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주영은 도혜옥을 다섯 번 만났다.
두 번째로 주영의 아파트에서 삼라만상으로 내려가는 날은 비가 내렸다.
고장 축제가 마감된 며칠 후였다.
동욱은 미친 사람모양 정신없이 바빴다.
어떤 날은 발 냄새 나는 작업복 차림으로 침대에 와서 술기운으로 쓰러져 잤고, 어떤 날은 세수도 않은 모습으로 머리는 까치집을 지어서 동이 트지 않은 새벽에 나가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젤을 바르고, 와이셔츠 차림의 단정한 동욱에게 느꼈던 그런 이미지와는 완전히 180도 다른 동욱의 모습이었다. 정말 저 사람이 자신이 알고 결혼했던 동욱이었는지 주영자신도 헷갈렸다.
주영은 인도를 따라 목적지인 삼라만상으로 가는 중이었다.
인도와 도로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벚꽃축제 동안 보았던 그 많은 사람들과 꽃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토록 화려하게 피었던 꽃이 남아 있는 벗나무는 단 한 그루도 없었다. 비가 와서인가?
벚꽃이 떨어진 자리에 비와 꽃이 큼직한 보도블록 위로, 혹은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가는 폭이 좁은 도로위로 빗물을 따라 꽃의 형태를 잃고 씻겨 내려가는 그 모습, 마구 흘러내려 가는 벚꽃이 꽃으로서의 의미를 잃은 것 같아 주영의 가슴이 미어진다.
'내 년에 또 꽃이 피겠지.' 주영은 그 말로 벚꽃과 자신을 위로했다.
인간이나 꽃이나 모든 것은 지게 마련이다.
꽃이 피는 모습도 지는 모습도 기뻐할 일만은 아니고, 슬퍼할 일만은 아님을 주영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늘 꽃이 폈고, 늘 꽃이 졌다.
주영은 자신이 지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죽어 가는 존재임을 꽃이 피고 지는 그 위치처럼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일은 주영에게 오래 된 기억이었다.) 주영이 사랑했던 남자 민섭이 스물 아홉이 나이에 죽었다.
고 3때 다른 반이었던 민섭을 윤수의 소개로 만나 둘이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사랑하게 되었고, 민섭이 군에서 제대한 다음부터 다시 만났고, 그가 죽기전날밤, 10시쯤에 주영의 집 앞에서 그를 본 마지막까지, 주영은 그의 신부가 되는 일만 꿈꾸었다.
그 날 밤도 다른 날처럼 까칤했던 민철의 수염이 주영의 입술 근처에 닿아 따끔거렸고, 그의 품안에서 후-우 하는 한숨소리 한번 들었던 정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방에서 자살했다는 그 말을 주영에게 전했던 사람은 민섭의 형 민우였다. 민섭을 생각하면 늘 주영은 민우의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주영아, 이 말 전해야 되는데...... 민섭이 자기 방에서......"
민섭이 과도한 업무의 스트레스 때문에 죽는다는 유서 한장을 남겼다고 민우가 말했다. 아무리 돌이켜 봐도 민섭이 지나치게 예민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한 주영은 e-mail 한 통 없이 그녀를 두고 떠날 만큼 ㅁ민섭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
어쩌면 민섭은 주영이 그를 잊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민섭이 죽은 한참 뒤 주영은 민섭에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었다면 그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었을까? 라는 그 생각으로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뿐이다.
민섭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을 때 사람임은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며 윤수가 동욱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두 사람이 닮은 점은 유난히 동그란 눈과 그들의 뻣뻣한 머리카락뿐이었다.
민섭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고 주영은 살아남아 동욱과 결혼했던 것이다.
동욱과의 결혼이 주영에게 민섭과의 과거를 온전히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 일은 매년 벚꽃이 온 거리에 눈부시게 피어나듯 불현듯 주영의 가슴 속에 눈부시게 피었다가 때가 되어 일제히 져버리는 그런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발 아래로 밟히는 꽃이 주영에게는 마치 민철인 것 같아 걸음을 비켜가며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누른다.
이제 잊을 때가 됐건만.
주영이 발 아래로 내려 다 본 인도의 보도블록 위로, 혹은 도로 위로 천지가 비에 젖은 벚꽃이다.
이 꽃들을 밟지 않고 도혜옥이 있는 삼라만상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결심이 선 주영은 몇 번 고개를 흔든다.
주영은 지천에 깔려 있는 벚꽃을 밟는 걸음에 부러 꾹꾹 힘을 주었다.
'행복빌라트'인 아파트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삼라만상의 문을 주영이 밀고 들어갔다.
가게 안의 작은 뻐꾸기 시계가 막 10시 50분을 가리킨다.
11시쯤 되어야 상점들의 주인이나 손님들이 서서히 제 자리를 잡아 갔다.
이런 비 오는 날은 예외겠지만.<9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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