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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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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게 부는 바람


BY 데미안 2011-11-15

 

1.

그렇군......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와 그녀의 첫만남은 결코 건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따지고 들자면 법에 위배되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는 그저 받는 입장이었고 그녀는...자의든 타의든 어쩔수없이 주는 입장일 수 밖에 없었으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그녀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전부를 주었던 남자 앞에서 일말의 수치심, 어쩔수없는 부끄러운, 상처입는 자존심...그 복합적인 감정을 떠 올리는 건 당연한건지도...

그와의 기억은 그게 전부니깐...

저 고집세고 자존심 강한 여자가 나를 외면하고자 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씁쓸했다.

그 당시 그 절망적인 상황이 나로 인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 같아 기분 더럽겠지...

[그렇다고 피해갈 수도 없는 일이잖소.]

[뭐라구요?]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탓에 알아듣지 못한 그녀가 물었다.

근데 때맞춰 종업원이 커피를 들고 나왔다.

[테이크 아웃]

짤막하게 명령조로 말하며 준수는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 다시 밖으로 나왔다.

조수석 문을 열고 받아온 커피를 그녀에게 건네준 준수는 차를 출발시켰다.

[저 곳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곳이 못되는군...]

[이봐요, 김준수씨. 어딜 또 간다...!]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

 

황급히 그녀가 휴대폰을 들고 확인을 했다.

집이다. 어쩌지...?

쯨쯧...또 그 놈의 생각...

[받지? 조금 늦는다고 해요]

그가 답답한 마음에 그녀의 생각을 끊어 주었다.

그녀가 그를 샐쭉 한번 쳐다보고는 휴대혼을 귀에 가져다댔다.

[어...엄마...아니, 아직 밖이야. 친, 친구를 만났는데 조금 늦을지도 몰라...응?....으응, 알았어요. 끊을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2.

한적한 도로가, 논밭 저수지가 보이는 정자앞에서 차를 세웠다.

운치 있다.

저수지 건너편 작은 언덕 주변에 밤나무가 꽃을 피워, 몽글몽글 그 모양이 서리같기도 하고 쌀을 튀겨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설은 코를 찡그렸다. 밤나무꽃 그 특유의 향이 왠지 향기롭지는 않았다.

상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한것도 아니고...닝글닝글한, 아주 어린 풀내음 같기도 하고...

코를 찡그리고 있는 그녀를 본 준수는 입가를 살짝 비틀어 올렸다.

[알고 있소?]

[뭘요?]

[옛날 과부가 많이 살고 있는 동네엔 밤나무가 유난히 많았다고 하지. 그 까닭을 아시오?]

[아니오... 왜죠?]

심각한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순간 준수는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참 나...내가 이 여자한테 물들었나...왜 망설이고 있는지, 원...

[거기에 까닭이 있나요?]

[밤나무꽃 향기가 흡사...]

그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남자의 정액 냄새와 같다더군]

아니나다를까 그녀의 얼굴이 금방 홍당무가 되었다.

[쯧...당신 놀리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얘기요. 틀린 말도 아니지...부끄러워 할 얘기도 아니고...]

[...뭐...그렇겠죠...]

그녀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 갔다. 적당히 식어 있어서 마시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여인네들이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으려 햇다는 건 ...어찌보면 지혜로운 발상아니겠소?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순애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김준수와 그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일단 그녀는 목을 축였다.

빨리 얘기를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

 

3.

[저기...이모한테 말씀 들었어요...그 돈...말이죠]

그녀가 본론을 거론하자 이번에 준수가 커피를 마셨다.

[그...돈...]

[그렇지, 그 돈...]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찐한 밤꽃 향기를 물고서.

[당신은 그 돈을 갚고 싶다고 했지? 왜?]

[당연한 걸 묻는군요. 빌린 돈은 갚는 건 당연해요]

[내가 그 돈은 받을 수 없다고 수차 얘기했소. 유마담에게]

그가 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내 그녀 앞에 툭, 던졌다.

설은  통장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 빚은 그날밤으로 끝났소]

[전...갚겠다고 했어요]

[날 보고 얘기하시오]

사무적인 어투다. 거슬리기를 원치않는...

하는수없이 설은 고개를 들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갚을게요...이해해주신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갚을거예요. 빚진 채로 평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출발이야 떳떳하게 하지 못했어도 끝은...깨끗이 끝내고 싶어요.  김준수씨한테도...저 자신한테도...당당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이 가을 바람처럼 참 서늘하게도 와 닿았다. 그녀의 머리칼이 살랑거리며 그녀 얼굴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돈을 갚으면 당신은 떳떳해지고 마음의 짐이 사라진다?...글쎄...내가 보기엔 당신은  당신 양심의 죄를 덜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

[돈을 갚아야 하는 무게감도 있지만 그 돈을 갚아야만  그 하룻밤이 합리화 되니깐...그래야 스스로가 용서가 되니깐]

그녀는 숨을 삼켰다. 정곡을 찔렀다.

그가 마치 어린 아이를 나무라는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모가 뭐라고 했던가...그가 눈에 힘을 팍. 주고 있으면...!

지금이 그랬다. 설은 사납게  노려보는 그의 눈빛 앞에 말문이 막혔다.

[설령, 그 돈을 다 갚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당신 이란 여자의 양심이 홀가분해질까?...의문이군. 내가 보기엔 당신은 그래도 그 하룻밤을 평생 가슴에 묻고 있을걸? 왜냐? ]

갑자기 그가 그녀의 머리를 잡더니 앞으로 당겼다. 그 바람에 설은 힘없이 끌려갔고 쓰러지지 않으려 두 손으로 정자 마루바닥을 짚어야 했다.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에게서 향기가 묻어났다. 밤꽃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방, 없던 심장이 새로 생겨난 듯 콩닥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눈썹이 이렇게 짙었던가?... 눈빛이 이렇게 깊었던가?...

서로의 숨소리, 서로의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이는 가까웠다.

[왜냐...윤설이란 여자가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깐]

바람소리만큼 작고 부드럽고 나른하게 들렸다.

매서워보이던 그의 입매로 눈길이 갔다.

저 차가워 보이는 입술이...키스를 할때는 그렇게 뜨겁고 부드러...!

화들짝. 윤설은  뜨거운 용광로에서 튀어 오른 것처럼 자신의 어처구니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미쳤어...내가 진짜  왜 이러는거야...!

튕겨 나가려는 그녀를 그가 이번에는 뒷덜미로 손을 집어 넣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쯧...이 여자, 진짜 환장하겠군. 어째 이리 표정관리가 안될까...어찌 이리  감정이 여릴까...

진짜 집어 삼켜 버려도 시원찮을 것 같은 마음을 꾹. 참고 준수는 그 대신으로 그녀의 얼굴에 바람을 훅. 하고 불었다.

그리고 준수 자신이 자신을 어쩌지 못하게 얼른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 돈을 갚는다해도 그 일이 없었던 게 되지 않아. 당신은 아마도 다른 남자들을 만나도...혹여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도 그 일 때문에  머리 싸매고 고민할 여자야.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준수는 커피를 들고 건배하는 시늉을 해 보이고는 쭉 마셨다.

[그, 그건 제 문제예요. 그러나 확실한 건 그 돈을 다 갚기 전에는 다른 남자를 만날수가 없다는 거예요. 어느 남자가...다른 남자에게 빚 진 여자를 좋아하겠어요]

힘 팍 들어갔던 그의 눈이 순식간에 풀려 버렸다.

내 말이. 당신은 그런 여자라고 했잖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땜에 한숨만 늘어...

[그런데 어쩌지? 난 그 돈 받을 생각 없는데...당신은 당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 돈을 갚는다지만 내 양심은? 분명, 내가 조건없이, 유마담을 믿고 빌려 주겠노라 했는데 그것을 어긴 사람은 당신이야.  당신이 그 잘난 자존심, 고집때문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 돈을 난 거리낌없이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결국 난 돈을 주고 당신의 하룻밤을 산 꼴이 되었소. 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지, 윤설?]

설은 침을 삼켰다.

[나 또한 양심을 가책을 느껴. 당신의 나약함과 당신의 상황을 이용한 꼴이 되었잖소. 그러면 당신은 그 보상으로 나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그녀는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만 보았다.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겠지.  안그래?  나 또한 그 돈을 받지 않음으로 해서 내 양심의 가책을 들고 싶소.  이제는 이해가 가, 윤설?]

사업가하고 해서 냉정하고 타산적일줄 알았는데 ...

그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한층 누그러짐을 느꼈다.  처음만큼 그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에 대한 빚의 무게가 처음만큼 강하지 않았다. 왜인지 이제는 편하게...편한 마음으로 그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경계심의 바리케이트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좋은 징조군, 윤설...

[마시지. 식어서 맛은 없겠지만...]

그가 눈으로 카페모카를 기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시키는대로 했다.

저렇게 말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

그는 그녀모르게 싱긋 웃었다.

 

4.

[그래도...그래도 전 돈을 갚을거예요. 그게...당신에게 조금이나마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봐요]

고집스레 그녀가 말했다.

[그 돈 갚고 남자를 사귀고 연애를 한다? 그때즘이면 당신은 노처녀가 되어 있을텐데...누가 데려가려나?...]

[그,그건 제 일이니깐 김준수씨가 상관할바가 아니예요]

그녀는 발근해 그를 노려보았다.

별꼴이야. 누가 그런 거 신경쓰래?...

[흠...나는 받기 싫다...당신은 줘야겠다...]

바람이 분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가을이 오자 날은 금방 저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