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는 태식과 헤어져 집으로 가기 전 근처의 슈퍼마켓에 잠시 들렀다. 어제 정아가 집에 마실 물이 다 떨어져 간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서 였다. 집에 가면 곧 학교에서 돌아 올 정아를 차에 태워 바이올린 레슨을 데려다 주어야 하는 일과도 있었기에 그녀는 조금 서둘러 장을 보고 아파트로 향했다.
“정아가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내가 레스토랑에서 그 사람과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애.”
은하가 아파트 단지에 막 들어와 집 앞 키가 큰 야자수 앞에 차를 세웠을 때 정아는 마침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정아가 너무 기특해서 그녀는 정아야 하고 큰 소리로 부르려다 그만 두었다. 정아의 말에 의하면 자기 나이 또래의 친구들 앞에서 큰 소리로 불러 대는 것은 주책이 없는데다 너무 튀는 행동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은하도 그렇게 컸겠지만 사춘기 애들은 이상해서 별 것 아닌 일상사를 확대 해석 하거나 어른들의 특정 부분에 대해 통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되도록 정아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은하는 ‘왜’ 라는 토를 달지 않고‘알았어’정도에서 물러서곤 하는 중이었다.
“점심은 맛있었어?”
은하가 열린 트렁크에서 작은 물병들이 많이 든 커다란 박스를 꺼내 안으며 차로 다가 온 정아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학교에서 돌아 오는 정아를 볼 때 마다 은하의 첫 마디는 여느 엄마들이나 마찬 가지로 밥은 잘 먹었느냐 하는 종류의 인사를 제일 많이 하고 있었다.
“그거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정아가 무거운 박스를 안아 들고 집 쪽으로 걸었다.
“엄마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응, 운동하고 점심 먹었어.”
“혜리 아줌마랑?”
“아니. 아는 분이랑.”
“으응.”
“학교 점심은 뭐 나왔어?”
“브로콜리 슾 하고 샌드위치. 그저 그랬어 맛이.”
“맛 있었어?” 라고 물을 은하임을 알고 있었기에 정아는 미리 맛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퀴즈는 잘 봤어?”
오늘 오전에 대수 퀴즈가 있다는 말을 기억한 은하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응, 한국에서 다 배운거야.”
“그래? 어서 들어가서 간식 먹고 레슨 가야지, 정아.”
은하는 찾기 쉽게 긴 끈을 달아 놓은 키를 들고 문을 열었다. 정아는 벌써부터 레슨 가기 싫어 죽겠다는 인상이었다.
은하가 주방에서 간단하게 과일을 깎아 간식을 준비하는 동안 정아는 재빠르게 바이올린 연습할 준비를 하고 있더니 어느새 튠을 맞추고 뮤직 스탠드위에 올려 놓은 악보 앞에 서있었다. 정아는 늘 레슨 가기 몇 십분 전에 벼락 연습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스즈끼 바이올린을 시작해 중간에 쉬어 가며 지금은 5권 까지 오긴 했지만 정아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은 습관적인 일상사일 뿐 멜로디에 마음이나 어떤 감정을 실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정아의 그런 점이 정훈과 닮았다면 닮았다고 할까.
정아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미세스 스테인리스의 집은 말타기도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정원을 가진 저택이었다. 숲이 우거진 그 주변에는 그만 그만한 크기의 저택들이 띠엄 띠엄 자리 잡고 있었고. 그녀는 오십이 됐을까 싶은 나이로 상당히 푸짐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나 사근사근하고 상냥한지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이었다.
은하는 그녀의 집 앞에서 정아를 내려 주고 나서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 한쪽 구석에 선 나무 그늘 밑에 차를 댔다.
정아가 나오려면 앞으로 45분.
노래 연습하기 딱 좋은 시간이야.
은하가 준비해온 명가집을 펴고 있을 때 매주 목요일이면 상호와 상희를 데리고 정아 앞에 레슨을 받는 미세스 양이 그녀의 벤을 몰고 나오고 있었다. 차창으로 가볍게 목례한 후 그녀는 오디세이 밴을 은하 옆에 세우더니 창을 열었다.
“오늘 레슨 가셨었어요? 비 왔잖아요. 아침에.”
“갔었어요.”
“전 비와서 안 갔는데 다 나오셨어요?”
“많이들 안나오셨더라구요.”
“근데, 누가 나오셨어요?”
“아 네… 김 교수님만요.”
“어머 그럼 두 분만요?”
“그랬어요.”
“재미 있었겠다, 그죠?”
그녀는 뭔가 알고 싶다는 마음이 얼굴에 까지 나타나 있는 듯 했다.
“응, 엄청 재미있었어요. 됐나요?”
은하가 농담으로 오바해서 말해주자 그녀는‘농담인 줄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더니 “어머머 내 정신 좀 봐. 상호 치과 가야 하는데.” 하며 서둘러 떠났다. 그녀의 은색 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은하는 하늘을 보았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투명한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무성한 연녹색 나뭇잎들이 산들 바람에 흔들려 간혹 사르르 소리를 내 주고 있었고.
은하는 작은 소리로 좋아하는 노랠 부르기 시작했다.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가네
십일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노래 가사 때문인지 아니면 은하의 마음 속에 근본적인 슬픔이 살고 있는 것인지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게 아파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왜 태식의 웃는 얼굴이 떠 오르는 것인 지…
지금 처럼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져 올 때
살아가다 문득 혼자인 것 같은 순간이 올 때
감춰 두었던 나를 어느날 내려 놓고 싶을 때
그는 따뜻하게 기대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 줄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은하에게는 일렉트러 콤플렉스가 있는지 이상적인 남성상을 십여년 전에 작고하신 아버지와 오버랩 시켜서 상상하는 것 같았다. 절대적으로 자신을 감싸 주고 보호해 줄 것 같은 존재로서의…
멀리서 정아의 바이올린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노래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