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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즐기면서 사는 법도 배워야지요...


BY 데미안 2006-04-19

 

수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버지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한적한 어느 시골 길가에 차를 세웠다.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상반된 감정.

분명 죽이고 싶을만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만큼 미운 아버지인데

왜 아버지의 서글한 눈매를 볼때면 측은한 맘이 드는지...

차라리 아버지가 비굴하더라도 당당한 모습이었음

덜 괴롭지 않았을까... 수빈은 그런 생각을 한다.

엄마는 그러셨다.

어쩌면...어쩌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사람은 아버지일거라고...

그렇게 당당하시고 공과 사가 분명한 분인데다 가족이라면 끔찍히도 위하던 아버지인데 단 한번의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가족 모두를 무너뜨렸으니  오죽하랴....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수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쨌던 가정있는 사람이 바람을 피웠다는 자체가 이미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보희다.

수빈은 심호흡을 하며 전화를 열었다.

 

-어이구, 이제 받으시네. 그래.  어머니 기일이라고 또 헷가닥 하셨겠지. 내가 전화 불나게 한거는 알고 있겠지? 어디야?  아니, 말하지마. 내가 맞혀볼까? 어머니한테 가있지?-

[알면서 왜 물어봐. 이제 돌아가는 중이야]

-저녁에 한 잔 할까?-

[됐네요. 곧 애 낳을 사람이 술은 무슨!...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전화 끊어. 애 낳으러 병원 가면 연락하고. 알았지?]

 

전화를 끊고 수빈은 차를 출발시켰다

가던 중, 꽃집에 들러 장미꽃도 샀다.

집에 들어가기도 뭐해서 수빈은 그냥 가게 앞에 차를 주차했다.

 

은영 언니와 정화씨가 원영씨와 함께 있었다.

[어, 이제 와? 자기 오면 같이 먹을려고 우리 점심도 굶고 있어]

[그러셨어요? 죄송해요. 그럼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말씀만 하세요]

[어이구, 점심은 준비가 되어 있어. 앉기나 해]

 

정화씨가 도시락 가방을 내밀었다.

 

[어머, 김밥 사셨어요?]

[김밥이랑 초밥이랑 샌드위치...거기다 장국까지 있대.  정화 얘가 음식 솜씨가 좋잖아]

[그러게요]

 

수빈은 웃었다.

수빈은 장미를 화병에 꽂았다.

 

[향기가 좋아서 샀어요. 좋죠?]

[응, 좋으네. 장미향이 사람을 참 고급스럽게 만드는 것 같애. 그렇잖우?]

[고상떨지마. 안 어울려]

 

은영 언니의 말에 그들은 한바탕 웃었다.

 

[우리 여자들끼리 이렇게 수다 떨며 있으니깐 너무 좋다.  난 말이야, 수빈씨가 책방 열고 우리를 거리낌없이 받아줘서 너무 좋더라. 덕분에 무료하고 심심하고 우울하지 않아서 그게 제일 좋아. 여기와 앉아 있다보면 기분이 다 풀리거든]

[잡소리 그만 하고 먹기나 해]

 

은영 언니가  일부러 정화씨를 구박하자 정화씨 또한 곱게 그런 은영 언니를 째려 보았다.

 

[어땠어요? 가게 보는 거 어렵지 않았어요?]

 

수빈이 운영씨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냥...언니가 시킨대로 가져온 책 확인해서 체크하고 빌려 갈때도 그렇게 하고... 재미 있었어요]

[이 아가씨도 이게 체질이야, 체질]

 

은영 언니가 거들었다.

 

[고상스레 앉아서 미소를 살짝 띄고는 가는 사람, 오는 사람한테 다 인사해 가면서  아주 수완있게 하두마.  아주 수제자 감이야]

[그래요? 어머. 그럼 종종 비워야겠다]

[왜? 비우고 이형사랑 데이트 할려고?]

[언니!]

 

수빈이 기겁을 하자 은영 언니와 정화씨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원영 또한 수줍은 듯 웃었다.

 

[빨리 밥이나 먹어요]

 

어쨌거나 그들은 맛있게 밥을 먹었고 디저트로 커피도 우아하게 한잔씩 했다.

그리고 원영은 전화를 받더니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엄마랑 약속이 있다면서...

 

[택시타고 갈거에요?]

[네에...]

[혹시, 운전할 줄 알아요?]

[네에...?]

[잘해요?]

[네에...왜요?]

[내 차 타고 갈래요?  난 크게 운전 할 일이 없는데...괜찮다면 원영씨가 타고 다닐래요? 필요할땐 내가 타고...탈래요?]

[그래도...]

[운전 자신있음 타세요. 어차피 주차장에 틀어박혀 있을 찬데요, 뭐]

[저야...감사하지만....]

 

수빈은 웃으며 차 열쇠를 빼내 원영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자기도 참.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그렇지 자기 차를 선뜻 내주는 사람이 어디 있냐? 하긴 내가 차 좀 빌리자고 했을때도 선뜻 주었지]

[저 아가씨, 마음에 들지 않아요?]

[어쭈!  이형사보다 더 좋아?]

[네에....어쩌면요]

 

은영 언니와 정화씨가 웃었다.

 

[이형사 들으면 좋아라 하겠다. 근데 자기 오늘 어디 갔다 온거야?]

 

말없이 수빈이 웃었다.

 

[수빈씨. 작년 이맘땐가...문 닫은 적 있지?  그때 기억나. 내가 하두 심심해서 책이나 빌려 보려고 왔는데 문이 닫혔더라. 생전 문 닫는 일이 없었는데. 맞지?]

 

정화씨의 말이다. 기억력도 좋으시지....

 

[어, 맞어. 그런 것 같아. 말해봐. 어디 갔다 온거야?]

[... ...저기, 엄마 산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제가 엄마 기일이었어요.  사실, 원영씨 아니었음 또 문 닫고 갔다 올려고 했는데...]

[그래...그랬구나. 그래...사실 나, 보희씨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어... 언짢아 하지 않겠지?]

 

수빈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감출것도 없고 굳이 또 보층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은영은 수빈의 손을 꼭 쥐었다.

 

[자기야. 나도 친정 엄마를 묻었어.  나야 이제 나이도 있고 내 가정이 있으니 큰 슬픔은 없다만은 자기는 아직...마음이 그렇지?  그래...알아. 왜 모르겠어... 하지만 혼자라곤 생각하지마.

내가 있잖아. 난 언제나 자기 편이야]

[수빈씨. 나도 있어]

[네에. 그럼요. 알죠...]

 

문이 열리고 치과 사모님이 들어섰다. 아니, 이제는 원장이라고 해야겠다.

원장이 만화책을 조심스레 내려 놓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원장님?]

 

은영 언니가 어느새 밝은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원장은 조심스레 인사를 받았다.

 

[우리 아가씨가 빌린 책이라고 하든데...맞아요?]

 

수빈이 체크를 했다.

 

[네에. 맞습니다]

[책 좀 빌려도 돼죠?]

[그럼요. 얼마든지요]

 

분위기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정화씨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미스 채야. 우리 기분도 꿀꿀한데 저녁에 한잔할래? 내가 한턱 쏠게. 그럴래?]

[어머, 어머. 찬성. 나 빠뜨리면 재미없는 거 알죠?]

 

정화씨가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한턱은 제가 내야죠. 좋아요. 한 잔 하죠 뭐]

[전에 그 호프집으로 할까? 점잖고 분위기도 좋고...어때?]

[좋죠]

 

만장일치다.

원장이 책 한권을 내밀었다.

수필집이다.

 

[700원입니다]

 

천원을 곱게 내밀고 300원을 받아 하얀 가운 주머니에 넣으며 원장이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나중에 또 뵈요, 원장님]

 

넉살좋은 은영 언니의 인사에 문을 열려던 원장이 다시 몸을 돌렸다.

몹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수빈이 물었다.

 

[저기...그 술자리....나도 끼워 주시면 안될까요?]

수빈을 비롯,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그러나 10시.

호프집 그 자리에 수빈. 은영 언니. 정화씨. 그리고 치과 원장.

이렇게 네 사람은 앉아 있었다.

 

수빈은 원우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아줌마들 다음으로 밀려난데 대해 투덜댔다.

대신 다음날 자신과 종일 놀아주기로 약속을 받아내자 좀 누그러졌다.

수빈은 혼자 미소를 지었다.

 

[술, 좋아해요, 원장님?]

[좋아하지도 않고 많이 마셔본 적도 없지만...이제부터라도 좀 배워볼까 해서요]

[그 좋지도 않은 거 배워서 뭐하시려구요?]

[이젠 즐기면서 사는 법도 배워야지요. 혼자 바둥바둥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일터지고 나서 돌아보니 주위에 친구가 하나도 없더군요.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주위에 눈 돌릴 틈도 없었는데 좀 살만 하니깐...]

 

원장은 피식 웃었다.

 

[어쨌던 나도 끼워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내가 쏩니다. 다른 말씀 마세요. 알았죠]

[좋죠, 뭐.  종종 이?“?모여서 화포나 풉시다]

[언제든 끼워만 줘요. 나도 이젠 한가한 자유 부인이니간요]

 

우습다.

여자들은 마음을 조금만 열면 언제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남자들만 술자리에서 친구가 되란 법은 없었다.

어쩌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할 얘기가 더 많고 사연도 더 많고 외로움도 더 많을 것이다.

가끔 남자들에게 집안일과 아이들을 맡겨봐야 여자들의 고충을 알듯이

여자들도 가끔 술자리를 가져봐야 남자들의 기분도 알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