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팔자, 결혼해봐야 안다는 소리...
그건 엄마한테 딱 맞는 말이었다.
땅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난 엄마는 말그대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아버지는 가진 것은 없었으나 뛰어난 머리를 가진 대학생이었다.
한학기를 마치면 등록금을 벌어 다음 학기를 등록하고...
그러다 우연찮게 외할머니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휴학을 하고 영장을 받아놓은 상태로 그동안 학비를 벌기위해 외할머니집에 일꾼으로 취직한 것이다.
담배도 않고 술도 않고...늘 책을 끼고 있는 아버지에게 반한 외할머니가 대뜸 엄마를 주시겠다고 하셨단다.
예쁘고 다소곳한 엄마를 조금은 마음에 둔 아버지는 반대를 하시지 않았고 엄마 또한 싫지 않았다고 하셨단다.
모든 일은 외할머니의 주도하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혼례를 치른지 이틀뒤 아버지는 군대 가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제대하기도 전에, 평소 술을 즐기셨던 외할아버지께서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얼마후 엄마는 임신을 하셨고
외할머니는 혼자 그 많은 땅을 관리하기가 벅차 아버지의 동생에게 일임을 하셨다.
아버지의 동생이니 믿고 맡기셨는데 그 삼촌이라는 사람은 그 많은 땅을 팔아먹고 잠적을 했다.
그 일로 외할머니는 몸져 누우셨다가 약한번 제대로 못드시고 가셨다.
그러나 아무도 엄마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친할머니라는 사람은 오히려 엄마를 나쁜년으로 몰았고 고모라는 여자도 돈한푼 없다며 대놓고 괄시를 했다.
제대한 아버지는 노발대발을 했고 한동안 아버지와 친할머니 사이에 언쟁이 오갔다.
아버지는 삼촌이 친할머니와 고모에게 입막음조로 한밑천 떼주었다는 것을 알았고
삼촌의 소재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삼촌은 그 많은 돈의 반은 이미 탕진한 상태고 나머지 반은 돌려 받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결국 의절을 선언한 아버지는 학교 가까운 곳에 작은 가게를 얻어 엄마와 친할머니에게 맡기고 남았던 공부를 마져 끝냈다.
그녀 기억속의 할머니는 자상하지 않았다.
늘 얼굴을 찡그리며 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손녀인 그녀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쓸데없는 딸을 낳았다며 늘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러나 엄마는 군소리 한 번 없이 늘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살았다.
아버지는 졸업을 하고 전공인 경영학을 살려 취업을 할까...작게나마 사업을 할까... 궁리를 하셨다.
그때 엄마는 아버지에게 조차 비밀로 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에게 주었던 것으로서
그 당시에는 쓸모없던 허허벌판 땅문서였는데 그곳에 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엄마는
벼락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돈을 엄마는 아버지에게 사업 자금으로 준 것이다.
아니, 전부는 아니다.
혹시나 친할머니나 삼촌 고모가 또 어떻게 나올지 몰랐던 엄마는 미리 딸의 몫을 따로 챙겨 두셨는데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것을 그녀, 수빈에게 모두 주고 가셨다.
예전 외할머니가 아무도 모르게 엄마에게 땅을 주신것처럼....
그러나 엄마는 행복하셨다.
아버지는 그 우수한 머리로 사업에 성공하셨고
친할머니 또한 그 후 10년 넘게 분에 넘친 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가끔 삼촌이 아버지를 찾아와 한밑천 어쩌구 저쩌구...분점 어쩌구 저쩌구...하셨으나 아버지는 거절하셨다. 직원으로 들어오는게 아니라면 찾아오지 말라고 하셨다.
삼촌은 아직까지도 반백수로 그렇게 살고 있다.
꾀많은 고모는 그런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으나 엄마나 그녀는 가족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들어 갔을때까지도 그녀 가정은 행복했다.
고등학교 1학년...개나리가 학교 담장을 휘감은 채 눈이 부시게도 노랗게 피어 있던 날...
그녀 만큼이나 젊은 여자가 부른 배를 안고 그녀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의 자식이랜다. 서른도 채 안 된 여자다.
더 놀라운 건 아버지의 태도였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엄마는 그대로 넘어가셨다.
한동안 마비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여자는 당당했다.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고 했고 아버지에겐 아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는 여자를 내보냈다.
임시로 집을 얻어주고 아이를 낳으면 호적에 올려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아들도 못낳는 여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조상 뵐 면목이 없다고 할머니는 대놓고 그러셨는데 그게 엄마에게는 한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면 호적에는 올려주되 그 이상은 용납 못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집안은 지옥이었다.
그 여자는 수시로 집에 들락그렸고 동네에서는 이미 소문이 짜 했다.
그때부터 엄마가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약을 먹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엄마는 한번도 그런 내색을 그녀에게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는 더 기고만장했다.
엄마도 그녀도 아이를 본 적은 없다.
여자는 엄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줬으니 당연하다는 거였다.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또한 그 여자를 찾아가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을 낳았는데도 기뻐하지는 않았다.
엄마와 그녀 앞에서만 그러는지는 몰라도...
고3.
엄마는 그녀에게 아파트를 선물했다.
베란다에 장미도 심어 놓으셨다.
비밀스런 장소에 비상금도 준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고3.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엄마는 그렇게 가셨다.
아무도 몰래.. 혼자 아파하시다...
그렇게 외롭게 가셨다.
수빈은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지금도 용서할 수 없는 건...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도
그래서 동생이 생겼다는 것도
그 여자와 산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엄마의 외로움...
엄마의 아픔을 아버지가 외면했다는 거,
몰랐다는 거...
그렇게 엄마를 비참하게 돌아가시게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
엄마에 대해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살았던 아버지였는데...
사랑한다고 해놓곤...다시 없는 사랑이라고 ...
수빈은 그대로 소파에 고꾸라졌다.
[사랑?... 이게 아빠의 사랑방식인가요? 그런가요?...변명이라도 해보세요...왜...왜 아무말도 않고 침묵만 하냐구요? 왜...그런 슬픈 눈빛으로 쳐다만 보냐구요? 네?...]
엄마를 사랑한만큼, 수빈은 누구 못지않게 아버지 또한 사랑했다.
다큰 딸, 얼굴에 뽀뽀를 하는, 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버지를 수빈은 존경하면서도 가슴 시리게 사랑했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의 배신은 엄마만큼이나 그녀에게도 충격 그 이상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아버지와 대화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일주일에 두어번 식료품을 보내주고 매달 백만원씩 통장에 꼬박꼬박 꼽히는 거...
그것만이 아버지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건 물질적인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그녀도 그녀 아버지도 안다.
그런데 그들은 감히 그 이상 다른 시도는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상처의 골은 깊고도 깊은 까닭에...
수빈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