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을 씌워야 한다니 께. 그래야 여러 사람 다 탄다구?”
떠벌이 아줌니가 주관하고 행사요원은 아줌마부대 요원이
드디어 바닷가로 여름 피서를 출발하게 됐다.
말이 그렇지 아주머니에 할머니에 우리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두 타려면 대형버스를 빌려야 하지만 우리들의 형편은 그 쪽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어디를 놀러 간다는 것은 하루 생계를 포기하고 하루만큼 걱정을 더는 게 아닌 더해서 더욱 꿈같은 일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배부르고 등허리 꼿꼿하게 피는 사람들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일이 놀러가는 것이라고 했었다. 지루하고 질긴 긴 장마가 끝나면 낮은 지붕을 낮은 집들은 그야말로 찜질방이다. 그늘 진 자리는 아예 햇볕을 따라 돗자리가 천천히 이동하고 시멘트벽은 또 다른 난방기로 길에서 아지랑이가 뜨거운 열로 들떠서 가물가물 했다.
먼저 막자언니는 상석으로 모셔야 하고 그 옆에 무쇠 솥을 실으니 이거 어디 피난 떠나는 거랑 비슷하다. 장마 땐 옥상에서 써먹고 놀러가서 또 써먹는 무쇠 솥 뚜껑도 잘 세워 옆에 모셔 놨다. 실실 웃고 엉덩이 비비적거리면서 자리 만드는 멀대아줌마나, 둘리아줌마는 시장을 본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영은이랑 아들놈은 트럭 뒷좌석에 구겨 넣은 것처럼 앉아 있어도 방글 방글 웃는다.
" 아유~~ 할멈은 동네 지켜야지, 우덜 따라와서 또 잔소리 할 려고?"
눈치 없이 아무데서나 툭툭 끼는 옆집 아저씨는 그래도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고 트럭 조수석에 모시고 그렇게 오라이하더니 부르릉 출발한다.
생전 나도 트럭에 포장 씌워서 여름피서 떠나는 법은 모르고 살던 터라 길가에 풍경을 뻘건 천막을 제치고 훔쳐보는 것처럼 고개 내밀고 갔던 그 바다였다. 장마철 홍수 겪고 저지대에 있는 동네 사람들은 어디를 놀러 가는 것도 단체였다. 돈이야 또 벌고 없으면 한 번 죽는데 뭐 겁날 것 하나도 없다면서 때가 되면 바람 불고 매미 울어도 한 철이다. 그 때 놓치고 못 가는 피서는 내 팔자고 남의 팔자 말하지 말라는 떠벌이 아줌마 피서제안에 하루 벌어 겨우 살고 있는 동네사람들 너두 나도 천 원식 각출하여 처음 떠나는 피서였다.
그 새 둘리 아줌마는 꼬부쳐 놓았나 차가 흔들 거릴 때마다 소주가 유리벽끼리 맑은 소리가 나니 멀대 아줌마가 또 째려본다. 니 또 그렇게 물 마시는 거랑 술 마시는 거랑 구분 못하면 거기에서 내버리고 온다는 니 세상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니, 여자가 술에 빠져서 니 인생 빡세게 되면 누구보고 신세 한탄해도 들어 줄 사람 한 명도 없다느니 설교조로 한 말씀을 하는데 ,떠벌이 아줌마가 누구 좃 빠지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노래나 한 곡조 뽑아 봐봐 거 뭐시냐? 소양강 처녀 십팔 년 노래 있쟎어?
“으이구! 무식하면 말이나 번지르르하게 다시 기름칠을 하던지 혀던가? 십팔 년이 뭐여? 열 여덞 딸기 같은 처녀라니께 그렇게 일러줘도 꿩고기 지져먹었남?”
“아 긍께! 그 노래 좀 틀어 봐 봐?” 떠벌이 아줌니가 노래 한 곡 주문을 하신다.
“내가 무신 노래방 기계 인감? 틀긴 뭘 틀어? 그려 알았어!”
“ 내가 막자 언니한테 특별히 부탁해가지고 닭다리 더 줄 테니 께 자아 ! 모두들 박수!! 짝짝짝 !!!”
떠벌이 아줌마 선창에 모두 박수를 친다.
해에 저믄 소오옹강에 ~~` 그렇게 시작하다보면 메들리가 이어지는데, 멀대 아줌마는 어디서 그렇게 편곡을 배웠나 그냥 주절 주절 잘도 나온다. 그러다가도 좀 쉴라면 얼른 야! 맥주 한잔 따라 놔? 하면 그 다음은 부우산 갈매기 ~~ 부우산 갈매기 하면 그 다음 순서는 안 봐도 안다. 배신자여~~~ 배애신자여~~ 이러니 떠벌이 아줌마나 나나 이거 어디 누굴 잡으러 가나 하는 심각한 표정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러다가 근처 바닷가에 거의 도달하니 이름 난 해수욕장은 입장료 받고, 주차요금 챙기니 어디 구석진 데 없나 뒤져서 뒷골목 뒤지듯이 개구멍을 찾아 들어 간 후미진 동네 갯벌근처에 포장을 치고 옆집 아저씨는 무쇠 솥을 턱 걸어주고 거기에다 언니는 늙은 퇴계 닭 대 여섯 마리를 삶기 시작한다. 한 너 댓 시간을 푹 삶아야 하니 그동안 갯벌 근처에서 조개를 잡으러 간다고 한 쪽에선 호미 찾고, 벌써 둘리 아줌마는 막자언니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소주를 숨긴 걸 알았나 보다 했다.
영태 할멈이 가만 가만 썩은 나뭇가지부터 주워오는 땔감을 뚝뚝 분질러 태우니 금방 김이 피식 피식 무쇠뚜껑에서 새어 나온다.
조개 잡으면 큰 물통을 필요하니 양동이를 들고 바닷물 뜨러가는 둘리 아줌마 뒷통수에 막자언니 큰소리로 니 금방 안 오면 닭 안 줄겨 한다.
조금 있으니 반은 모래, 반은 뻘이 바닥이 섬이 육지가 될 정도로 깊게 빠지고 조개를 캐러 다니던 떠벌이 아줌마는 한 자루 바지락에 비단 조개에 꽤 굵은 골뱅이도 제법 잡았다. 니들은 오늘은 못 먹고 낼 아침에 국물내가지고 국시 삶아 먹고 비단조개는 모래 빼내면 저녁에 닭하고 장작불에 타다 남은 거에 구어 먹으면 맛이 끝내 준다.
“영은아~~ 애들 데리고 얼능 이리와 봐봐? ”
조개가 모두 입벌려 픽픽 물 쏘아대는 걸 보던 울 아들 괜히 손가락 집어넣었다가 콱 물려 으아앙 조개가 내 손가락 안 놔 줘 하며 뛰어다니니 막자언니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니 쏙 빼준다.
그니께 조개 성질 난거 왜 건드려? 호호 불어준다. 영은이가 옆에서 눈빛이 반짝 거리고 있다, 그러다 저녁이 들어오고 여름저녁 해는 바다 밑에 푹 잠겨 질 무렵에 드디어 무쇠 솥 뚜껑이 열리고 밑에 깔아놨던 닭발을 건져 양념을 하고 흐물흐물 해진 뼈다귀부터 먹어야 제 맛이라면서 멀대 아줌마가 한 소리를 하니 그제야
“닭다리 하나 빨리 줘?” 멀대 아줌마가 재촉을 하자
“왜 또 그 배신자 부르려고?”
“ 아아니~~ !! 니가 준다고 했잖어?”
멀대 아줌마 이름이 혹시 배신자 아녀? 했더니 길길히 뛴다. 자기이름은 고상하다고 한다. 무신 고생? 떠벌이 아줌니가 되물으니 고생이 아니고 고상하다 그거여? 울 엄니가 한 삼개월 고른 건디..
“그니께 이름이 뭐여? ” 떠벌이아줌니가 묻자
“숙희! 노숙희! 따라해 봐?” 한다.
노시키? 뭐? 아이고 그게 아니고 시키가 아니고 숙희. 그러니 모두 다 시키씨~~~ 이러니 멀대 아줌마 그래도 내 이름은 고상하다고 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어찌하다 보니 자정을 넘어 모두 포장을 친 돗자리에서 차안에서 잠이 드니 주변이 조용했다. 그 때 알았다. 옆에 해송이 몇 백 그루가 오래 전부터 말 없이 살고 있었나 보다.
모든 것은 처음은 있었을 것이다. 생각 같아 선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단정하고 끝은 난다.
하필이면 내가 왜 이 동네에서 같이 피서를 떠나고 여행지가 같을까 깊은 생각에 젖어 들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이 없다고, 못생겼다고, 과거가 있다고 남자에게 버림을 받아 갈 곳 없어 헤맬 때 막자 언니의 도움으로 죽겠다고 차에 뛰어든 여자를 보살피고 치료를 해 준 인연부터, 떠벌이 아줌마처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경을 헤매는 둘리 아줌마도 병원에서 살려 낸 생명의 은인이었다.
둘리 아줌마는 깨자마자 막자언니 멱살을 잡고 흔들며 죽어가는 걸 왜 살렸냐고
책임지라고 한 통에 얼결에 같이 살았다고 한다.
여기에 네 살 박이 아들에 두 살짜리 딸아이를 업고 내가 이사를 왔는데, 이사 온 모양새가 어설프고, 변변한 살림도 없이 두 아이를 앞서거니 뒷 서거니 걷는 폼이 반은 얼이 나간 표정이었다고 한다. 혼자 된 여자는 아닌 것 같고, 남편은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다 막자언니는 우리 영은이를 보고 그렇게 귀여워 했었다. 툭하면 당신 집에 데려가 그 좋은 음식솜씨를 발휘해 영은이 간식에, 아들놈 데리고 노는 재미로 나에게 수시로 왕래를 하니, 나 혼자 죽네 사네 고민하는 시간보다 오는 사람들 얼굴 읽는 게 더 바쁜 바람에 힘 들어었네 어렵네라는 말을 잊어 버렸다.
난 한참 후에 알았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다 살다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것을 묻는 다면 그건 대단한 실례였다. 그럼에도 서로 아픈 상처를 감추기 위해 서로 더 큰 목소리로 싸워대니 아주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막자언니는 싸움 말리는 게 하루일과였다.
거기에다 둘리 아줌마는 술꾼이었다, 둘리라는 별명도 요리보고 저리보고 확인하자, 술에 수면제를 밥 먹듯이 겁없이 먹는 통에 막자언니는
늘 노심초사였다. 주방이며 싱크대며 구석구석 일일이 검열하니 둘리 아줌마는 그래서 할 수없이 살았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인네들이 오지게 먹은 마음에 뭉치니 이게 무서운 게 없고, 겁날 것도 없는 그 동네에서 난 다시 사는 것을 배우기 시작 한 것이다.
우연히 인수한 시골다방에 우르르 몰려가 일하는 통에 바쁘니 싸울 틈이 없다고 떠벌이 아줌마가 나를 불러댄다. 영은이 데려와라..오면 맛있는 거 해 놓을테니 꼭 데려와라 신신당부하니 나도 아예 언니네 가게에 두고 나 혼자 보험영업을 해 대었으니, 이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없었다.
거기에 막자언니는 식당수입금을 고르게 분배를 했다. 없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이니 나에게 아예 장부를 넘겨주고 통장을 주니 회계를 보게 했다. 적자일 때도 있었는데, 등 따습게 잘 방이 있으면. 밥 안 굶고 살면 그걸로 만족하자 이런 식으로 서로 위안을 주었다. 난 각 각 개인보험으로 건강보험을 가입을 시키고 식당에서 발생되는 이익을 그대로 공개하고 달마다 보고를 했다. 막자언니나 다른 아줌마들도 어떤 이의도 토도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더욱 뭉쳐 커지니 나도 그 힘에 새삼 놀라곤 했다.
서로 처지를 감춰 주어야만 상처회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막자언니가 말없이 늘 해대었던 곳. 김막자 식당은 소박데기들이 모여 다시 사는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