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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후 일지 10


BY 47521 2005-09-11

2002년 8월xx일.동사무소 공공근로

위장이혼 덕분(?)으로 1999년도에 6개월 유치원에서 공공근로로 아이들 밥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그 후 나는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잊고 살았는데 노동부 공공근로 신청서류를 하러 동사무소에 들르는 길에 우연히  동사무소에서도 아직 공공근로자를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노동부와 동사무소, 두 곳에 신청서를 낸 결과 동사무소가 되었다.처음에는 내 학력이 대졸이라 동사무소 안에서 내근 업무를 맡게 되었다.주로 주민등록 등본 이나 호적등본을 떼어 주는 일을 보조하는 업무였다. 또 3개월 일하는 것이 공공근로의 원칙이라 3개월 안에 인감증명서 전산화 작업을 돕는 것이 내 일이라고  9급 여직원이 설명해 주었다.그러면서 인감증명서에 도장이  선명하지 않은 것을 대충 자신이 뽑아 놓았는데 혹시라도 흐릿한 것이 있으면 더 뽑아 놓으라고 당부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여직원이 뽑아 놓은 것에서 더 흐릿한 것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직원은 나를 못마땅해했다.

-아주머니! 저 좀 보세요. 지난 주에 오빠분이 돌아 가셔서 제가 닷새나 아주머니 휴가를 주었는데 그 후로 아주머니 일 하시는 게 영 마음에 안들어요. 처음엔 일을 곧잘 하셨는데 오빠가 돌아 가셔서 상심이 크신가 보죠. 제가 분명히 인감도장 흐린 것을 더 뽑아 놓으라고 했는데 제가 뽑아 놓은 것에서 한걸음도 나아진 것이 없잖아요.담당자한테 얘기 해서 바깥에서 일하시도록 처리 할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20대 후반의 딸 같은 여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쥐구멍이라도 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보다 5살 위인 오빠가 대장암으로 죽고 나서 나는 퇴원 후 처음으로 우울증을 1주일쯤 앓았다. 내 마음대로 조절해서 약을 두배 가량 늘려서 먹고 서는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누구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면 우울한 법이지 우울증이 재발한 것은 아니라고 나를 동정했다. 우울증은 완벽주의자나 비관론자들이 흔히 걸린다면서 의사 자신이 보기에 나는 낙관론자인 것 같다고 웃으면서 덧붙였다. 의사 말대로 나는 낙관론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완벽주의자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문득 닥터K가 그리워졌다.내가 입원해 있을 때 담당 주치의 였던 닥터K가 그 의사 대신 내 앞에 앉아 있었더라면 그의 앞에서 가슴이 후련해질 정도로 실컷 울 것만 같았다. 그는 이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지금은 어느 병원에 있는 걸까? 혹시 개업이라도 했는가? 그는 미남은 절대 아니었는데 환자들이 그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나는 종종 보았다. 아마 그의 이런 모습 때문일 것이다.언젠가  내가 입원해서 초기에 몹시 힘들어 했을 때, 그와 상담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아세요? 내 우울한 감정을 겪어 보시기나 했나요?

-제가  그 우울한 감정을  안다면 벌써 훌륭한 의사가 됐게요.저는 환자들의 마음을 역지사지로 이해 하려고 애쓸 뿐이지 결코 훌륭한 의사는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닥터K 앞에서 더 이상 떼를 쓸 수가 없었다.

동사무소 밖의 일은 취로사업이나 마찬가지로 빗자루를 들고 동네 큰 길을 청소 하는 일이었다. 혹시 딸,아들이나 동네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약 두 달 째 청소를 하고 있는데 동사무소 내근 보다 외근이 편한 것이 한 두어 시간 일만 하고 나머지는 시원한 곳에 앉아서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쓰레기 봉투값 아낄려고 웬 쓰레기 무단투기가 그리 많은지.종종 재활용 중에서 쓸 만한 물건을 건져 올리는 수확(?)도 있었다. 한 닷새는 돌아 가면서 여름이라 악취가 진동하는  재활용 창고에 가서 폐품 분류 하는 작업도 한 적이 있었다. 재활용품에 쓰레기를 한데 섞어서 마구잡이로 버리는 바람에 분류에 애를 먹었다. 그 날 너무 속이 상하고 토할 것 같아서 막걸리 한 병을 안주도 없이 들이켰다.정말 더 이상은 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