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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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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웬수지...


BY 데미안 2006-03-15

 

 

커피 한 잔 걸쭉하게 마시고 정화씨가 떠났다.

 

[에구... 정이 웬수지. 달리 웬수가 따로 있나]

 

정화 언니가 창밖을 내다보며 한 소리 한다.

 

[사랑? 그거 얼마 못가.  정작 무서운 건 사랑이 아니라 정이야, 정.  사랑이 식을때쯤

사랑이 남기고 가는 건 정이거든.  이 정이 사람을 죽이지.  그 놈의 정 땜에.... 하는 소리가 괜히 나오겠어?

정들면  이혼도 쉽게 안돼. 토라지고 미워지고 치고 박고 싸워도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건 정이거든.

이혼하는 건 정이 없다는 증거야. 정이 없다는 건 사랑도 없다는 것이니깐...

미스 채는 이해가 돼? 아니지, 아직은 뭔 잡소린가 싶을거야...

사실 나도 요즘들어 조금씩 깨달어 가고 있는 중이거든.....]

 

하면서 은영 언니는 웃었다.

 

그 웃음의 여파는 그녀가 가고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해걸음이 깔릴 무렵에도 수빈은 정화 언니의 말을 곱씹었다.

 

정이 무섭다는 말... ...

언제든가 엄마가 한번씩 하던 말이었다.

그 놈의 정이 뭔지....라는 엄마의 말......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네에. 도깨비 책바...!]

[만화책 반납할테니 기다리시오. 그럼 이따 봅시다]

 

그리곤 전화가 끊겼다.

수빈은 말문이 막혀서 한참을 귀에 대고 있었다.

황당도 그만하면 수준급이고 뻔뻔함도 그만하면 과히 금메달 감이 아닌가!

 

[오만방자함이 유치찬란이군. 정말 재수없어!]

 

그러나 책은 찾아야 하기에 수빈은 그를 기다렸다.

문 닫을 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간판불을 끄고 책방 안에서 뎅그러니 서서 기다리자니 은근히... 조금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11시가 가까워 오자 수빈은  보희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너무 늦은 시각이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 바보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다리란 말에  무턱대고 기다리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자  수빈은 퇴근하기로 했다.

그런데,

용케도 타이밍도 기가막히지!

그 남자가 들어섰다.

책을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고 수빈은 그를 쳐다볼 생각은 아예 없는 듯 책 권수만 확인했다.

 

[맞아요. 연체료는 물리지 않을게요. 안녕히 가세요]

쌀쌀맞은 음성을 그대로 들어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죄송하지만 영업은 이미 끝났습니다. 저도 문을 닫아야 하거든요?  안녕히 가세요]

[눈이 왜 있다고 생각하시오?]

[뭐라구요?]

 

그녀는 화가 나 있는데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눈은 마주보라고 있는거요. 말을 할 때 서로 쳐다보면서 ...!]

[전 댁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모르시나본데  보통 영업하는 사람들은 10가 되면 문을 닫아요.  요즘엔 더 일찍 닫는 곳도 많고요. 형사시니깐 아실텐데요?  전 1시간을 기다렸어요. 댁이 기다리라고 해서 제가 새벽 1시고 3시고, 댁이 올 때까지 기다릴줄 아셨나요?

제가 만화방이나 하는 여자라고 해서...!]

 

[미안하오, 채 수빈씨]

 

갑자기 그가 부드럽게 사과의 말을 건네는 바람에 수빈의 말은 중간에 얼어 버렸다.

 

[내가 사과하겠소.  전화를 해야 옳지만... 변명같겠지만 퇴근해서 나오는데 사건이 터졌다길래 경황이 없었소. 내딴엔 빨리 온다고 왔는데... 당신 말이 맞소. 시간이 늦으면 당연히 전화를 했어야 옳소]

 

예상치 못한 그의 정중함에 수빈은 갑자기 자신의 앙칼진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벌개지자 수빈은 적당히 고갤 숙였다.

 

[사과...받아 드리죠. 너무...늦었네요, 문 닫을 시간인데... 안녕히 가세요...]

 

그가 나가자 수빈은 숨을  크게 내쉬며 가게 안의 불을 껐다.

내가...너무 생각없이 몰아붙혔나?......

약간의 미안스러움을 품으면서 그녀는 가게문을 꼼꼼히 잠궜다.

 

[나랑...차 한잔 하겠소?]

 

당연히 갔으리라 생각했던 그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건넸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 어떻소?]

 

어둠이 힘을 준건가...

수빈은 남자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험악스럽지도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은 그런 인상이다.

 

[마신걸로 하겠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또...! 어머나, 왜 이래요!]

 

말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갑시다. 가까운데 좋은 곳이 있으니]

[이거...! 놓으세요!  왜 이래요!]

[잡아 먹지 않을테니 걱정말아요.  명색이 형산데 해코지 하겠소? 오히려 든든하게 생각하시오. 안전하게,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집에 보내줄테니 나랑 차 한잔 합시다]

[아니, 이봐요!  누구 맘대로...!]

[내 첫 인상이 당신에겐 최악이었던 것 같은데 새롭게 합시다]

[아, 아니... 난....!]

 

세상에...!

너무 놀란 탓인지 혀가 굳은 듯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죄인인냥 그에게 끌려가 듯이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30년 인생에 그런 황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가 그녀를 납치(?)해 간 곳은 길 안쪽에 자리한 포장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