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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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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문 닫았거든요....


BY 데미안 2005-12-17

 

10시가 되자 수빈은 대충 정리를 끝내고 가게 안을 한바퀴 둘러보고 불을 껐다.

출입문을 잠그면 셔터문이 자동으로 내려오면서 자동으로 잠기게 되어 있었다.

이제 비는 그쳐 있었다.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어머나,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수빈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졸도할 뻔 했다.

키가 큰 남자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갈수록 편해지니 말입니다]

 

놀란 수빈이는 아랑곳않고 남자는 느긋한 표정과 느긋한 말투였다.

 

[세상에! 기척이나 하고  말씀하세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잖아요!]

 

너무 놀란 탓에 수빈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말투도 날카롭게 세어 나왔다.

멀뚱이 서 있는 남자를 뒤로 한 채 수빈은 재빨리 등을 돌렸다.

아이, 재수없어.....

 

[이봐요. 만화책 반납하려고 왔소]

 

굵직하고 느긋한 음성이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문 닫았거든요... 그러니 내일 가져 오세요.  연체료는 받지 않을게요.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직도 가슴이 쿵쿵대고 있었다.

 

[난 오늘 돌려줘야 되겠소만...?  부탁 받은 것이라서. 꼭 돌려 주겠다고 약속했소]

 

마지못해 돌아선 수빈은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만화책을 나꿔채듯이 받아 들었다.

 

[됐죠?  그리고 앞으론 이렇게 사람 간 떨어지게 하지 마세요. 심장 약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까요. 알았죠?  이젠 안녕히 가세요]

 

[원래 그렇게 앙칼진거요?  내가 너무 놀라게 해서 화가 나서 그런거요?]

[네에?]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그리고, 사람과 얘기를 할 땐 눈을 보면서 얘기해야 한다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습디까, 채. 수. 빈. 씨?]

내... 이름을 알고 있어?...

 

그제야 수빈은 남자를 찬찬히 바라 보았다.

어디서...본 기억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목소리... 그래, 굵고 느릿한 저 음성을 언젠가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남자가 피식...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리고 남자는 손으로 길 건너 경찰서를 가리켰다.

그제서야 그녀의 입이 알았다는 듯 벌어졌다.

 

[이제야 기억나오?]

 

그때와 지금 눈 앞의 남자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땐 어딘가 모르게 위압적이었으나 오늘은.....!

부드럽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런 느낌었다.

분명 날씨탓일거야....

 

[아...네에...안녕하세요...]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그녀의 빈 손을 다짜고짜 잡아 당겼고 수빈은 다시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으나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무어라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남자가 싸인팬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가 가슴에 안고 있는 만화책을 다시 뺐아 들었다.

 

[나도 기분이 나빠서 그냥 돌려 주기가 싫어졌소.  만화책을 찾고 싶으면 내게 전화하시오]

[뭐라구요?]

[바래다 주고 싶지만 그 성격을 보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조심해서 들어 가시오. 또 봅시다]

[이봐요...!]

 

남자는 그녀의 외침에는 들은 척도 않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한참을 서 있던 그녀도 발걸음을 옮겼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 정말 재수없어!]

수빈은 집에 도착해서까지 계속 투덜대고 있었다.

옷을 벗어면서 수빈은 그가 자신의 손바닥에 무언가 적었다는 걸 기억해내고 손을 펼쳤다.

 

이 원 우.  011- xxx- xxxx

 

[어머, 웃겨, 이 아저씨가. 누가 지 전화번호 알고 싶대? 재수없어, 정말!]

 

코웃음을 치며 지우려던 수빈은 멈칫했다.

 

[피같은 내 만화책!  그걸 그냥 버릴수야 없지]

수빈은 다시 투덜거리며 수첩에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다.

 

 

다음 날.

가게 문을 열고 난 수빈은 수첩에 적어 놓은  그의 전화번호를 뜷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원우....  이 원우....

 

[치... 이 원우가 아니라 이 원수겠지. 이 웬수!!!!...]

 

[뭘 혼자 쫑알거려? 이젠 비도 그쳤는데..?]

 

헬스하고 오는 길인지 머리가  헬스클럽 가방을 옆구리에 찬  은영 언니가 들어섰다.

화들짝 놀란 수빈은 재빨리 수첩을 덮었다.

 

[운동 다녀 오시는가봐요?]

[응...오늘은 찌푸둥하네... 커피 한 잔 줄 수 있지?]

[네에. 저도 아직 커피 전인데 같이 마셔요]

[응, 고마워...요즘은 이상하게 산다는 게 재미가 없고 힘이 빠져... 치과일의 후유증 같어..]

 

수빈은 그냥 웃고 넘겼다.

헤즐럿 커피향이 잔잔히 퍼지기 시작했다.

 

[자기 커핀 진짜 고소하다... 미스 채야.]

[예?]

[오늘 점심 약속없지?]

[...?]

[나랑 점심하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한 두어시간만  보희씨한테 가게 좀 봐 달라고 하면 안될까?  오늘 자기랑 우아하게 레스토랑 가서 칼질 하고 싶다.  그러자, 응?]

[언니도 참... 정화씨도 있잖아요. 괜히 정화씨 알면 삐칠텐데...]

 

우스게 소리로 수빈이 한 소리 했다.

 

[정화는 다음에 얼큰하게 한 턱 쏘면 돼. 그래도 자기가 정화보담 품위가 있잖우. 가자, 응?  보희씨한테 전화해 봐. 알았지?  12시까지 연락없음 가는 걸로 알고  올거야.]

 

은영 언니는 후다닥 커피를 마시더니 준비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수빈은 보희에게 전화를 넣었다.

 

[너 점심때 가게에 올거니?]

- 응, 왜, 먹고 싶은 거 있니?-

[아니, 가게 좀 봐 달라고]

- 너 또 은영 아줌마랑 점심 할려고?-

[쪽집게네. 봐줄거지?]

- 에구, 남자랑 점심 한다는 소리 좀 해봐라-

[또 잔소리! ]

-두 시간밖에 못 봐 주는 거 알지?-

[응. 고마워. 끊을게]

 

전화를 끊고 수빈은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거울에 얼굴을 디밀었다.

나이 30.

젊지도 늙지도 않은 여자가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콤팩트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