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 언니를 보내고 수빈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골랐다.
얼마만의 데이트인가.
얼마만의 외출인가...
자신이 아직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비친다는 게 고맙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단념한 채 살았는데
오늘 수빈은 가슴속에서 작은 씨앗이 새록새록 싹을 틔우는 기분을 경험했다.
기분좋은 변화였다.
한번쯤...
가끔은 세상 돌아가는 모습, 그 변화를 몸으로 눈으로 겪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에게, 이 원우라는 사람에게 감사를 해야 할지도...
수빈은 능숙한 솜씨로 책을 정리하고 컴퓨터도 확인했다.
은영 언니가 어련히 잘 했으리란 건 알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문이 열렸다.
이 원우였다.
성큼 들어선 그가 손에 든 것들을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다.
[같이 저녁이나 합시다. 보아하니 혼자서 먹을리 만무하고...나 또한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가 뭣하고... 혼자 먹는 것 보다 둘이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가 들고 온 것은 초밥종류였다.
용케도 그녀가 즐기는 음식이었다.
군침이 돌았다.
[우리 경찰서 뒤쪽에서 사온 것인데 그 집 초 밥 맛이 괜찮소. 설마 싫어하지는 않겠지요?]
[아...뇨... 그렇지는 않지만... 그러나...!]
바보. 바보... 왜 싫다고 못하니? .....
하지만 그녀의 눈은 초밥에 꽂혀 있는 걸 어찌 하리오!
[그렇다면 토 달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요]
그녀는 초밥의 유혹에 못이겨 다소곳이 앉아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살살 녹는 맛이 그녀의 입가를 즐겁게 했다.
몇게 먹었는가 싶은데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놀란 그녀가 벌떡 일어섰고 그 모습에 손님이 더 놀라는 얼굴을 했다.
학생이었다.
[어, 누나. 안녕하세요? 식사중이었어요?...저기, <신불> 들어왔어요?]
[응? 어... 저기 꽂혀 있을거야....너. 초밥 좀 먹을래?]
학생이 씨익 웃었다.
[전 방금 배터지게 밥 먹고 왔어요. 신경쓰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수빈의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며 원우는 피식 웃었다.
[소문날까봐 두렵소?]
학생이 가고나자 그가 입을 뗐다.
그녀는 웃었다.
[전...소문은 무섭지 않아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저만 떳떳하면 되니깐...그리고 소문이란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거든요. 초장기때도 말이 많았어요.
데이트 하자는 분도 더러 있었고 협박 비슷한 것도 있었고 바람난 유부남도 있었고...
그런데 일년이 지나고 은영 언니가 커버를 많이 해준 탓인지 이제는 그런 일 없어요]
[잘됐군...당신이 소문은 신경쓰지 않는다니 아줌마들 입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당신에게 흑심품은 남자들은 이참에 아예 포기를 할 것이고...]
그가 씨익 웃었다.
느낌탓인가...
이상하게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도 원우는 거리낌없이 먹는데 열중했다.
수빈은 그에게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저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죠? 지금... 여기서 하는 건 어때요?]
[싫소]
그가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여기는 당신 그라운드잖소. 당신은 편하지만 난 불편해요. 우리 중간 지점에서 만나 얘기합시다. 난 지금부터 서에 가 있다가 10시 정각. 그때오겠소. 커피, 잘 마셨소]
그가 피식 웃고는 나가 버렸다.
그리고 정말 10시 정각.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또 그렇게 아무런 저항없이 그의 차에 탔다.
그가 데려간 곳은 그 호프 집이었다.
그의 친구는 오랜 친구를 반기듯 그녀를 반겼다.
[여기는 당신 영역같은데...이러면 불공평한 것 아닌가요?]
[당신도 아는 곳이잖소. 사실 분위기 있는 곳, 아는 데가 없소. ... 어떻소,술은 안되겠고...!]
[전 맥주 한 잔 하고 싶네요]
맥주 한 잔에 안주는 서비스라며 그의 친구가 푸짐하게 들고 왔다.
[이 자식은 꼭 바쁜 시간에 손님을 모시고 와서는 대화도 못하게 만들어]
[그걸 노린 거지]
[시끄러 임마!]
하면서 강 재철은 환하게 웃는 얼굴을 그녀에게 향했다.
[오래 있다 가세요, 수빈씨. 12시 넘으면 좀 한가합니다. 알았죠?]
수빈은 그냥 가벼이 웃기만 했다.
시원하고 짜릿한 맥주가 목을 타고 가슴속까지 내려가는 그 기분은 아마 마셔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할 얘기 ... 하세요]
그가 맥주를 반 이상 들이켰다.
[내가 한 번 사귀어 보자고 한 말... 취소하겠소]
그의 말에 수빈은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찬 바람이 가슴 한 쪽을 쏴! 하니 쓸고 가는 느낌이 있었다. 실망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사귀어 봅시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철렁하던 가슴이 다시 뛰었다.
그가 몸을 그녀 가까이로 내밀었다.
[이것 저것 생각도 말고 고민도 말고 미래도 접어 두고 오늘만 기억합시다.
중요한 건 오늘이지 내일은 아니잖소. 나란 놈이 싫지 않다면...사귀어 봐요. 이용가치도 많고 ...아마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을거요]
[당신을...이용하라구요?]
[당신이라면...당신이라면 그렇게 해줄 용의가 있소]
[왜죠? 제가 어떤 여잔지도 모르잖아요]
[좋은 여자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 않다면 내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을테니...]
[... ...!]
그는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사귀자는 건 데이트를 하자는 건데... 제가 책방을 한다는 건 알고 계실테고... 하루도 마음대로 비울 수 없다는 것도 아세요? 다시 말해서 보통 남녀들이 하는 그런 데이트는 못한다는 소리예요. 거의 밤 외에는 시간이 없어요]
[그럼 내가 하는 일도 알아요? 나도 늘 시간에 매여 사는 놈이오. 3일에 한번은 당직을 서거나 야간을 해야 하고 사건이 터지면 언제 불려 나갈지도 모르오. 데이트 하다가도 사건이 터지면 난 가야 하오.
나 또한 늦은 시간이 되어야 그나마 숨을 돌리는 편인데. 어떻소? 이러면 우린 궁합이 맞다는 생각 들지 않소?]
그가 씨익 웃었다.
[그러면 우리가 사귀는 데 있어서 불만은 없는 거요?]
[아니... 전...!]
[토 달지 말아요. 정식으로 인사합시다. 난 이원우요. 나이는 서른 셋이고 위로 누나가 있고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소]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야 할지 어떨지 수빈은 한동안 고민을 했다.
이 사람 손...
참 따스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도...따스할까?....
그 유혹에 그 느낌에 수빈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가 덥썩 잡으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따스했다, 역시...
[당신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거요. 난 내가 당신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 올 것이고 전화도 할 것이고 시간 나면 만날 것이오. 당신 또한 언제든 어느 때건 내가 필요하면 전화를 해요. 달려 올테니...알았소?]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 남자를 만났다.
한 남자가 내게로 왔다.....
수빈은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