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이 제법 싸늘해지고 있었다.
부는 바람 따라 이리저리 제 몸 가누지못해 흐느적거리는 낙엽 몇 조각을 보며 설은 창문에 기대어 선 채 계속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연신 손안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들여다보기 수십번이었다.
저학년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고학년만 학교 운동장에 더러 모여 있었다. 아이들이 차대는 축구공이 뻥뻥거릴때마다 설의 마음 또한 솟았다 내렸다...하면서도 금세 심각한 얼굴로 휴대폰을 본다.
오늘이 꼭 일주일째였다.
유마담에게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으나 그가 정말로 만나자고 할줄은 몰랐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그런 막강한 사람이 뭐하러...
솔직히 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비참했던 상황에서 만난 사람이라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의 모든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않았다.
명함을 보며 설은 뱃속 깊숙이 올라온 한숨을 무슨 무거운 짐인냥 힘겹게 밖으로 꺼집어냈다.
[미안하다, 설아. 난 김사장이 눈에 힘 팍.주고 나즈막히 말하면 입이 안 떨어져. 너 그 포스, 느껴보지 않아서 모를거야]
김사장을 만나고 와서 유마담이 한 말이었다.
휴...이모. 나도 알아요. 그 남자 앞에 서면 내가 작아져 보이니깐....!
김준수 그 자체가 힘인데, 그 다 갖춘 힘앞에서 마음 약한 유마담이 무얼 어찌 할 수 있었으랴...
에구...
설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의자에 앉아 마음 먹은 듯 휴대폰을 열었다.
그래, 다시 학교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으면 전활 해야 돼...!
번호를 누르는 그녀의 손이 괜스레 떨리고 가슴은 돌덩이 얹어 놓은 듯 답답했다.
신호가 간다!
그 어떤 노래나 음악도 없는 그저 단순한 징- 징-하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그것은 마치 이 신호가 끝나면 넌 죽는다.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설은 끊어버릴까...말까...고민하고 있었다.
[어이, 윤선생! 회의 가야지?]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걸걸하고 우렁찬 혜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설은 지레 놀라 저도모르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2.
막 나가려던 준수는 자신의 울리다 만 전화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윤설의 전화임을 확인하고 딱. 켜는 순간,
-어이, 윤선생. 회의 가야지...-
하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끊어져 버린 것이다. 기가 찬다.
그는 그 순간이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전화하기 싫었는데, 그 조막만한 머리로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겨우겨우 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겠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스물 일곱 여선생인지 열일곱 여학생인지....
고개를 저으며 준수는 시계를 보았다.
이 여자...다시 전화 안 할껄?...
확신하면서 준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쩔수 없지. 내가 찾아가는 수 밖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준수는 30여분을 달려 학교 근처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졸업하곤 초등학교에 와 본 적이 없어서인가, 준수는 학교가 원래 이렇게 작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팔짱을 낀 채 학교 교문을 빠져 나오는 사람을 한 명도 놓치지 않으려 준수는 그곳에 눈을 고정시켰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하면서도 준수는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알아본바에 의하면 그녀의 집이 학교와는 걸어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그녀는 그 길을 운동삼아 걸어 다닌다고 했다.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에 익숙치 않은 김준수다. 그런 그가 1시간가량 꼼짝않고 있었다. 미동도 않고 교문만 보고 있었다.
드디어, 아이들이 다 빠져나가고 자가용도 더러 빠져 나가고 선생 같은 사람들이 한명 두명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윤설, 그녀가 누군가와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 여잔 누구야?...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둘은 교문앞에 서서 무어라 두어마디 주고받더니 손을 흔들며 다행히 헤어졌다.
여자는 차를 가지고 왔는지 학교 담벼락에 세워둔 차로 향했고 설은 학교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청바지에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와 연한 니트 가디건을 입고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다시 고쳐 매면서 굽슬거리는 머리를 등뒤로 넘겼다.
그 단순한 동작에 그의 가슴이 철렁.하는 건 왜일까...
준수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그녀 뒤를 따랐다.
교문을 벗어난 그녀가 휴대폰을 거내 한참을 들여다 보는가 싶더니 이내 체념한 듯 어깨를 크게 들썩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그렇지... 할리가 없지...!
설의 행동에 준수는 픽. 웃으며 차를 세우고 무심히 걷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고 돌려 세웠다.
그녀는 종잇장처럼 쉽게 돌아섰다. 놀란 얼굴을 하고...!
3.
[아,아니......!]
못볼걸 본 것처럼 , 말문이 막혀버린 듯 설이 더듬거리는 틈을 이용해 준수는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를 태웠다.
차가 출발해도 설은 멍하니 무슨 상황이냐는 듯 옆의 준수를 멍히 보았다.
[그 머리로 뭘 그리 고민하는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준수가 답답한 듯 말했다.
[전화해서, 안녕하세요. 일주일됐네요. 만날까요... 그 말 하는게 그렇게 어려운가...?]
[지,지금...뭐하는거예요? 이건...납치예요!]
그녀가 새된 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콧방귀를 꼈다.
[납치는 무슨...! 당신이 망설이는 일을 내가 대신 해주는거요]
[그,그런...!]
[더듬거리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요.내가 당신을 잡아 먹을까봐? 젖비린내 나는 당신을?]
젖...비린내?....
그녀는 인상을 썼다.
참 우습다. 그와 자신이 가까운 것도 아닌데 그는 마치 그녀를 오랫동안 봐 온 사람 대하듯 대했다.
거리낌도 없고 막역한 눈빛도 아니고 ...그녀는 심장이 덜컹거리고 숨이 막힐듯 한데 말이다.
[그렇게 보지 말지? 누가 보면 당신이 나를 아주 좋아하는 줄 알겠소]
뜨끔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앞만 보는 사람이 어찌 저리 잘 알까...
그녀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벌개졌다.
[해석도 참 유치하네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설은 그렇게 나즈막히 내뱉았다.
그가 그녀를 힐끔 보았다.
무릎위에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쯧...그 흔한 반지나부랭이라든가 팔찌, 시계조차 없었다. 가지런한 긴 손가락이 서로 꼭 엉켜 있었다.
무심히 차창밖을 보던 설은 차가 복잡한 시내가 아니라 한적한 도로로 빠지자 덜컹.하는 마음에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저기,사장님...]
[내가 당신 사장인가?]
그녀의 말허리를 싹뚝. 자른다.
[김준수라고 하지 않았소]
퉁명스런 말투였다.
[그럼...저기, 김준수씨...!]
그는 그 말투도 싫었다. 하지만 참아주기로 하지, 일단은...
[조용히 앉아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도 아니라고 했잖소]
[제 의사같은 건 무시하고요?]
새침스레 그녀가 내뱉자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투명하면서도 서글한 눈이 날카롭게 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먼저 돌렸다.
젠장...확실히 이 여잔 날 두려워하지는 않는군...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정중하게 행동했음 당신이 과연 이 차를 탔을까? 아닐껄?]
[......!]
[조금만 참고 앉아 있지, 윤설. 잡아먹지 않아]
사실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준수는 버릇처럼 혀를 찼다.
4.
그가 차를 세운 곳은 요즘 아주 번창하는 키피샵증 하나인 까페베네였다.
2층인데 온통 투명유리로 지은 게 무슨 동화속 건물같았다. 온갖 식물과 나무들로 둘러싸인...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그가 계단위로 밀어도 그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2층에는 그닥 사람이 없었다. 딱. 한 테이블?...
하긴 이 시간에, 이 변두리에 뭔 사람이 많을라구...
금방 종업원이 왔다. 그는 아메리카노. 설은 카페모카를 시켰다.
[그거...너무 달지 않나?]
그가 말했다.
[전 단게 좋아요]
그녀가 빠르게 대꾸했다.
그가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실수...!
그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아니, 아주 강렬한? ...아니, 깊이 있는...?
하여튼 묘한 눈을 하고 그가 똑바로 자신을 보고 있자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그 날...밤에도 그가 저런 눈으로 나를...!
맙소사! 그녀는 떠올려서는 안될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날의 영상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녀를 어찌할바 모르게 했다.
5년이나 지났는데도 왜 어제일처럼 생생한건지...
벌겋게 단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준수는 그녀 머리속에서 돌고 있는 걸 쉽게 간파했다.
그라고 왜 그녀를 보면 그날이 생각나지 않겠는가.
하루수십번, 어떤 날은 미치게 그날이 생각날 때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와의 하룻밤은 그에게 치명적인 인상을 남겼으니깐...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숨을 내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당신은 날 보면...그날밤 밖에 떠오르지 않소?]
노골적이고 단도직입적인 그의 말에 그녀는 뛸듯이 놀랐다. 그가 한번에 그녀의 속을 읽었다는 것과 그것을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는 게...!
발갛게 상기된 얼굴과 당황스러 어쩔줄 몰라하며 설은 행여나, 누가 듣지 않았나 싶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정말이지...표정관리 안되는군...
준수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판단이서지 않았다.
[아무도 듣지 않소. 날 보면 다른 게 생각나지 않소?]
[당연하잖아요! 그날밤 당신을 처음 보았고 그날밤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가 피식 웃자 설은 말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