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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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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빈...몰랐다


BY 데미안 2006-09-05

 

[그래 말해봐. 동거는 누구 아이디어야?]

 

수빈이 원우와 함께 살기 시작한지 일주일쯤 되었다.

아침저녁의 서늘한 기운은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한풀 꺾였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더할나위없이 잠잠하고 평화로웠다.

 

[전 알것 같은걸요?]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원영이 웃으며 말했다.

은영 언니는 알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형사가 그런 제안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자기만 좋다고 하면 이 형사는 내일이라도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할건데... 아니, 이형사도 그래. 미스 채가 그런 제안을 한다고 그걸 불쑥 받아들이는 심보는 또 뭐야?]

[그만큼 수빈 언니를 사랑하기 때문이죠]

[뭔 소리야?]

[언니한테 물어보세요~]

 

원영은 수빈을 보며 씨익 웃었다.

수빈 또한 말없이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어쩌면... 어쩌면 원영의 말이 맞을수도 있다.....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고 있는지도...

지금은....지금은 원우씨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확실하니깐....

그런데 난...난 무엇을 두려워 하는걸까?.....

 

[그래...자기가 그런 제안을 했다면... ...]

은영은 잠시 말을 흐렸다.

수빈의 미소가 은영언니의 생각이 맞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모님의 일이 자기에겐 그렇게 큰 상처로 남을 줄이야...휴우...내 마음이 왜이리 허하고 아프냐? 왜 기분이 꿀꿀하면서 서글픈 생각이 들까?]

[그러지 마세요, 언니. 전 지금이 편하고 좋아요...]

[언제든...이 형사가 떠날 수 있는 기회는 남겨 주겠다는 거야?]

 

은영 언니의 작은 목소리에 수빈도 원영도 그냥 웃었다.

원영은 그냥 못들은 척 해 주었다.

 

[은영 언니 여기 있지?]

문이 확 열리면서 정화씨가 호들갑스레 들어섰다.

 

[하여간 저 인간은 먹는 음식이 죄다 목소리로 간다니깐. 그런데 지 남편 앞에서는 목소리가 아주 간드러져요. 간드러져]

[언닌. 지금 그게 문제유?  수빈씨. 얘기 들었어?]

[무슨......?]

[아니, 이 상가에서 장사하면서 소문도 못 들었어? 이 상가 건물이 팔렸대]

[뭐?]

은영 언니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정말이야? 누가 그래?]

[아니, 정화씨.  확실해요?]

[아유, 정말이야. 내가 언제 없는 소리 하는 거 봤수? 치과 언니한테 물어봐봐. 나도 그 언니한테서 들었으니깐. 조만간 새 건물 주인이 설명회를 갖는대]

[이게 무슨...마른 하늘에 번개쳐서 머리 뽁아지는 소리야!]

 

모든 얘기는 사실이었다.

다음 날 바로 상가 회장이 공문을 직접 전해주고 갔다.

토요일 오후 2시. 노인정 회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건물에 애들 공간이나 여자들 휴식 공간이나 좀 만들어줬음 좋겠다. 그치?]

 

햇살 좋은 오후.

보희가  애를 토닥이면서 한 소리 했다.

 

[누구 좋으라구?  니 편하라고?]

 

수빈이 놀려대자 보희는  도끼눈을 했다.

그새 원영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야, 수빈이 니가 한번 권유해봐라. 응?]

[앤...나한테 그만한 빽. 이 있다고 보는 거니?]

[하긴...것두 그러네]

[아이구, 이뻐라]

 

원영이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보희가 아이를 안고 오는 날에는 거의 원영이 아이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원영씨. 빨리 결혼해라. 그래서 아들 낳아요. 그래서 우리 사돈 맺게. 어때?]

[어이구. 김치국을 아예 통채로 마셔라, 마셔]

[그럼, 수빈이 니가 빨리 낳아라]

[시끄러!]

 

세 여자는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아이도 덩달아 좋은지 까르르 웃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워?]

 

은영언니가 소쿠리를 하나 들고 들어 서면서 말했다.

 

[웃음 소리가 담을 넘는다, 넘어]

[뭐예요?]

먹보 보희가 물었다.

따끈따끈한 옥수수였다.

 

[에구, 진영아. 이모야 한번 안아보자]

 

은영 언니가 얼른 아이를 안았다.

아이가 오는 날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서는 것도 종종 잊는다.

먼저 시선을 들었던 보희가 정색을 하며 일어섰다.

 

[어머나!]

돌아보던 수빈도 놀라 몸을 일으켰다.

만화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신사가 가게 안에들어섰다..

할아버지라기엔 젊고 아저씨라기엔 좀...나이든....

 

[...시간 좀...내주겠니? 이 아비가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모두 놀란 눈을 했다.

순간, 수빈은 딱 잘라 거절하고픈 충동이 일었으나 억눌렀다.

 

[수빈아... 부탁이다. 잠깐만 이 아비랑 얘기 좀 하자꾸나...]

혼자였다면 수빈은 분명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 앞에서 얼굴 붉힐 언쟁은 피하고 싶었다.

 

[원영아. 나 잠깐 나갔다올게...]

 

수빈은 앞장서서 가게를 나왔다.

남자는 남은 여자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고 여자들은 엉겁결에 답례로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이 수빈 아빠야?  젊다!]

[게다가 아주 잘생겼죠?]

[그러네... 저 분위기라면 여자들이 꼬이고도 남겠네...]

 

수빈은 사람들의 시선이 드문 공원쪽으로 발걸음 옮겼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이르러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안하구나...]

그녀 아버지가 조심스레, 그러면서 괴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며 그녀가 물었다.

 

[들었다... 수현 에미가 다녀갔다는 소리...]

순간 수빈은 고개를 틀어 아버지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그걸...확인하려고 오셨나요?  그래서 제가 어떤지 보려구요?  전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 무섭지 않아요. 다만 그 여자가 제 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수빈아!]

 

그녀 아버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대로 다시 삼켰다.

 

[이 애빈 몰랐다...]

[그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지금은 그게 중요하지는 않아.  오늘 온 것은 너한테는 미리 알려주는게 좋을 것 같아서다.  쇼핑몰...처분했다. 전부...]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쇼핑몰을 처분해?.....

그것은 그녀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수빈은 그때 새 엄마가 찾아와서 하던 말을 기억해냈다.

그럼, 그게 사실이었단 말이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이제는  좀 여유있게 그렇게 살아볼까 해서...

정리하고...  상가 건물을 하나 샀단다]

[그런 얘기를 왜 저한테 하세요?  쇼핑몰을 팔았다고 해서  제가 혹시나  재산을 탐낼까봐....!]

 

수빈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말을 끊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이 답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제 가게가 있는 상가 건물을 사셨다는 분이...아버지셨군요]

그녀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왜...왜 하필 그 건물을?... 왜, 왜죠?...아니, 변명은 필요없어요]

 

수빈은 벌떡 일어났다.

 

[수빈아!]

[가게를 내놓을 거에요.  전 아버지와 그 여자 가까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러지마라, 수빈아. 이 애빈 다만, 네 옆에서 널 보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에...!]

[이미 늦었어요. 전 떠날 거예요]

수빈은 등을 돌렸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수빈아.  수현 에미는 수현이와 떠났단다]

수빈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 여자에게 양심이 있다면 다시는 너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엄마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싶구나. 그것에 관해 듣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혼란스런 머리로 수빈은 공원을 빠져 나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그녀는 두통약을 먹고 침대에 잠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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