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하다 (2)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민주에게 하루 한 번 정도 낮에만 전화했을 뿐 만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전화통화를 하면서 받은, 나로선 생각지도 않았던 충격이 사실 적지 않았다.
민주가 술장사를 하는 여자라는 거야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막상 그녀가 뭇 사내들의 술 상대를 하고 있는 현장의 소리를 듣고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줄은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민주를 이제 내 여자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나는 또 내가 술에 만취한 상태였지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까지에 대해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물론 민주에 대한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분명히 ‘사랑이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아내를 만나기 전 잠깐씩 사귀었던 몇 여자들에게서는 물론 심지어 아내와의 2년여에 걸친 연애 시절에도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고 민주에 대한 나의 그 간절한 그리움이나 강한 소유욕은 ‘사랑’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설사 그녀를 확실하게 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다 해도 그녀에게 그런 솔직한 표현은 안하려고 했었다. 그것이 아내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생각했었고 또 어떤 의미에서 지금 민주에게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고 있는 내 스스로에 대한 최후의 제동장치로 남겨두려던 것이기도 했었다.
또한 나의 그런 섣부른 고백이 잘못하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도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내 처음의 계획은 민주와 나 사이를 단지 그저 마음이 끌리는 남자와 여자로, 어차피 결혼 같은 건 서로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서로 기브 앤 테이크를 하는 관계 정도로만 설정하고 있었던 것인데 나는 기어코 술김에 그런 고백까지 해버렸고, 그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게 못내 꺼림칙하게 가슴 한구석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로 며칠을 보내고 있을 때, 그러니까 일은 벌려놓고 막상 어떤 확실한 액션은 취하지 못하고 겨우 하루 한번 그녀에게 어정쩡한 안부전화나 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날은 민주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출근하고 얼마 안돼 서였는데 오늘 점심에 다른 약속이 없으면 자기가 점심을 준비하겠으니 집으로 올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민주의 집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 그녀가 사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던 참이라 좋다고 승낙을 했다.
마침 점심시간 후 두어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여유도 있어 잘됐다 싶었다.
점심 때 사무실을 나와 택시로 그녀의 가게 앞까지 가니 그녀가 가게 앞에 이미 나와 서있는 게 보였다.
집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는지 발목 위 한 뼘 가까이 내려오는 편해 보이는 분홍 빛 플레어스커트에 같은 색깔의 양팔이 시원하게 드러난 티셔츠를 받쳐 입었는데 그녀의 흰 피부와 풍만한 몸매에 썩 잘 어울리는 옷이라는 생각을 뜬금없이 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채 1주일도 안된, 겨우 며칠 만에 다시 그녀를 보는 것인데도 나는 그녀 앞에 다가서는 순간 온몸에 비늘이 솟듯 짧은 전율이 스쳐갔고 심장의 박동이 가파르게 빨라져 감을 느꼈다. 도대체 그녀의 무엇이 매번 나를 이렇게 간절한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것인지...
민주의 집은 그녀의 가게가 있는 뒤편 골목으로 한 참 안 쪽으로 들어 간 거의 막다른 곳에 있는 낡은 연립의 반지하에 있었다.
그 연립의 현관에서 지하로 난 서너 개쯤의 계단을 앞서 내려가며 그녀는 여전한 그녀의 어눌한 말투에 정말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죄송해요. 사는 데가 좀...’
나는 속으로 하긴 좀 그렇다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말없이 있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따고 열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먼저 내 코끝에 훅 끼쳐왔다.
그녀가 나를 먼저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뒤따라 들어 왔다.
거실이라고 할 것도 없는 비좁은 마루 한 칸에 조그만 싱크대가 달린 주방이 겸해 있었고 큰 방 하나와 창고로나 쓸 수 있는 작은방 하나 그리고 욕조도 없이 세면대와 변기만 달랑 있는 화장실이 둘러있는 게 전부인 구조였다.
집이 너무 좁아 좀 답답했었던지, 아니면 음식냄새 때문에 방문과 창문을 죄 열어 놓아서였던지 나는 그걸 한 눈에 다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큰 방에 상을 보아 놓고 있었다.
‘찌개하고 국 좀 데울게요. 이리 앉아 계세요.’
하고 그녀가 상아래 아랫목에 접어서 깔아 둔 담요 위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 그녀는 상 위를 덮었던 상보를 걷어내어 들고 주방으로 나갔다.
상 위에는 몇 가지 나물무침들과 김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싱싱한 생물 고등어에 큼지막하게 썬 무를 몇 개 섞어 넣고 고춧가루를 듬뿍 풀어 졸인 생선조림이 그 특유의 입맛을 돋우는 냄새를 풍기며 조그만 법랑 냄비에 담겨 있었다.
아직 맛은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정갈하게 접시에 담긴 나물들이며 생선조림이 꽤 맛이 있을 거란 예감을 충분히 주고 있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바쁘게 밥이며 국을 퍼 그릇에 담는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녀와 같이 있을 때 늘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주 조심스럽고 또 나를 아주 어려워하는 듯한 그런 표정의 모습이었다.
그녀와 내가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그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며,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는 판단도 들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아내와의 식사 때와는 전혀 다른, 아니 근사한 식당에서의 외식이나 그 어떤 다른 식사자리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내 평생에 이런 호강이 있을까 싶은 그런 느낌을 받으며 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정말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예상했던 대로 상위에 차려진 반찬들과 국이며 찌개는 내 입맛에 꼭 맞았고 내가 호강이다 싶을 정도였다는 것은 내가 밥 한술을 뜨고 나면 그녀가 젓가락으로 일일이 반찬을 챙겨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내 입에 넣어주는 그런 호사를 누렸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임금님이나 한다하는 대감들이 기생이나 몸종들에게 받는 듯한 그런 호사를 말이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여러 번 말렸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정성껏 차린 그 음식들을 그렇게 일일이 챙겨주고 그걸 맛있게 받아먹는 나를 보면서 행복해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무리 의심의 눈을 하고 뜯어보아도 가식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어쩌면 그녀의 천성같이 느껴지는 그런 태도였다.
나는 그렇게 밥을 먹는 내내 한편으론 ‘왜 이런 여자가, 이렇게 아름답고 조신하고 마음씨 고운 여자가 여태 불행하게 살았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밥을 세 공기나 비우고 배가 불러 이제 그만 먹어야겠다고 할 때까지 그녀는 내 식사시중을 드느라 막상 자신은 경우 반 공기 정도의 밥을 비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숟갈을 놓자 그녀도 숟갈을 따라 놓았고 이내 차를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나갔다.
그녀가 끓여 내온 커피까지 다 마시자 배가 너무 불러서였는지 식곤증이 금세 몰려 왔다.
그녀는 상을 밀어 놓고 나를 잠깐 일으켜 내가 깔고 앉았던 담요를 길게 펴고 이불장에서 베개까지 꺼내 반듯하게 놓아주고, 누워서 잠시 주무시라고 하고는 상을 주방으로 들어내고 조용히 방문을 닫아주었다.
나는 그 위에 편안히 누우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 맛에 애인들을 두는 것인가?’하고 말이다...
그녀가 시끄럽지 않게 조심스레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나는 이내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 1, 20분 쯤 잤을까?
나는 뭔가 달그락 하는 소리에 잠이 퍼뜩 깼다.
눈을 살며시 뜨고 보니 민주가 화장대 앞에 앉아 설거지를 끝낸 손에 크림을 바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혹시 무슨 소리라도 낼까 아주 조심스러운 품이 그녀의 동작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화장대 거울 통해 보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더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그리고 낮은 화장대 의자에 앉은 그녀의 뒷모습, 그 풍만한 몸매를 실눈을 뜬 채 훔쳐보며 불끈 솟아오르는 육정(肉情)을 동시에 느꼈다.
손에 크림을 다 바른 민주가 다시 조용히 크림병의 뚜껑을 닫아 두고 일어섰다. 그리곤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이불장을 열어 얇은 홑이불을 하나 꺼내 내게 다가왔다.
내 위에 그 홑이불을 덮어주려 가까이 다가 온 그녀를 나는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시끄러워서 못주셨어요?’
하고 그녀가 내 품에 안기며 작게 말했다.
‘아니, 지금 깼어...’
하고 나는 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날 민주의 집에서 나는 또 한번 ‘황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섹스의 극치를 맛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내외를 하는 듯 부끄러워하고 내 눈길과 손길을 낯설고 거북해 했지만 그녀의 온몸에서 내게 부딪쳐오는, 그리고 그녀의 속살 깊은 데서 휘감아 오는 그 뜨겁고 매끄럽고....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촉과 그녀의 단내 나는 입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달뜬, 그러나 아주 절제된 나직한 신음소리들은 내 대뇌의 모든 기능을 마비시키며 아득한 나락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과 그저 ‘아,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의 황홀경만을 의식시켰다.
그렇게 긴 시간,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섹스를 끝낸 후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누운 채 느긋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 올리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맨 어깨를 쓰다듬고 있는데
‘... 저, 안 버릴 거죠?’
하고 민주가 조용히 내게 물었다.
그녀의 그 말을 나는 내 귀보다 가슴으로 먼저 울려 들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어 내 심장 가까이에 그녀의 입술이 있어서였을까?
나는 가슴 한편에 뭉클한 느낌이 들며 잠시 할 말을 못 찾았다.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 동안 그녀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차마 그녀에게 자신 없는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 그렇게 잠시 혼란을 겪고 있는데
‘... 미안해요. 괜한 거 물어서...’
하고 민주가 먼저 입을 뗐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녀의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느낌으로 그녀의 쓸쓸해 하고 있을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울컥, 그것이 무엇에 대한 심사인지 모를 그런 울컥한 심정으로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가 내 가슴에 대고 다시 말했다.
‘... 괜찮아요. 지금 이대로... ’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을 듯싶은 뜨거운 눈물이 내 가슴에 묻어 번지며 아프게 내 마음을 후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