
[으응, 그래...잘 어울려]
커피를 시켰다.
지원은 그 예쁜 입가에 미소를 띄고 가만히 혜지와 설을 살피듯 건너다 보았다.
설은 불편했다. 지원의 눈길이....
[설이 너네 집...소식, 혜지에게 들었어...늦었지만 도움이 못되어서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이젠...지난 일인걸...]
설은 웃어넘겼다. 지원과 그런 얘기는 하고싶지 않았다.
[그래. 안좋은 일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아]
지원이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우리, 이렇게 사회인이 되어서 만나니깐 진짜 반갑다. 종종 연락하고 지내자. 어때?]
[야야, 우리야 좋지. 간만에 학창시절 얘기나 해볼까?]
물만난 고기마냥 혜지는 좋아라했다.
함께 웃는 지원을 보면서 설은 자신이 지원에게 느끼는 껄끄러운 감정이 괜한 기우가 아닐까 싶었다.
지원이 자신과의 만남을 모른척 해준데 대해 고맙기까지 했다.
4.
[왠일이냐, 니가 술마시잔 소릴 다 하고?]
황보 혁.
준수의 오랜 친구.
그는 잘나가는 의사다.
깔끔하게 자른 머리에 인상 또한 깔끔해 보이는 게 호감형이었다.
키는 준수만큼 컸다.
[무슨 일이냐? 천하의 김준수가 실연당하지는 않았을테고...이렇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놈은 아닌데...?]
손수 술잔에 술을 따르며 황보혁이 준수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면, 여자라도 생긴거냐? 뭐? 미성년자? 유부녀? 시한부?]
[미친 놈...마셔]
[그러고보니 너, 여자 만나는 거, 본지 오래되었다? 너...하자있냐?]
혁이 준수의 아래를 쭉 훑어보면서 말했다.
바로 준수의 칼날같은 눈빛이 혁에게 꽂혔다.
[알았어 알았어, 임마... 아, 자식, 오금저리게 쬐려보기는]
혁은 맥주잔을 쭉 들이켰다.
[근데, 너 진짜 무슨 일있지? 나는 못 속인다]
[그냥 마셔, 임마. 오늘 장희 온다고 했어]
[이장희 그 놈? 왠일이래?]
그가 오면 삼총사가 모이는 셈인가?....오랜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