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라지다 (1)
민주가 평소 그렇게 부러워했으며 꼭 해보고 싶었다던, 텐트를 치고 보낸 해변에서의 2박3일의 캠핑을 꿈같이 보내고 돌아 온 후 나는 괜한 급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챘다. 어서 가게 자리를 알아보라고...
그러면서 나는 민주에게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가능하면 그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선은 따로 사람을 두지 않고도 혼자 운영할 수 있으면서 남의 눈에도 좀 깔끔해 보이는 그런 업종의 가게를 고르라고 말이다.
그리고 투자 총액이 5천만 원 한도였으면 한다고도 했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아내가 모르고 있는 내 예금과 사무실 운영자금 중 경리인 영미에게 의심받지 않고 꺼낼 쓸 수 있는 정도의 돈으로 충분히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가게자리를 민주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찾으라고 한 것은 그녀가 집에서 걸어서 편히 오갈 수 있는, 그래서 나 또한 수시로 오가기 쉬운 곳이었으면 하는 내 욕심...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내 시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려는 속셈에서였을 것이다.
민주는 한동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밍기적거리다 캠핑을 다녀오고도 보름쯤이나 더 지난, 한참 폭염이 시작되어 낮에는 나돌아 다니기도 힘든 한더위 무렵에야 겨우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겠다고 했다.
내 생각에 민주가 그동안 밍기적거리며 저어한 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처지 때문에 혹시라도 내게 돈을 뜯어내려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 하는, 그녀 나름대로의 결벽한 성격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고 남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어하는 그녀의 천성 탓 같기도 했다. 사실 그녀로서는 별 뾰족한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면서 말이다.
나는 혹시 모르니 계약금 정도는 들고 다니라고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으로 미리 찾아 두었던 5백만 원을 민주에게 내 밀었으나 그녀는 굳이 사양하며, 자기는 가게자리를 보는 눈이 서툴러 덥석 혼자 결정 못하겠으니 자기가 괜찮다 싶어 고른 가게자리를 내가 직접 가서 보고 결정하고 계약까지 해주는 게 좋을 듯싶다고 말했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싶은 생각에 그러마고 수표들을 다시 내 지갑에 넣어두었지만 민주의 나에 대한 생각의 편린을 또 한번 보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 말뜻에도 내가 자신에게 가게를 차려 준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착잡한 마음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민주에게 빨리 가게를 차려주고 싶어 하는 데에는 그녀가 다시는 그런 음습한 곳에서 술장사 따위의 일을 하지 않게 하려는 순수한 바람도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 알량한 돈으로 그녀를 오래오래 내 곁에 붙들어 매 두고 싶은 비열한 계산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날부터 민주는, 내게 점심을 차려주고 그 뜨거운 폭염의 날씨에 온몸을 땀으로 목욕시키며 격렬한 섹스를 끝낸 후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나서는 나를 따라 집을 나와 가게자리를 보러 다녔다.
민주네 집이 있는 골목을 나와 큰길에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가고 민주는 거기서 나를 배웅하고 가게자리를 보러 나가기를 한 일주일?... 민주가 괜찮은 가게자리를 보았다고 하며 그날 같이 한번 가보자고 했다.
그녀가 보고 맘에 들어 한 가게자리는 민주의 집에서 걸어서 한 십오 분 정도 큰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통행량도 많아 그런대로 목이 괜찮아 보이는 상가건물의 길가로 난 조그만 양품점이었다.
장사경험이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좀 떨어져 길가에서 바라 본 그 가게자리는 내 첫눈에도 썩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현재 양품점 영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민주 나이 또래인 그 주인여자가 집안에 무슨 사정이 있어 급하게 가게를 정리해야 될 입장이라 물건까지 그대로 인수한다면 권리금을 상당히 깎아주겠다고 하니 그런 장사가 처음일 민주에겐 퍽 다행한 조건 같아 보였다.
양품점 앞 길가에서 한참이나 이리저리 오가며 가게자리를 살핀 나를 민주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양품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길가에서 민주가 갑자기 팔짱을 껴오자 순간 당황했지만 안의 양품점 주인여자에게 둘이 부부로 보이고 싶었을 민주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속으로 민주에게도 이런 순간적인 재치가 있구나 싶어 대견스러웠다.
양품점 안에는 마침 아내 또래의 중년부인 둘이 누구에게 줄 선물인지 예쁘게 포장한 물건을 받아들고 계산을 치루는 중이었다.
주인인 듯한 민주 또래의 세련돼 보이는 여자가 중년부인들에게 받은 카드를 체크기에 긁다가 민주에게 아는 체를 했다.
‘오늘은 바깥 분이랑 같이 오셨네요.’하며...
그러자 중년부인들이 동시에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민주는 짐짓 내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고 더 바짝 내게 붙어 섰다. 아마도 그녀들에게도 부부처럼 보이고 싶었는지...
나는 아무래도 어색했지만 민주의 남편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운 표정을 한껏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계산을 끝낸 각자의 카드와 영수증들을 받아들고 바로 가게를 나갔다.
가게를 나가 길가로 나서는 그녀들의 뒷모습이 내 정면 진열대 위에 놓여 있는 탁상용 화장 거울을 통해 보였다.
그중 한 여자가 쇼우 윈도우를 통해 가게 안 우리 쪽을 야릇한 표정으로 힐끔 돌아보는 게 보였다.
나는 ‘아무래도 부부 같아 보이지 않았는가?’ 싶은, 제발이 저린 생각에 좀 뜨끔해 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아주 미인이세요.’
하고 주인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 입에 발린 소리일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과히 듣기 싫은 말은 아니다 싶어 나는 나도 모르게 씩 웃고 말았다.
‘사모님이 미인이신데다 아주 세련돼 보여서 이런 양품가게 하시기는 제 격 같아요.’
하고 주인여자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서너 평 남짓해 보였는데 양품점치고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런 규모였고 진열장 안이나 벽에 가지런히 진열된 갖가지 양품들이 대부분 세련되고 상당히 고급스러운 것들로 보여 장사가 되는 집이란 느낌을 충분히 주었다.
나는 그저 상식적으로 아는 몇 가지를 주인여자에게 대강 물어보고 이만하면 민주에게 차려주어도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매장의 물건 대금은 어차피 인수인계 과정을 거치며 구입원가대로 일일이 따져 계산할 것이기에 가게 권리금을 어느 정도까지 낮춰줄 수 있는 가를 가지고 한 시간 남짓 주인여자와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결국 주인여자가 처음 불렀던 액수에서 사분지 일정도 디스카운트를 한 액수에서 합의를 보고 그 양품점을 인수하기로 결정, 아예 그날로 계약을 해버렸다.
가게 보증금과 권리금 그리고 나중에 물건 대금으로 나갈 대강의 금액을 합쳐 5천만 원에 약간 못 미치는 액수라 내 계획과도 맞아 떨어졌다.
가게의 인수인계 날짜는 그날로부터 한 달 후로 정했는데 그동안 민주는 하루에 서너 시간 씩 매일 가게에 나와 주인여자에게 장사요령도 배우면서 물품들의 세밀한 인수인계를 하기로 해 양품가게를 처음 해보는 민주로서는 아주 다행하게 된 셈이었다.
가게의 매매계약서를 쓰면서 민주와 나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민주 이름으로 계약을 해주려고 했으나 민주가 내 이름으로 계약을 하라고 부득부득 우기는 바람에...
결국 민주를 양품점 밖으로 데리고 나와 내 이름으로 계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게가 내 명의로 되면 당연히 세금고지서라든가 이런저런 공문서 따위가 우리 집이나 회사로 날라들 텐데 그러면 큰 일 아니냐고 사정을 상세히 설명해주고서야 나는 겨우 민주의 명의로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아마, 주인여자는 이때 우리가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을 충분히 눈치 챘을 것이다.
민주와 나는 주인여자와 한 시간도 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로의 호칭 때문에 무척 애를 먹기도 했었다.
민주나 내 입에서 갑자기 ‘여보’ ‘당신’ 소리가 나올 수는 없었잖은가?
그래서 서로를 부른 호칭이, 나는 ‘자기야’가 겨우 였고 민주는 내게 ‘이거 봐요’ ‘저거 봐요’가 고작이었다.
계약을 끝내고 나와 봉투에 든 계약서를 민주의 손에 들려 집으로 보내고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 마음은 아주 뿌듯했다. 민주가, 그 아름다운 인물의 민주가 이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양품점의 주인이 되어 밝은 표정으로 가게 안에서 손님을 맞는 모습이 자꾸 상상되며...
다음날 점심을 먹으러 가서 본 민주의 얼굴은 그때까지 내가 본 그녀의 모습 중 아마, 가장 밝은 표정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민주는 그날따라 진수성찬의 점심을 마련해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점심상을 물린 후의 섹스에서는 스스로 흐느껴 울 정도로 절정의 최고조에 달하며 내게 극한의 황홀감을 선사해줬다.
민주는 내가 그녀의 집에 있는 동안 내내 수없이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자기가 내게 이런 극진한 사랑을 받아도 좋을 여자인지 모르겠다며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거려 보였다.
그리고 같이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가는 나를, 그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배웅을 한 후, 이제 곧 자기 가게가 될 양품점으로 장사요령을 배우러 갔다.
그렇게 매일 오후 2, 3시쯤 그녀의 집골목 밖, 택시를 탈 수 있는 큰길까지 내 팔에 매달려 나오는 민주와 나는 나이 차이는 좀 있어 보이겠지만 누가 보아도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