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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8/ 그녀에게 빠져들다 (2)


BY 盧哥而 2005-08-24

 

<모두에게 아름다웠던 그녀....

  그러나 그녀는 내게 치명적인 독(毒)이었다>

 

 

 

그녀에게 빠져들다 (2)




그녀 민주를 그녀의 가게에 데려다 주고 내가 사무실로 출근 한 시간은 얼추 열 한 시가 넘어서였다.

그녀의 이름이 김 민주라는 것과 나이가 만 서른여섯이라는 것을 안 것은 어제 경찰서에서 그녀의 신원보증을 하는 서류에 적힌 것을 보고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현주소는 서울 근교의 신도시인 P시로 되어있다는 것도 알았다. 집이 가게 근처라고 그녀에게 들었지만 주민등록상 현주소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처 주소이전을 못했다든지 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녀가 가게 안에 치울 게 많고 저녁에 장사를 하자면 준비할 것들도 많다면서 가게로 바로 가겠다고 해 그녀의 가게 앞에서 내려주고 거기서 택시를 돌려 바로 사무실로 들어왔지만 시간은 열 한 시를 이미 넘기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경리 겸 내 개인 비서역할까지 맡아하는 여직원 영미가 호들갑을 떨며 나를 맞았다.

‘사장님 어떻게 되신 거 에요? 사모님 전화는 받으셨어요? 벌써 몇 번씩 전화가 왔었어요. 핸드폰 통화가 안 된 다구요.’

나는 새벽에 민주와 섹스를 벌일 때 핸드폰의 전원을 꺼두었었다. 틀림없이 아내가 전화를 할 것이기에... 아마 여덟시 전후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아침 제대로 챙겨먹었느냐, 아니면 빨리 챙겨 먹고 일해라 하고 걱정을 해줄 것이 불문가지이었을 텐데 사무실 전화를 안받으면 당연 내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할 것이 뻔한 일 아닌가...

아내는 아마 그 시간 무렵부터 계속 사무실과 내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었을 것이다.

영미의 말로는 자기가 출근하자마자부터 2, 30분 간격으로 계속 사무실로 전화를 해 나한테 무슨 연락이 없었느냐고 걱정 걱정을 하며 물었었단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아직 매장에 나가기 전이었다.

나는 아침에 택시를 타고가다 조그만 사고가 있었다고 했고 지금 다 처리하고 돌아 온 것이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아내는 당연히 깜짝 놀라 내가 어디 다친 것 아니냐고 되물었고, 나는 내가 다친 게 아니라 내가 타고 가던 택시가 사람을 치는 바람에 내가 그 증인 역할을 하느라 경찰서에 같이 동행했고 진술서까지 써주고 오느라 늦었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핸드폰이 꺼져있는 줄은 경황이 없어 미처 몰랐노라고 시치미 뗐고...

미리 세밀히 준비한 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아내와 통화가 시작되니 청산유수 같이 내 입에선 거짓말이 술술 흘러 나왔다.

아내는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내가 아내에게 이런 거짓말도 서슴치 않고 하다니 하는 자책과 그런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한숨을 남몰래 내 쉬었다.

아침 시간 잠깐이었지만 연락이 두절돼 있던 사장인 나 때문에 술렁거렸던 사무실 분위기도 그때서야 정상으로 돌아 온 듯 직원들은 다시 각자의 일에 매달렸다.


그날 하루 역시, 나는 내가 해야 될 일들을 제쳐두고 다시 또 멍한 상태로 자리만 뭉개고 있었다.

아침나절 민주와 치룬, 그 과격했던 세 번의 섹스가 내 체력에 확실히 무리였기도 했었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떠올라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무렵 영미가 내민 결재서류들만 대강 훑어보고 직원들보다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고, 뭘 어쩌자는 것인지 도무지 헤아려 지질 않았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부지불식간에 남산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곤 속으로 ‘어, 내가 왜이래?’ 하며 탄식을 하고 말았다.

우리 집 방향을 말해야 하는 데 내 입은 그 순간 다른 사람의 입처럼 전혀 엉뚱한 방향을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이내, 그래 높은 데 올라가서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상황을 다시 정리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꿨다.


아직 해가 다 떨어지려면 시간이 좀 남은 시각이었다.

차가 올라 갈 수 있는 한계 지점에서 택시를 내려 남산의 팔각정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와보는 남산 주위를 천천히 휘둘러보며 팔각정까지 올라갔다.

팔각정 주위엔 데이트하는 커플 몇 쌍과 하루 종일 거기서 시간을 보냈을 듯한,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노인네들 몇이 눈에 띄었다.

팔각정의 누각에 올라서 이제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네온들로 천천히 빛의 물결에 휩싸여가는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농촌에서 태어나 거기서 고등학교까지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 군대생활 3년을 뺀 근 30여년을 내가 살아 온 곳이었지만 솔직히 서울은 내게 그다지 정겨운 데가 아니었다.

나는 이 서울이 무서운 정글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내 사업을 한답시고 회사를 나와 사무실을 차린 후 처음 4, 5년간 동안 피를 말리는 듯 직사하게 고생할 땐 정말 서울이 무서웠고 그 고층빌딩들의 숲은 영락없이 내게 절대 발

들여 놓고 싶지 않은 지옥문과 같은 그런 소름끼칠 듯 무섭고 두려운 이미지 그 자체였었다.

그러고 보니 그 무렵에도 하 답답할 땐 이 남산을 찾았던 기억들이 새롭게 났다.

당시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며 한참 철없던 아들 녀석과 딸애, 그리고 어찌됐든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따라줬던 아내에게 나의 지치고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앙다물고 버둥대던 그때의 내 모습이...

그럴 때 나는 가끔 이 남산엘 올라오고 했었다.

그리곤 이 팔각정의 누각 기둥이나, 바로 그 아래 한 스무 걸음 쯤 떨어져 있는 봉수대의 돌담에 기대서 솟구쳐 오르는 울음을 짓씹으며 ‘내가 지금 쓰러지면 안 되지...안 되지!’ 하고 다짐을 하면서도 기어코는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방울을 손수건으로 찍어내고야 말았던...



상황을 다시금 정리해 보려고 올라 온 마당에 엉뚱하게 옛 추억을 한참이나 더듬던 나는 퍼뜩 민주에 대한 생각으로 초점을 모았다.

해는 이미 한강 하류 저 멀리로 떨어져 내리며 안간힘처럼 그 마지막 붉은 햇살을 거대한 유리 기둥처럼 보이는 63빌딩의 뒤에 쏟아 붓고 있었다.

도심은 이제 어둠이 깔렸고 빌딩들의 창문 불빛과 수많은 가로등 그리고 그보다 더 몇 배는 더 밝은 듯한 광고판의 네온등, 차량들의 전조등들이 뒤엉키며 차츰 불야성을 이뤄갔다.

그 거대한 빛들의 행렬 속에 그녀 민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나절 세 번의 섹스 사이사이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대화를 조금 나눴다. 아니 주로 내가 그녀에 대해 물은 것이다.

민주는 고향이 동해안 작은 포구였다고 했다. 강릉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간...

아버지는 그 동네의 대부분 사람들처럼 뱃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스물다섯 무렵에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지금 서른넷인 그녀의 하나 뿐인 남동생네 식구들과 강릉 시내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결혼 비슷한 것을 한번 해봤을 뿐 아이도 없고 혼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남자 복이 너무 없는 여자라고 덧붙였다. 자신은 아직 누구에게도 사랑다운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또 스스로도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로선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서른 중반이 넘도록 남자들에게 사랑다운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또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그리고 지금 그 술집을 시작한지는 겨우 세 달 남짓이고 그전에는 다른 일을 했었다고 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사연이 길어 차차 내게 말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은근히 궁금해 했던 그녀가 검찰에 기소중지가 된 이유를 슬쩍 묻자 채무관계인데 돈을 빌려 준 쪽에서 자신을 사기로 모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며 검찰에 가서 자기가 증거서류를 보여주고 설명을 잘하면 별 일 없을 거라고 크게 걱정하지 않는 투로 대답했다.

나는 내친 김에 어제 경찰서 형사과 대기의자에 앉아있었던, 그녀의 가게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그 남자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녀는 역시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 몇 년 전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며 자기와 살자고 떼를 부리는 사람인데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날은 이상하게 술이 잔뜩 취해 찾아 와 그 사람답지 않게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사람은 경범죄로 처벌을 받을 것이니 자기는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는 토까지 달아...


그때 그녀와의 짤막짤막하게 나눴던 대화들과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의 상황을 순서대로 정리하면서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나름대로 두 가지의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가능하면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고 만일 그것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면(나는 이미 그녀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에 내가 휘말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나도 내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적당한 선에서 그녀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고 엔조이를 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말하자면 아내 몰래 그녀를 애인으로 두겠다는 실로 나로서는 평소에 꿈도 꾸어보지 못한 끔찍하고 야비한 방법이었다.

내가 그동안 그 토록이나 경멸했던 몇 몇 친구나 주위의 그런 사람들처럼, 나 스스로 그런 인간이 되겠다는 발상이었으니까.......


대강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훨씬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고 올라 올 때와는달리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남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