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행복해 하다 (2)
민주는 그 며칠 후 ‘칸타타’를 동생뻘 된다는 그 여자에게 완전히 넘겼다고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면서 화장대 서랍에서 꽁치꽁치 접어 묶어 둔 웬 종이뭉치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칸타타’에서 장사를 하는 동안 손님들에게 받아둔 외상영수증들이었다.
그녀는 이제 장사도 손을 뗐는데 그 외상값들을 받아 낼 묘안이 없겠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내가 그 영수증들을 한 장 한 장 펴 살펴보니, 몇 만 원짜리에서부터 여러 건을 합치면 백 만 원이 넘는 영수증들까지 모두 천여 만 원이 훨씬 넘는 액수였다.
그중에는 영수증에 외상을 한 사람의 명함이 같이 붙어 있는 것들도 꽤 많아 대강 그 면면들을 보니 대개 그 근처에서 조그만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가 술집에 오래 드나든 경험에 비추어, 가게를 그만두면 받아내기 어려운 것들 아니겠냐고 솔직히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민주는 스스로도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었는지 그 영수증 뭉치를 다시 화장대 서랍에 밀어 넣어 버리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자신의 몇 푼 되지도 않는 밑천을 결국 그 사람들의 입 속에 다 들어부어 준 꼴이 되었다고 씁쓸히 웃었다.
민주의 그런 쓴웃음 진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녀에 대한 애잔한 생각을 다시 안 할 수없었다. 저렇게 영악하지 못하게 살았으니 어떤 일에선들 제 몫 한번 제대로 챙겨 본 적이 있었을까 싶어...
그러나 나는 한편 민주가 그 술집을 때려치운 것이 무척이나 다행으로 여겨졌다.
민주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었는지 푹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 당분간 아무 것도 안하고 집에만 있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쉬는 동안 강릉에 있다는 어머니와 동생네도 한번 들러보지 않겠냐고, 원한다면 하루 짬 내서 내 차로 태워다 줄 수도 있다고 그리 깊은 생각 없이 의견을 냈다. 내 깐에는 그녀가 장사하느라 어머니를 보러 갈 틈도 별로 없었을 것 같다는 판단에...
그러나 의외로 민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장례 이후 한번도 집에 가본 일이 없다고 하며 내가 깜박 놓치고 있었던 그녀의 남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민주는 하나뿐인 동생이자 비록 핏줄은 다르지만 그래도 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유일한 혈육인 그 남동생의 결혼식에 마저 참석하지 않았었다고 했다.
자신이 술집을 전전하며 웃음을 팔고 때로는 몸까지 팔아 대학을 마치게 한 동생이었지만 그에게 손톱만큼이라도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싶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하면서, 그래도 그 동생이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는 것 같아 자기로서는 무척 다행으로 여긴다고도 했다.
민주의 남동생은 지금 강릉에서 꽤 괜찮은 국영기업체 지사의 과장급으로 거기서 사내커플로 만나 결혼한 그의 아내와 아들만 둘을 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했다.
비록 민주가 참석을 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한 후 한동안 그 동생은 일년에 한두 번 정도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 와 그녀를 만나고 누나에 대한 고마움과 애처로움을 표시하며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보은의 뜻도 전했지만 그녀가 극구 말렸다고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담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결벽에 가까운 성격과 비록 동생일망정, 아니 오히려 아끼는 동생이었기에 이미 더럽혀 질대로 더럽혀진 자신의 추한 몰골을 보이기 싫어 자꾸 피하고만 싶었을 그녀의 상황이 내 머리 속에 선하게 그려졌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또한 그녀를 보면 마치 자신의 업보로 딸자식이 그런 인생을 사는 것 같이 여겨 눈물부터 보이며 한스러워 하는 모습을 번번이 보는 것도 그녀로서는 차마 할 짓이 아니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결국 그렇게 그녀 자신이 어머니와 동생과의 만남을 기피하다보니 그들과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져갔고 이 즈음 수년 동안은 이따금 동생의 집도 아닌 직장으로만 전화를 해 어머니와 동생네 집의 안부를 물어 자연스레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는 정도의 관계만 이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동생에게 전화를 할 땐 항시 공중전화를 사용해 자신의 핸드폰 번호나 거처의 전화번호조차도 모르게 한 지 벌써 몇 년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코끝까지 찡해지며 가엾기만 한 그녀의 인생에 한탄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민주의 이야기를 다 듣고 한참이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민주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는 내게 이성으로서의 감정보다는 외롭고 고단하기만 한 자신의 일상에서 그나마 잠시 마음을 붙들어 매 둘 수 있는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듯 나는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민주에게 왜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내가 그녀의 아름답고 선량한 눈에 먼저 반했듯이 그녀 또한 내 눈에서 어떤 선량함이 느껴졌다고 했고, 그래서 자신이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한 것이 그 이유였다고 했었다.
민주의 그 말을 다시 뒤집으면 결국 그녀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며 살았고 또 그만큼 사람의 따뜻한 정에 굶주려 있었다는 말도 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그런 민주의 고단하고 외로운 삶에 내가 민주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즈음 내가 혹시나 민주와의 섹스에만 탐닉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었다. 민주와 같이 있을 때마다 나는 거의 그녀와 섹스를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으니 말이다. 물론 내게 점심시간을 전후 한 워낙 짧은 시간의 여유만 쓸 수밖에 없어서였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민주는 그런 내게도 무척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믿어도 좋을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섹스를 할 때 나만큼 자신을 배려해주는 남자도 내가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리고 민주는 내 건강에 대해 은근히 걱정을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내 나이가 있는데 그렇게 매일 격정적으로 자신에게 쏟아 부어도 좋은가 하고 말이다.
민주를 안고 그런 두서없는 생각들을 하던 나는 문득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긴 시간을 같이 있을 방법으로 한 2, 3일 여행을 다녀올까 하는...
곧 피서철이 다가올 즈음이므로 가는 데마다 혼잡할 그 시기를 피해 조금 이른 지금 민주와 둘이 한적한 바닷가에라도 다녀오면 좋을 듯싶었다.
내게는 담담하게 표현했지만, 6개월 가까이 고생한 보람도 없이 어쩌면 그녀의 전 재산일 수도 있는 적잖은 손해를 보고 가게를 넘긴 민주의 쓰리고 아플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사무실에서의 일정을 더듬어 보며 민주에게 먼저 말부터 꺼냈다.
‘우리 며칠 어디 가서 바람이나 좀 쏘이고 올까?’
민주는 의외인 듯 눈이 휘둥그레져 고개까지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
‘... 집에는...?’
역시 그녀는 내 집에서의 일에 먼저 신경을 썼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면 되고... 민주가 괜찮겠냐는 말이야?’
‘저는... 당신이 같이 가자면 너무 고맙지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는 여전히 내 집에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우리 집 걱정은 말고,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모레 목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토요일 늦게 돌아오는 거로 스케쥴을 잡자. 민주는 어디가 제일 가고 싶어?’
나는 그때 쯤 머릿속으로 사무실의 일정 정리가 대충 되고 있었다. 조금 무리는 따르겠지만 그 정도의 시간쯤은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내에게 댈 핑계는 지난번에 한번 써먹은 새로운 사업 구상에 필요한 자료수집 차의 지방 출장이었다.
나는 사무실 일정조정에 필요한 세부적인 내용과 아내에게 둘러 댈 세밀한 핑계 내용을 뒤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민주가 가고 싶다는 곳이 어디일지 그것부터 급하게 물었다.
민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좀 엉뚱한 제안을 했다.
장소는 서해나 남해 바다 어디쯤이면 좋겠고 텐트를 가지고 가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 저, 바다 가본 지 참 오래 됐어요. 마음 같으면 제가 자란 동해 바다 쪽이 좋은데, 거기는 왠지 꺼림칙하고... ’
그 말 속에는 그녀의 소심한 성격에 혹시라도 고향의 아는 사람들과의 조우를 걱정하는 뜻이 담긴 듯해 잠시 마음이 짠했다.
그러나 십대나 이십대 젊은애들도 아니면서 텐트를 가지고 가자는 민주의 말은 진짜 의외였다.
‘근데 웬 텐트...?’
하고 내가 다시 묻자 그녀는
‘좀 창피한데요... 저 사실 아직 한번도 텐트 가지고 놀러 가는 거 해보지 못했어요.’
하면서 얼굴까지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하긴 여고를 졸업하고부터 내내 고단한 삶을 살아왔을 그녀의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어느 때 한번 마음 놓고 텐트 싸 짊어지고 놀러갈 일이 있었겠나 싶어 그 제의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결국 그날, 민주와 나는 서해안 쪽 어디 쯤 한적한 바닷가에서 2박3일 동안 텐트를 치고 지내기로 결정을 봤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며칠간의 사무실 일정을 체크해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스케쥴 중 앞당길 수 있는 것은 앞당기고 미룰 수 있는 것은 미루어 놓았다.
그리고 사무실의 직원들, 특히 영미에게 둘러댈 핑계와 아내에게 둘러 댈 핑계 사이의 간극이 없도록 주도면밀하게 시나리오를 짰다.
그즈음 아내는 거의 술 마시는 일없이 집에 일찍 퇴근해 들어오는 내게, 이제야 철이 들었다며 만족해했고 민주와의 과격한 섹스로 아무래도 피로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나를 위해 나이 탓인가 싶다며 좋다는 몇 가지 영양제와 한약방에서 보약까지 지어 챙겨 먹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약들을 먹을 때마다, 내가 죽일 놈이다 싶어 심장에 비수가 찔리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민주에게 몰입되어가는 나를 어쩌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 무렵 한약을 먹는 동안은 부부관계를 삼가라고 했다며 그나마 뜸한 나와의 섹스까지도 스스로 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