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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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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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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오랜 세월


BY 한상군 2005-12-10


                                               

 

 

 

 

   수희가 남편의 외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가까운 친구의 제보가 있고 난 뒤의 일이었다.  여고 동창생인 윤애가 계모임 때문에 시내 모 호텔 커피숍에 들렀다가 남편이 한 젊은 여자와 다정한 모습으로 객실 출입용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물론 윤애는 자기가 잘못보았는 지도 모르니까 넌즈시 확인해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불확실할망정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수희는 솜으로 싼 커다란 망치로 뒷머리를 한 대 둔탁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가정생활에 별 문제가 없었고,  남편의 내조에 소홀히 한 적도 없었으므로 수희는 그가 바람을 피우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몇 차례 미행을 하고 사실 여부를 추적해본 결과 정말로 남편에겐 숨겨놓은 여자가 하나 있었다.  한강변의 아파트를 한 채 전세내 그곳에서 두 남녀는 수희 몰래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그녀가 남편을 추궁했을 때 그가 선선히, 부인 한 번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고백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언젠가는 알게 될 일 차라리 잘되었다는 태도였다.
   그날 수희는 얼마나 분노하였었던가.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방탕해도 내 남편만큼은 그렇지 않다 믿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아내를 속이고 정부와 놀아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이 사회가 혼탁해도 그만큼은 묵묵히 가정을 지키리라 굳게 신뢰하였었건만 어찌 그리도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날 수희는 남편의 빰을 한 차례 후려갈기고 재떨이를 집어던져 화장대의 거울을 박살내 깨버렸으며,  그렇게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남편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다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혼절해버리고 말았었다.

 

   그날 춘천의 친정집에서 수희는 날이 저물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초췌한 모습으로 곤히 잠든 딸을 어머니는 차마 흔들어 깨울 수 없었던 것이다.
   수희가 눈을 떴을 때 어머니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였다.  그 동안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친정에까지 와서 이토록 정신없이 잠을 잘까 생각했던 것이다.  수희는 그런 어머니의 어두운 표정을 읽고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왕에 늦었는데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며 어머니는 붙잡았지만 수희는 한사코 빨리 가봐야 한다면서 길을 재촉하였다.

 

   수희가 차를 몰고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9시가 훨씬 넘었을 때였다.  그녀의 아파트엔 아무도 없었으므로 당연히 불이 꺼져 있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침실을 비롯해 방이란 방은 모두 불을 켰다.  심지어 욕실과 주방까지도 조명을 환하게 밝혔다. 어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차츰 실내의 온도가 달아오르자 그녀는 마침내 안도했다. 
   텔레비전을 켰다.  비록 화면으로나마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접하게 되자 외로움이 다소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뉴스 시간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깊숙이 앉은 채 쿠션을 끌어안고 망연히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주었다.
   정치인들의 모습이 비쳐졌다.  그들은 말끝마다 국민과 민주 소리를 뇌까리며 무엇인가를 해명하고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채널을 바꾸자 이번엔 무슨 종교 방송인듯 단정하게 머리를 깍은 사내가 나와 약장사처럼 떠벌이고 있었다. 
   수희는 채널을 바꾸었다.  바꾸고 또 바꿨다.  그러자 왁자지껄한 쇼 프로가 전개되었다.  그녀는 볼륨을 높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지만 추운 느낌은 여전했다.  으슬으슬 몸이 떨려오는 게 아무래도 몸살감기 증세 같았다.  수희는 욕실에서 나와 창문을 꼭꼭 여며 닫았다.  커어튼도 쳤다.  잠이 쉽게 올 것 같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신경안정제 몇 알을 복용했다. 수희는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문득 아들 현이 보고 싶었다.  귀여운 그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거실이며 온 방안을 뛰어다니며 개구장이 짓을 일삼던 그 모습이 눈에 밟혀 수희는 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밤 늦은 시간에, 더구나 평창동에 있는 아들을 보러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마를 찾지 않고 잘 지내고나 있는지..... 눈물로 이불깃을 적시며 흐느껴울다 수희는 방송이 끝날 즈음에서야 약기운을 이기지 못해 차츰차츰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튿날 수희는 정오를 훨씬 넘긴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도 충분한 숙면 뒤에 피로가 말끔이 풀려 스스로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수면을 방해하는 집요한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수화기를 드니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는 전날 며느리가 하루종일 집을 비운 사실에 대해 점잖게 나무란 뒤 이렇게 말했다.

   [아범이 밖으로 나돌수록 네가 진득하게 참고 기다려야지. 자고로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야.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몸가짐을 바로 하고 기다려야만 해.  여자가 주제 넘게 나서봐야 되는 거 하나도 없다.  직장에서의 아범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네가 경거망동해선 안돼.]

   수희는 시어머니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물었다.

   [현인 잘 있나요?]
   [그럼, 잘 있다마다.  이놈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톤이 냉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어머니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당분간 학교도 여기서 다니게 할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자식 앞에서 부부가 매일같이 싸움을 일삼는다면 그애가 무얼 배우겠니. 네가 재떨이를 던져 안방 화장대 거울을 깨뜨렸다며?  아이구, 성질머리 하곤.....너희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현인 우리가 돌보겠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곧 끊겼다.  빈 말이나마 동정 어린 따뜻한 말 한 마디 없었다.  만일 시누이가 지금 며느리의 위치에 있다면 그녀는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최소한 이런 식은 아닐 것이었다.
   수희가 볼 때 시부모는 관망 자세를 유지하려는 것 같았다. 냉정하게 중립 위치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며느리의 불행을 강 건너 불 보듯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운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원래 처음부터 며느리를 탐탁찮게 생각했던 그들이었기에 수희 역시 기대하는 바 없었던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가난한 집안의,  대학도 채 마치지 못한 여자를 며느리감으로 소개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냉대하고 뒷전에서 반대를 일삼았었던가.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결혼한 후 혼수와 예단 문제로 그녀가 겪어온 설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한 번 잠이 달아나자 수희는 이런저런 상념에 골몰히 빠져들었다.  그 동안 남편은 여러 가지 핑게를 대며 서서히 귀가 횟수를 줄여나가다 평창동에서 현이를 데려간 날부터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하루에 한 두번씩 하던 안부 전화도 일절 없었다.
   대체 그는 무얼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뭘 원하는 것일까.  정말 순순이 놓아주길 바라는 것일까.  그녀와 이혼하길 바라는 것일까.
   수희는 남편이 나흘째 귀가하지 않았을 때 그를 한 번 찾아가 만나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이 두려웠었다. 그가 어떤 태도로 나올는지 덜컥 겁이 났었던 것이다.  만일, 아아 만일 그가 구체적으로 이혼 문제를 들고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다는 사실이었다. 뭔가 매듭을 짓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밖으로 나돈 게 벌써 두 달째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수희는 남편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만나서, 무슨 얘기든지 듣고 싶었다.  더 이상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자.  가서 어떤 말이든지 해보자.  그래서 지난 일을 뉘우치고 있다면 깨끗이 용서해주고 다시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그러나, 그러나 만일 남편이 이혼을 요구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헤어지자고, 이제 너하고는 한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매정하게 얘기한다면 그때는 어떡하나.
   온몸이 축축했다. 몸살 기운으로 이불이며 소파도 땀에 펑 젖어 있었다. 둘러보니 전등이며 텔리비전 따위도 어제 켜놓은 그대로였다. 수희는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소파에서 일어나 텔리비전과 전등을 모두 껐다.  그리고 커튼을 반쯤 걷었는데  갑자기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제의 그 햇빛이 아니었다.  아무 걱정 없이 가족과 더불어 단란하게 살던 때의 그 햇살이 아니었다.  너무 쓸쓸하고 비참한 느낌이 들게 하는 햇빛이었다.  

   수희는 커튼을 도로 친 후 땀에 젖은 몸을 씻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