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감추다 (2)
나는 퇴근 무렵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로서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하는 전화였다.
내 핸드폰 발신자 리스트에 찍혀있는 그녀의 번호를 선택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두 번의 신호 만에 민주가 바로 받았다.
나는 오늘 그녀를 만났으면 한다고 했고 그 가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사람을 불러 가게를 수리하고 있는 중이라 금방은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8시 이후에 다시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제와는 달리 많이 밝아져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직원들과 같이 퇴근을 한 후 혼자 근처에서 저녁 겸 간단히 술 한 잔을 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 왔다.
시간은 아직 7시 반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많이 망설이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녀가 내 제의를 딱 잘라 거절했으면 하는 바램 까지도 있었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은 민주에 대한 내 생각의 모든 줄기에 따라 붙어 나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아까 저녁을 먹던 식당에서 아내에게 오늘은 상당히 늦을 거라고 미리 전화를 했었다.
아내는 바쁜 중에 전화를 받았는지 별다른 말없이 알았다며 바로 통화를 끝냈다.
만일, 지금 내가 이렇게 배신을 꿈꾸며 그것을 지금 실행에 옮기려하는 것을 아내가 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벌써 수도 없이 한 생각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소름 끼치는 결과임에 틀림없었다.
이혼.......아내는 결코 나의 그런 일탈을, 아니 배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 집안의 청교도적인 분위기 역시 나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독교를 믿는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아내의 집 형제들 모두 도덕적으로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엄격한 사람들이었다.
장인장모는 수년전 한 해 차이를 두고 모두 돌아가셨지만 그녀의 형제들...지금 아내와 베이커리 매장을 동업으로 하고 있는 큰언니나 고등학교 교사인 둘째 언니, 그리고 바로 아래 정부 모 부처 국장급 고급공무원인 남동생까지 모두, 아내나 그 형제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책대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서울 토박이인 장인은 교육자로 한평생을 보내고 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하셨던 분인데 다른 건 몰라도 자녀들에 대한 가정교육만큼은 확실하게 해두신 분이었다.
3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사업을 했던 맏동서나 고교교사인 둘째언니의 남편으로 역시 교직에 있는 둘째 동서 역시, 어떨 때 보면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내의 형제들과 별반 차이 없이 자기 스스로나 주변이 깔끔한 사람들이었다.
부부지간의 깊숙한 내막까지야 모르겠지만 내 기억으로 아내의 형제 중 그 누구도 여자문제 따위로 집안에서 큰소리를 냈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단단한 결속의 울타리를 깨고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네들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아마 지금 나는 ‘미친 것’이고 더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죽으려고 환장한’ 것 쯤 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를 향한 내 마음의 흔들림은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어쩌면, 부나방이 닿으면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불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는 그런 가련한 모습이랄까...
민주를 만나 건 아홉시도 다 되어가는 시각, 그녀의 가게와 내 사무실 사이의 중간 쯤 되는
곳에 있는 한 일식집에서였다.
내가 먼저 도착해 좀 구석 진 방을 택해 들어가 앉아 담배 한대를 다 피웠을 때 쯤 그녀가 허둥지둥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 왔다.
‘죄송해요... 좀 늦었지요?’
그녀는 가게를 수리하던 곳에서 바로 온 듯 스웨터와 머리칼에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먼지며 톱밥 부스러기들이 좀 묻어 있었다.
그 때, 내 앞에 마주 앉은 그녀를 보는 느낌은 아주 색달랐다.
마치 그녀와 내가 오래된 정인(情人)끼리인 듯 착각이 들었고 심지어 같이 외식하러 나온 부부 같은 느낌까지도 들었다.
나는 그동안 모텔 방안에서 두 번, 그녀의 가게에서 서너 번 그리고 해장국집에서 같이 해장국을 먹으며 그녀를 본 게 전부였다는 게 새삼 되새겨 졌다.
그 짧은 기간, 그 몇 번 안 되는 만남 속에 그녀에 대한 나의 정이 이렇게도 깊어졌나 하는 좀 섬찢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나는 민주에게 가게 수리는 대강 끝났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대강 끝을 내서 내일부터는 장사를 다시 할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미리 시켜두었던 생선회와 다른 안주들 그리고 술이 금방 날라져 왔다.
나는 민주와 두서없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계속 나누었다.
그러나 그렇게 소주를 세 병이나 비우고도 나는 내 이야기의 핵심을 꺼내지 못했다.
안주가 거의 다 떨어져 내가 더 시키려 하자 민주가 그만 시키라며, 내게 미안해서 자기가 대접을 하고 싶으니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제의할 때까지도 말이다.
그녀와 내가 2차를 하기 위해 옮긴 데는 그 일식집에서 좀 떨어진 조그만 호프집이었다.
아마도 좀 그럴 듯한 데로 나를 데리고 가고 싶었을 그녀의 생각과 달리 내가 그 호프집이 좋겠다고 우겨서 그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괜히 쓸데없이 비싼 데 갈 필요 뭐있냐, 여기가 한적해서 좋겠다고 말이다.
사실, 거리에서 좀 떨어져 후미져 보이는 곳이라 손님도 별로 없고 조용할 것 같아 내가 얘기하기도 쉬울 것 같았고 왠지 빨리 내 생각을 그녀에게 털어놓아야겠다는 조바심 때문에 나는 멀리까지 이동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 호프집은 내 생각대로 손님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홀 맨 구석의 자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나는 그 호프집에서도 그녀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당신이 좋다. 그러니 앞으로 내 애인해라...그러면 내가 경제적으로 도와주겠다.’ 결론 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그 말이었는데 나는 그녀의 한없이 선량한 그 커다란 눈을 보고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나는 당신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어떠냐?’하는 말까지도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더구나 어제 밤 그 남자에 관해서 최종적으로 그녀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그 남자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으며 그의 말대로 확실히 정리가 된 것이냐고 묻고 싶은 것도 나는 그녀에게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그 커다랗고 아름다운,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아니 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보았던 가장 선량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감히 나의 더러운 생각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들의 눈에는 하찮은 술장사를 하는 여자... 또 내 눈으로 봤듯이 한때, 외모나 말투로 보아 역시 하찮아 보였던 어제 밤 그 남자의 여자였을 지도 모르는 그녀가 내게는 함부로 말도 꺼낼 수 없는 여자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차츰 술에 취해갔다.
그날따라 그녀 민주는 술을 절제하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정신이 든 것은 다음 날 새벽 무렵이었다.
눈이 떠지자 낯 설은 방 안이었다.
그리고 민주가 내 옆에 누워있었다.
내가 잠이 깬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내게 돌아누웠다.
그리고 한 팔로 나를 끌어안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내 머리 속은 그저 텅 빈 듯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를 들게 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 커다란 두 눈이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물기에 젖어갔다.
그녀가 한 손으로 내 맨 가슴을 쓸어내며 입을 뗐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해줄 만큼 전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얼른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고 살께요...’
나는 더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하고
그녀는 내 표정에서 그런 낌새를 챘는지
‘어제 당신이 다 말했어요. 술에 잔뜩 취한 채...’
그때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어제 밤 나는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의 상태로 그녀에게 내 모든 생각을 털어놓은 것 같았다.
‘난 당신한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면 돼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넘쳐 한 방울 또르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나는 왈칵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잔잔히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