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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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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9/ 그녀가 말하다 (3)


BY 盧哥而 2005-09-05

 

그녀가 말하다 (3)




그날 그렇게 민주의 집에서 그녀를 안고 누운 채 나는 그녀의 긴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섹스를 한 날, 새벽부터 늦은 아침까지 사이에 세 번씩이나 했던 그 날, 그 모텔에서 한번씩의 섹스가 끝난 사이사이의 짬에 들었던 그녀의 간략한 과거 이야기에 좀 더 살이 붙고 곁가지가 늘어난 이야기들을...


민주 그녀는 태생부터 역시 불행한 여자였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생부가 누구인지 모르는 여자였다. 아니,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는 여자라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그랬었구나!’ 하고 내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처음 자신의 아버지가 동해안의 한 작은 포구마을에서 고깃배를 타던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사실 잘 믿기지가 않았었다.

비록 지금 하찮은 술장사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얼굴이나 전체적인 외모, 그리고 여러 가지 태도에서 보이는 느낌은 많이 배운 여자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생 뱃사람이나 하던 허술한 집안의 자손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태생적인 기품과 귀티가 나는 구석이 여러 군데 보였던 것이었다.


그녀는 사춘기 때인 여중시절부터 피부색을 비롯한 외모는 물론 체격까지도 아버지나 남동생과 자신이 무척 다르게 생겼다는 데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었으나 워낙 자신을 끔찍이 여겨주는 아버지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었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안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바로 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술병과 홧병으로 죽은 것도 사실은 자기의 탓이라고도 했다. 자신의 씨는 아니었으나 아버지는 그녀를 어릴 적부터 무척 예뻐했고 또 그녀의 미모나 착한 마음씨 등을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었단다. 그래서 남의 고깃배를 타는 어려운 살림형편에서도 그녀를 강릉 시내에 있는 여고까지 진학시켜주기도 했었고... 그러나 그녀가 여고를 졸업하고 처음 취업한 직장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불과 몇 개월 만에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결국 술집 호스티스로 전락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때부터 홧병이 들어 술로 세상을 몇 년 보내다 결국 그녀가 스물다섯 무렵에 세상을 뜬 것이므로...


그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집에 며칠 더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그예 자신의 출생비밀을 들었단다.

그녀와 나란히 잠자리에 든 채, 그날 밤 따라 이상하게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이던 그녀의 어머니가 새벽녘에 느닷없이 그녀의 손을 찾아 꼭 잡아 쥐고는 한참이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더니

‘... 어미 팔자가 더럽다보니 자식 팔자까지 더럽히는 것 같구나...’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술집을 전전하던 중에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하던 술집에 술을 대던 주류도매상의 배달원이었는데, 그렇게 그 술집을 드나들다가 어머니와 눈이 맞았고 그 술집에 상당한 빚이 있었던 어머니를 몰래 빼내 둘이서 야반도주하여 이르게 된 곳이 지금 사는 그 포구였다는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정확하게 누구의 씨인지 모를 아이를 배고 있는 중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새로 자리를 잡느라 차일피일 미루다 한참 나중에야 산부인과를 찾아가 아이를 지우려고 했지만 시기도 좀 늦은데다 그때 어머니 자신의 건강상태로 보아 낙태수술은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며칠을 고민하는 것 같더니 결국 어머니에게, 나중에 따로 구박 안할 테니 그냥 낳아서 키우라고 흔쾌히 약속을 해줬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그녀였다고 했다.


결국 그날 새벽,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끔찍한 비밀을 두 가지씩이나 한꺼번에 듣고 만 셈이 되었다. 하나는 물론 자신의 출생이 너무도 황당하고 비극적이란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머니가 술집 작부 출신이란, 정말 꿈에도 상상 못했던 그런 비밀을...

거기다 자신의 과거와는 다르게 정말 잘 키우고 싶었을 딸이 어느새 자신의 전철을 밟고 있었고, 또 자기의 씨도 아닌 딸을 처음 약속대로 애지중지하며 잘 키워낸 남편이 결국 그 딸이 다시 아내의 어두운 과거를 답습하는 것을 보고 반 미친 사람처럼 변해 술로 세월을 보내다 급기야 세상을 뜨는 것을 지켜 봐야했었던 어머니의 회한 또한 그녀에게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청천벽력 같은 비밀을 어머니에게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이미 없었다고 했다. 다만, 자기의 씨도 아닌 자신을 극진히 사랑해주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새삼 고마웠을 뿐이었고 어머니의 그 슬픈 내력을 이어받은 듯 자신 역시 어쩔 수 없이 술집에 몸담고 있는 게 운명이나 팔자처럼 여겨졌을 뿐...

그리고 당시 그녀에겐 자신의 팔자나 한탄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홧병과 술병으로 벌써 몇 년째 생업을 놓고 있었던 터였고 마침 대학을 다니던 남동생의 뒷바라지까지가 만만치 않아 그녀로서는 죽기 살기로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술집의 호스티스로 전락한 사정은 결국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영악스럽지 못했던 성격이 서로 상승작용을 한 결과로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여고를 졸업하고, 그렇게 자기의 딸을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기던 아버지의 뜻대로 처음 취직한 자리는 동네 포구 근처에 있었던 제법 큰 관광토산품 매장의 캐시어였었단다.

그 포구 마을은 물론 근방 일대를 통 털어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던 그녀를 아버지는 자신에 곁에 두고 있고 싶어 했었고, 또 겨우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치는 것으로 족했던 그 동네 많은 여자애들 중 그래도 번듯하게 강릉 시내까지 나가 여고를 마친 자신의 딸이 월급도 괜찮고 깔끔한 직업이랄 수 있는 관광토산품 매장의 캐시어로 근무한다는 걸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자랑스러움과 기대는 몇 달 못가 깨져버렸다.

그녀를 처음 고용할 때부터 어딘지 미심쩍은 행동을 보였던 그 관광토산품점의 사장이라는 자가, 그것도 나이가 50대로 아버지뻘도 더되는 자가 집요하게 그녀에게 집적거리다 기어코는 그녀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었다.

그녀가 위기의 순간에 도망쳐 나와 다행히 강간을 당하는 불행한 사태는 모면했으나 그녀는 곧 그 토산품매장을 그만둬야했고, 자신의 창피스러운 행동의 원인을 그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그 사장의 철면피하기까지 한 그녀 주변에 대한 모함은 종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수치스러운 소문을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힘없고 빽 없는 뱃사람에 불과했던 아버지는 하소연 할 데 한군데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차츰 실의에 빠져들어 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가붙이는커녕 변변히 아는 사람조차 하나 없는 서울에 올라와 공장이며 상가의 점원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가는데 마다 자신의 외모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했다. 주위에서 계속 집적대는 남자들에게 시달렸고 또 또래의 동료 여자애들에게는 항시 시기심의 대상이 되어 따돌림을 당하다 결국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하는...

그러다 결국 달콤한 조건을 내세우며 손을 뻗쳐 온 유흥가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 서울에 올라 온지 불과 2년을 못 넘긴, 그녀가 스물두 살 무렵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영악스럽지 못한 그녀는 술집에서도 제대로 돈을 벌 수 없었고, 항시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그나마 그녀가 자신을 끝 간 데 없이 망가뜨리며 겨우겨우 모은 돈으로 자신의 남동생이 대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것 정도만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을 뿐 그녀는 결국 술집 호스티스 생활에서 조차도 성공하지 못했고 그저 부평초처럼 떠 돈 생활이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호스티스 생활을 벗어나려 그녀는 나름대로 조금만 돈이 모이면 옷가게를 벌려 본다거나 이런 저런 다른 일을 시작도 해봤었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다시 술집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반복됐고, 이젠 여느 술집에서 받아 줄 나이도 지나 종내 후미진 길가에 장사도 잘 안되는 지금의 ‘칸타타’를 빚을 내 인수 맡아 장사를 시작한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녀는 한 시간도 넘게 한 그녀의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서 나는 사람의 얼굴엔 결국 그 사람의 심성과 팔자, 그리고 살아 온 내력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정말 실감났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이 여자는 도저히 물장사 타입이 아닌데 하며 갸우뚱거렸던  내 판단이 결국 맞았고 그녀의 커다랗고 아름다우며 선량하기 그지없는 눈을 보면서 평생 그 누구에게 적의를 품어 본 적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도 그녀가 그동안 살아 온 내력에 합당했던 것으로 생각됐으며 항시 우수에 젖은 듯 그늘이 져있는 그녀의 표정 또한 내가 그녀와 첫 섹스를 갖기 전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너무 아름다워 오히려 인생이 불행한 주인공처럼 느껴졌던 느낌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 중, 사실 무엇보다 더 관심이 있는 남자들과의 이야기가 빠진 게 의아해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그 사이에 당신이 좋아했거나, 당신을 좋아했던 남자들은 하나도 없었나?’

하고 말이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다시 뗐다.

‘...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잠시잠시 거쳐 간 사람들뿐이었어요. 제 쪽에서도 처음부터 깊은 정이 간 사람이 없었고 상대 쪽에서도 대부분 잠시 엔조이한다는 생각들뿐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제대로 된 남자 중에 누가 저같이 화류계를 돌던 여자한테 깊은 정을 주었겠어요...’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결국 나도 그런 남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렇게 잠시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쐐기를 박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다른 남자 애기하면 기분 나쁘지 않아요? 뭐, 좋은 이야기라고... 난 당신이 버리지 않는 한 당신만 사랑할 꺼에요... ’

민주는 말을 그렇게 마치며 내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으며 그녀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다시는 묻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벽시계가 벌서 세 시를 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아직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내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민주를 천천히 떼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