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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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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몰래 흘리는 눈물


BY 한상군 2006-02-15

 

 

 

 

 

 

 

   [수희야, 너 지금 자고 있는 거니?]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침대에 엎어진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전화 벨이 다급하게 울려 겨우겨우 수화기를 들었는데, 혜정은 마치 힐난하듯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 
 
   [너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거냐구?]
   [뭘?]
   [모르고 있었던 거야? 나 원 참! 현이가 오늘 아침 미국으로 떠난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수희는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크게 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게 정말이야?]
   [우리 신랑이 그러는데, 성균씨가 드디어 미국 지사장으로 발령 받아 떠난다는 거야. 그래서 오늘 현이를 함께 데려간다는 거야.]
   [몇 시에 떠나는 지 알아?]
   [그것까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오늘 오전 중으로 떠날 예정인가봐.]

   수희는 전화 수화기를 침대 위에 내던지고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수화기에선 계속 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니. 아무리 이혼을 했다지만 그래도 넌 현이를 낳고 키워준 엄마잖아. 멀리 이국타향으로 떠나는 마당에 애 얼굴 한 번 볼 수 있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도대체...]

   대충 세수만 하고 수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복도로 나와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그날따라 엘리베이터는 너무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희는 급한 나머지 비상구 계단을 뛰어내려와 아파트 뒤편에 주차돼 있던 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때 잿빛 하늘에서 뭔가 작은 입자들이 난분분 난분분 떨어져내려와 차창을 촉촉이 적셨다. 진눈깨비였다.
   날씨가 흐려져 거리가 질퍽거리면 유난히 차량이 많아지곤 하는데, 그날이 바로 그랬다. 북적거리는 출근시간이 지난 지 한참 됐건만,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차량들이 어찌나 많이 밀려들던지 수희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강변북로로 접어들기까지 무려 한 시간이 넘게 소요됐을 정도였다.
   게다가 강변북로는 완전히 주차장 그 자체였다. 만일 거북이가 기어가는 듯한 그 속도로 인천공항까지 간다면 날이 저물 게 분명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수희는 동생인 연희에게 연락을 취했다.

   [연희야, 나 좀 도와줘.]
  
   대뜸 울먹이는 언니의 목소리를 접하고 연희는 놀라는 듯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나 공항에 가고 있는 중인데, 차가 너무 많이 막혀.]
   [공항? 언니 오늘 어디 가?]
   [내가 가는 게 아니고...]
  
   눈물이 솟구치자 수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

   [왜 그래? 누가 떠나는데 그래?]
   [현이가...현이가 오늘 미국으로 떠난대.]
   [뭐라구?]

   연희도 너무 기가 막힌 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동생에게 애원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항공사나 공항에 전화해서 현이가 몇 시 비행기로 떠나는 지 좀 알아봐 줘. 난 지금 아무 것도 몰라. 항공편 이름도, 비행기 시간도, 아무것도 몰라. 다만 오전에 제 아빠랑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밖엔 모른다구. 넌 신문사에 있으니까 뭐든 알아볼 수 있잖니. 제발 현이 좀 한 번 만나게 해줘. 훌쩍 떠나버리기 전에 말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수희는 흐느껴울었다. 연희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알아볼게. 내가 알아보고 바로 연락해줄게.] 
          
   수희가 동호대교 아래 강변북로에 갇힌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도로 뒤편에서 엠뷸런스와 견인차들이 연이어 경광등을 번쩍이며 나타나더니 꽉 막힌 차선 사이를 무섭게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 쏟아지는 진눈깨비로 인해 전방 어디에선가 교통사고가 크게 난 모양이었다. 
   수희는 빨리 사고가 수습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기나 긴 차량정체가 풀려 한 걸음에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다.
   전남편 성균이 미국 지사장으로 발령 받아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은 몇 달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전혀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아들 현마저 제 아빠와 함께 훌쩍 미국으로 떠나버린다고 하자 수희는 거의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현아, 그 동안 엄마가 너무 무심했었구나.]

   진눈깨비가 쏟아져내리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수희는 울먹였다.

   [하지만 엄마는 너와 헤어진 이후,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단다. 이 엄마는 매일 너를 위해 기도했었어. 네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게 해달라고, 아빠와 새엄마 사랑 듬뿍 받으면서 구김살없이 밝게 성장하도록 해달라고 거의 매일 기도하곤 했었지. 너를 보고싶은 마음이야 하늘만큼 땅만큼 컸지만, 엄마는 그 동안 일부러 네 곁을 찾지 않았단다. 그건 왜냐면, 엄마는 너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송신인은 동생 연희였다.

   [언니...어떡 해.]
   [.....]
   [조금 있으면 현이가 탄 비행기 출발할 거래.]
   [.....]
   [언니, 지금 있는 데가 어디야? 조금 전 강변북로라고 했어? 내가 금방 달려갈 테니까 오늘 나랑 같이 점심 먹자.]
   [.....]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수희는 이미 휴대폰을 운전석 발치에 떨군 상태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핸들을 붙잡은 채 고개를 꺽었다.

   [지금 공항에 가봤자 현이를 만나지 못할 거 뻔하니까 그냥 차를 돌려. 그리고 오늘 나하고 점심 먹으면서 같이 지내자구. 오랫만에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저녁에 술도 한 잔 하자구.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언니, 언니!]
  
   휴대폰에선 계속 연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클랙슨을 빵빵 눌러대고 거친 사내들의 목소리도 주위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수희는 두 손으로 핸들을 꼭 부여잡은 채 다만 가녀린 어깨를 들썩거릴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