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어거지로, 떠밀리다시피 하면서 수빈은 원우의 코란도에 올라탔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은영 언니를 뒤로하며 수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에 말이오, 얼굴 한 번 못보고 서로 혼례를 치른다고 하잖소? 지금 당신의 표정이 꼭 그렇소. 알아요?]
긴장된 그녀를 위로하듯 그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잡아먹지 않을테니 걱정 마요. 뭐 하나 물어 봅시다.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뭐요? 이왕이면 당신 좋아하는 걸로 봅시다]
[뭐...딱히 가리지는 않아요. 그리고 최근엔 영화관에 간 일이 없어서 요즘 뭐하는지도 잘 몰라요]
[솔직히 나도 그렇소. 군대 제대한 이후론 영활 구경 한 적이 없소]
그녀는 피식 웃었다.
[둘 다 문화 생활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것 같네요]
그가 그녀를 힐끔 둘러 보며 따라서 피식 웃었다.
한편 은영 언니는 커피를 마시며 마치 책방 주인이 된 냥 가게안을 왔다 갔다 하며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끔, 늘 책방만 지키고 앉아 있는 수빈이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보희밖에 없는 듯 했다.
부모도 형제도..!
그러고보니 은영은 수빈이 가족들 얘기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책방에 들리는데 수빈을 찾는 부모나 형제를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아파트는 엄마가 사 준 것이라고 했는데?]
궁금증이 생겼다.
하나의 궁금증이 생기자 연달아 많은 궁금증이 몰려 들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네에. 도깨비 책방 입니다.... 아, 보희씨구나]
-어머, 안녕하세요? 수빈이는요?-
[응. 미스 채는 어디 좀 갔어]
-어딜?... 혹시 집에 갔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참, 보희씨. 지금 시간 어때? 물어볼 게 좀 있는데... 미스 채에 관한 일인데...]
-... ...!-
원우는 수빈을 데리고 시내 한 복판으로 들어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시내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들은 3시 표를 끊었다.
폭력적이지, 선정적이지도 않은 무난한 영화를 골랐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점심 먹었소?]
먹었을리 없었다.
[나도 점심전인데,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뭐 먹고 싶소?]
[밥...요]
그가 빙긋 웃었다.
극장 앞에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빠져 나가기가 수월치 않았다.
그녀가 밀리는 사람과 부?H히자 원우는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아 끌었다.
놀란 그녀가 손을 빼려고 했으나 그는 더 꼭 잡으며 길을 텄다.
따스했다.
그 열기가 그녀의 손을 통해 온 몸으로 퍼졌는데 그녀의 가슴까지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놓아야 한다고 이성이 외쳤지만 그녀는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낯설지 않게 했다.
마치 오랜동안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미스 채, 데이트 보냈어]
[예? 수빈이가요? 설마...!]
[아주 괜찮은 남자 같았어. 이래봬도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좀 있거든. 아마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내가 반 강제로 미스 채를 내보냈어]
[기집애...내가 선 한번 보라고 그만큼 얘기할 땐 싫다고 하더니...]
보희는 괜스레 섭섭했다.
[근데...뭐하는 남자래요? 성격은 어때요? 몇살이에요?]
[후훗...미안하지만 나도 거기까지는 잘 몰라. 아는 건 이 남자가 미스 채를 첫 눈에 맘에 들어 했다는 것과 요 앞 경찰서의 형사라는 것...나도 아는 게 거기까지야. 하지만...!]
[형사요? 건너 편 경찰서요? 그 남자 이름이 뭐래요?]
[이름?...글쎄, 그것까진...?]
갑자기 보희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저 보흰데요. 듣기만 하세요. 지금 수빈이랑 같이 있나요?....그렇군요... 재미있게 해주세요. 알았죠?]
통화를 마친 보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형사하고 통화한거야? 자기도 아는 남자야?]
[네에...제가 수빈에게 소개시켜 주려고 했던 남잔데...]
[어머. 진짜? 이거 인연이다, 인연!]
[근데...수빈을 보고 와서는 자신이 알아서 할테니 나서지 말라고...당분간 모른 척 해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너무...적극적으로 나서면 수빈인 도로 뒤걸음 칠텐데...]
[보희씨. 걱정마. 내가 보기엔 그 남자가 딱 적격이야]
[저도 수빈이가 원우씨랑 잘됐음 해요. 그 사람, 정말 남주긴 아까운 남자거든요. 원우씨라면 수빈을 행복하게 해줄거에요]
보희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걱정과 안타까움을 은영이 놓칠 리 없었다.
[저기...보희씨. 미스 채한테 가족 없어?]
[...있어요. 아버지도 계시고... 동생도 엄마도...]
[그래? 그런데 미스 채 눈빛이 왜 그렇게 슬퍼?]
[문제는요...엄마가 새엄마라는 것과 동생이 친동생이 아니라는 거죠...수빈인 지엄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 고아가 된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래... 그런 사연이 있구나...]
[참 외롭고 아프게 살아왔어요. 아버지의 외도로 엄마가 돌아가시고...그래서 남자들과의 관계도 늘 안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 아예 담을 쌓게 된 거고...]
은영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영화는 그런대로 볼 만 했다.
그가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으나 수빈은 거절했다.
너무 늦기도 했고 은영 언니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는 더는 말없이 그녀를 책방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즐거웠구요...]
[우리 저녁에 한번 더 만납시다]
[아니, 전...!]
[이대로 보내면 당신이 다시는 날 만나려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당신한테 꼭 물어볼 말도 있고 . 10시에 여기서 기다리겠소. 내 얘길 들어보고 영 아니다 싶음 ... 그때 거절해요. 어떻소? 그래 주겠소?]
그녀가 망설였다.
단호하게 싫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리다. 도망갈 생각은 말아요. 그러면 난 아마 평생, 당신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거요.
오늘, 나와 데이트 해줘서 정말 고맙소. 이따 또 봅시다]
그가 몸을 기울여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희미한 레몬향이 그녀의 코를 자극하자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수빈은 그가 눈치챌까봐 얼른 내려서 책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