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토요일은 그나마 조용해서 다행이네?]
[왔어? 근데 뭔 소리야?]
보희가 빙 둘러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출근 도장 찍는 아줌씨가 없다는 뜻이야]
수빈은 피식 웃었다.
[토요일 일요일은 거의 오지 않아. 간혹 은영 언니는 와. 내가 심심해 할까봐 와 본대. 재밌지?]
[재미있기도 하겠다]
[레모네이드 한 잔 줄까? 어제 내가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수빈은 보희의 말에 웃음으로 대신하며 차를 내밀었다.
[너 산달이 다 됐지? 언제야?]
[7월이라고 여러번 얘기했는데, 또 묻고 있어. 너 나한테 그렇게 관심없어 하면 재미 없는 줄 알어!]
[알았어, 미안해. 그런데 휴가없어?]
[그렇잖아도 오늘부로 일 끝냈어. 90일동안 자유부인이다, 이제]
[친정가서 산후조리 할거지?]
[그래야지 뭐. 한달은 있어야겠지? 근데 내가 없음 너 어떡하냐?]
[내가 왜?]
[누가 너랑 놀아주고 누가 챙겨주겠냐구]
[걱정도 팔자셔. 너나 잘 하세용, 이 보희씨!]
[그러지말고 너 소개팅 함 해라, 응? 내가 전에 얘기했던 울 신랑 친구있잖아.
자기가 먼저 소개 시켜달라고 해놓곤 퇴짜를 놓더니 뭔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다시 소개를 시켜달라는 거 있지. 한번 봐라, 응?]
수빈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경찰? 그때도 분명히 싫다고 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싫어. 너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 그런 소리 다시는 안 할거다]
수빈은 이 원우에 대한 얘기를 보희에게 상세하게 털어 놓았다.
자신만큼이나 황당해 할 줄 알았는데 보희는 예상외로 크게 놀라지도 않은 채 긴 한숨만 내쉬었다.
[왜?]
[넌 니 좋다는 남자의 진심을 그런 식으로 박살내냐? 그러고 싶어?]
[내가 뭘? 난 그렇게 막무가내식인 남자는 처음 봐]
[그 남자가 그렇게나 싫어?]
[... ...!]
보희의 질문에 수빈은 딱 잘라 싫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뭐...꼭...1]
[그럼 한번 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잖아. 사귀어보고 영 아니다 싶음 니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되쟎아. 보아하니 싫다는데 메달릴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아니,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응? 어...그야... 그래도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감은 온다 뭐]
[됐어]
보희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 한군데 모난 구석이 없는 수빈이 남자문제에 있어서는 늘 막혔다.
대학교때 수빈은 한번인가 두번인가 남자와 사랑 비슷한 감정에 빠진적이 있었다.
그러나 항상 어느 정도 진척이 있는가 싶음 수빈이 먼저 돌아서곤 했었다.
이유는 섹스때문이었다.
남자는 원하고 수빈은 거부하고..
[수빈아. 제발..올해는 결혼 좀 해라. 니 좋다는 사람 있음 그냥 다른 생각 말고 결혼해라]
[얘는 뜬금없이... 혼자서도 잘 살어]
[그래. 너 혼자 잘 사는 거 알어. 아는데, 둘이면 더 좋다는 거지. 혼자 밥 먹는 거 보다 둘이 먹는 게 더 맛있고 혼자 티브이 보는 것보다 둘이 보면 더 잘 웃는다는 거, 혼자 잘때보다 등 뒤에서 따스하게 날 안아주는 이가 있다는 데서 오는 그 평온함과 따스함...
내가 잘 했건 못 했건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는 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너 모르지?]
[... ... 좋은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는 거 ... 너 아니?]
[좋은 사람 기준이 뭔데? 섹스하지 않는 남자?]
[... ...!]
[너 그게 말이 되니? 요즘 한두번 섹스 해보지 않고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섹스한 남자랑 결혼하는 여자가 또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나를 예로 들어볼래?
너도 알다시피 내 남편이 내겐 첫 남자가 아니야. 남편한테 또한 내가 첫 여자가 아니듯이.
하지만 우린 그런 거 문제 삼지 않았어. 그리고 우린 세번째 만나는 날 호텔 갔었잖아.
요즘은 즐기는 시대야. 자유분방하게 즐기라는 소리가 아니고 서로 뜻이 맞으면 섹스를 할 수가 있고 아니다 싶으면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게 요즘 시대의 사랑법이지.
하지만 너에게 있어 문제는 그게 아니지.
넌 사랑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잖아.
<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살지... ?> 하고...넌 너 자신에게 그런 상황이 닥칠까봐, 그걸 두려워해. 맞지?]
[마음대로 생각해]
수빈은 반박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알고 많이 알고 있는 친구가 아닌가.
[채 수빈. 제발 이젠 마음이 가는대로 좀 움직여봐라. 아줌마들한테 주워 듣는 걸로 만족하지 말고 인생을 좀 즐기면서 살어. 아줌마들한테는 잘 하면서 왜 남자한테는 못하니?]
못하는 게 아니라...
솔직히 수빈은 자신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그러다보면 정말 섹스도 해 보고 싶은 게 자연스런 감정이다.
수빈에게도 그런 기회는 있었다.
강의실의 어두운 구석에 앉아 진하게 키스를 주고 받으며 가볍게 서로의 은밀한 곳을 애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남자의 그것이 자신의 그곳에 닿으려고만 하면 그 짜릿한 감정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내가 서툴러서 이 남자가 날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수빈은 피식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스럽지만 그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다보니 남자 사귀는 게 소원해지고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를 주춤거리게 하는 건 남자들에 대한 믿음...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여준 그 거짓된 믿음.
그로인해 자신과 어머니가 받았던 배신감....
그 사실을 수빈은 지울수가 없었다.
[퇴근안해?]
생각에 잠겨 있느라 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은영 언니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거야?]
[아 예...근데 언니는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응. 난 머리가 아파서 약 좀 사러 나왔지]
은영 언니는 약봉지를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다.
[에구, 나온 김에 좀 놀다 가야지. 미스 채야. 한 30분 나랑 놀자. 괜찮지?]
[그럼요]
하긴 수빈 자신도 일찍 들어가봤자 할 일도 없었다.
[캔 맥주 한 잔 하실래요? 안되겠죠? 아저씨한테...!]
[울 신랑 벌써 꿈나라로 갔어. 맥주 한 잔 주면 나야 좋지]
수빈은 테이블위의 불빛만 남기고 모두 소등했다.
그리고 미니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미스 채야. 난 밤늦게 이렇듯 분위기 잡고 술 한 잔 하는 게 왜 이리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어.
마음이 편하다고 해야 하나... 자유롭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이런 분위기가 난 참 좋더라. 자기는 어때?]
[훗... 사실 저도 그래요. 음악 털어 놓고 혼자 가만히 술을 마시고 있으면...!]
[노, 노, 노!!!!!]
은영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술마시는 것은 좋지 않아. 그게 버릇되면 알콜중독자가 되는 거야. 안돼.
술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내게 연락해. 혼자 마시지 말고. 나하고 약속해]
은영 언니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수빈은 웃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두 사람이 낄낄대고 있는데
힘차게 문이 열리면서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어머나, 깜짝이야!]
은영 언니의 놀란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수빈도 놀라서 맥주캔을 내려놓았다.
이 원우. 그 남자다.
수빈 혼자 있으리란 예상으로 들어섰던 원우는 뜻밖의 은영 언니를 발견하고는
조금은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