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은영 언니의 우울한 방황이 끝날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치과는 다시 문을 열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집 가정사야 어찌되었든 후덕하고 솜씨좋은 치과 의사를 잃지 않아도 된다는 건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계절이 6월로 바뀌자 한 낮의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했고 성질 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짧은 옷을 꺼내 입고 다녔다.
학생 손님이 들어섰다.
주말이면 가끔 얼굴 도장 찍는 남자애였다.
[어, 누나. <신.불.사>(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5부, 10편부터 누가 빌려 갔어요?]
남자애가 안쪽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아차 싶었다.
잊고 있었다.
[으응... 빌려 갔는데 아직이네. 전화해서 가져다 놓으라고 할께]
[에이...오늘 꼭 보고 싶었는데...할 수 없지... 며칠있다 다시 올게요]
[그럴래? 미안해. 잘가!]
남자애가 나가자 수빈은 전화번호를 찾아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이 원웁니다]
굵직한 목소리가 시원스레 퍼져 나왔다.
이 원우가 아니라 이 원수겠지...
[네에. 여긴 책방이거든요. 만화책 좀 갖다 주시면 안될까요? 찾는 사람이 있는데... 저도 장사를 해야 하잖아요. 댁이 막무가내로.....!]
[물건을 돌려 받고 싶으면 좀 더 공손해야 한다는 생각, 들지 않소? 그리고 지금은 바빠서 갈 시간이 없소. 보고 시간 나면 저녁에 갖다 주겟소. 그럼...]
[아니! 이것 보세요! 이것......!]
전화가 끊겼다.
[세상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냐! 기가 막혀서... 정말 재수없어! 아휴, 정말 왕짜증이야!]
수빈은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왕짜증? 난 아니겠지?]
언제 들어섰는지 눈을 크게 뜨고 은영 언니가 앞에 있었다.
[뭐야. 왜그래? 누구랑 싸운거야?]
[아뇨~ 만화책 좀 가져다 달라고 하니깐 시간 나면 갖다 주겠다고 하잖아요. 기일도 훨 지났는데 말이에요]
[그래? 누군지 몰라도 배짱 한 번 좋으네. 그러나 그런 일로 열 받지마라, 미스 채. 건강에 안 좋다~]
은영 언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며칠 전과는 다르게.
[미스 채. 이 스커트 어때? 이뻐? 나한테 어울리는 거 같어?]
은영 언니가 한바퀴 휙 돌면서 말했다.
연보라빛의 플레어스커트다. 수빈은 웃었다.
[네에. 잘 어울려요. 언닌 다리가 예뻐서 스커트가 아주 잘 어울려요]
[호호~ 사실 그 얘기가 듣고 싶었다는 거 아니냐. 커피 한 잔 줄래?]
커피 향이 가게안을 가득 채웠다.
[아저씨랑 외출 하셨어요?]
[어떻게 알았어? 맞아. 울 신랑이 쇼핑하자고 그러더라. 그래서 옷도 몇 벌 사고 외식도 하고...]
은영 언니는 행복한 듯 웃었다.
[우습지? 남자도 단순하지만 여자도 단순해. 남편이 한번만 잘해줘도 지난 십년간의 묵은 감정들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여잔 이 재미로 사는가봐]
[언니의 웃는 모습 보니 저도 기분 좋아요]
[아줌마들 겪어보니 우습지? 변덕도 심하고 말도 많고 참견도 심하고..]
수빈은 그냥 한 번 웃어 버렸다.
[참! 치과 다시 문을 열었던데 아세요?]
[그래? 잘됐다. 그래, 열어야지. 그렇잖아도 주위에서 다시 문 열라고 권유를 많이 한 모양이더라]
[그럼...원장님과 같이 하나요?]
[미쳤니? 원장은 나가고 없다고 하더라. 사모님 혼자 하실 생각인가봐. 뭐 혼자 해도 되지 뭐. 실력이야 원장보다 사모님이 나으니깐. 안그래?]
문이 열렸다.
정화씨다
[아유! 같이 가자니깐 그새를 못 참고~]
정화씨가 은영 언니를 흘겨 보며 한 마디 했다.
정화씨가 곱게 단장을 했다.
[어머. 어디 가게요?]
[시집쪽 돌잔치 같대]
은영 언니가 대신 말을 했다.
[나도 커피 한 잔. 수빈씨~~]
정화씨의 애교스런 말투에 수빈은 소리내어 웃었다.
[시부모랑 같이 가냐?]
[두말 하면 잔소리지. 언니. 난 이해가 안가. 평소 왕래도 없는 사람들인데, 그것도 그 쪽에서 초대도 않는데 일부러 간다고 얘기까지 하고 갈 필요가 뭐 있냐고.
그건 그렇다 치고 갈려면 그래, 당신들만 가시면 되는데 굳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우리까지 굳이 끌고 갈 필요가 뭐가 있냐고! 울 남편도 그 사람들 잘 모른다더라]
[너 시부모도 어지간히 할 일 없어신가보다]
[난 그 속셈 알우! 그 집안이 좀 빵빵하다네. 울 시아버지, 원래 있는 사람들한텐 좀 굽실대는 스타일이시거든. 없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도 안잖우.
어제 그 일땜에 울 신랑이랑 시아버지랑 한판 했잖우. 울 시아버지, 돌반지를 당신꺼랑 두개 사 오라고 하시더라. 웃기지 않어? 젤 좋은 걸로 사래. 울 신랑 안간대. 나더러 모시고 갔다 오든지 말든지 하라잖우. 아유~ ]
[그래서 가려고?]
[안가면? 안가면 보나마나 자리 깔고 누우셔서 우리를 죽이네~ 살리네~ 하실건 뻔한데, 휴우~ 내가 희생하고 말지]
[참나~....하여간 너 살 찌는 거, 그거 다 스트레스 살이다]
[그러게요~]
정화씨는 키득키득 웃었다.
[수빈씨. 내가 전에도 얘기했지만 결혼은 남자 하나 보고 가서도 안되더라. 그 집안도 꼭~ 꼼꼼히 살펴보고 가야돼. 안그럼 평생 골병이다~]
[에구~ 미스 채 머리 터지겠다. 찾아오는 여편네들마다 안 좋은 소리들만 늘어 놓으니...
결혼하고 싶어도 어디 겁나서 하겠어?]
[호호호! 그런가~?]
그러나 수빈은 그들이 모두 행복하고 만족스런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