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주는 그저 멍하니 벽만 처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옆에 앉아 있던 태환이 그녀의 멍한 의식을 깨워주었다.
"너 지금 잠이 오냐? 내가 정말 어이가 없다."
"아니 잔게 아니고 ..그냥 깜빡 .. 내가 피곤했는가 보다.."
"너만 일하러 다니냐? 니가 우리식구 다 먹여 살리냐고..
혼자 뭐가 맨날 피곤하다는 거야?"
그저 평범하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민주의 가슴이 터질것 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감정싸움은 결국 그가 하고자 하는대로 끝나 버릴 거라는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끝이 나기까지 벌여야할 둘의 신경전은 사람의 피를 말리는 전쟁과 다를바 없었다.
이 상태로 시간을 오래 끄는 건 민주나 태환을 위해서도 좋을것이 하나도 없다..
둘 다 힘들어지는 상황..
민주가 굽혔다면 의외로 일은 쉽게 풀릴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은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녀도 굽히려 들지 않았다.
분명한건 예전처럼 '그저 아무일만 없으면 그게 좋은것이다'는 식의 생각을 그녀가 조금씩 버려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했다면 쉽게 풀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민주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벌써 5년이나 지나가 버린 일이지만 그 날...
민주가 태환에게 듣고 싶었던 말도 "미안하다"는 단 한마디 사괴의 말이었다.
그 한마디 사과만 있엇다면 모든 것이 지금처럼 틀어지지 않았을 수 도 있었을텐데 ..
끝내 태환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판하기 좋아하는 그 입술로 그녀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마음의 문을 닫았다. 다시는 그에게 이해를 바라는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고 .. 그리고 오늘만 울겠다고 ... 그녀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그'라는 성벽이 무너지던 그 순간에 모든것은 그 빛을 잃어버렸다.
그 사건은 민주가 수아를 낳고 거의 7개월이 다 되어 가던 어느날 일어났다.
그날도 민주는 혼자서 바빴다. 새벽 다섯 시 경에 둘째의 우유를 먹이기 위해 잠이 깬 후로 저녁식사를 마친 그 시간까지 잠깐도 자리에 앉은 기억이 없을 만큼 그날 하루도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날도 저녁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수아의 목욕이며 수민이의 공부까지 다 끝낼 수가 있었다.
한 참을 혼자 바빠서 그렇게 동동 거리는 동안에도 태환은 저녁 식사 후 줄 곧 TV앞에 앉아 메이저리그 야구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울며 보채는 수아를 봐주지 않아서 결국 업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저녁에 일이 끝나고 자리에 누울 시간이 되면 등이며 어깨가 결리고 아픈날이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태환이 그녀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꺼라는 그런 생각에 그 일들을 힘들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태환은 요즘 부쩍 집에와서 말이 없다. 밖에서 직장 동료들과 한 잔씩 하고 늦게 들어 오는 날도 많았지만 그런 날도 예전처럼 민주를 잡고 시비를 걸거나 맞벌이를 해야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확연히 줄어 들었다.
그게 모두 수아 덕분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직 수아를 임신하기 전,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탓에 애기 키우는게 너무 힘들던 민주가 항상 입버릇 처럼 둘째는 낳지 않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생활은 거부를 하자 태환은 밖에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취기를 빌어 이런 말을 했다.
"친구들이 그러는데 직장 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애는 왜 하나밖에 안 낳는지 궁금해 하더라. 어차피 집에 있을꺼면 자식이라도 둘을 낳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이지.."
남의 가정사에 어쩜 그렇게도 관심이 많은 친구들인지 큰애가 겨우 소변을 가릴 나이가 되면서 부터 시작한 이 말은 민주가 수아를 임신한지 3개월이 될때까지 계속 되었고, 수아의 존재를 확인하던 그 순간까지도 아니길 바라던 그는 축하나 기쁨의 말도 한마디 하지 않은채 긴 침묵속으로 잠수를 해 버렸다.
그리고 배가 불러지며 혼자 몸도 건사하기 힘들어 하는 민주를 보면서도 그의 생활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술을 마시고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아서야 들어 오는 날이 많아 졌고, 급기야는 외박까지 하고서도 어쩔수 없었다는 말로 일축해버리고선 전혀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신경이 예민해져 밤을 세웠을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던 시간이 지나 수아를 낳았다.
하얀 피부에 말랑말랑한 손가락과 발가락..
엄마의 마음을 읽은 건지 우는 소리 조차도 너무 여리기만 했다. 저렇게 작은 울음소리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수아는 작고, 여리고, 예뻤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뱃속에 가지고 있을때부터 미워했었던 수아..
그 미움이 태환에 대한 그녀의 어긋난 감정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따뜻한 태담 한마디 해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 애기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
민주는 수아가 딸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신이 있다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분만실에서 반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들은 '공주님 입니다.'라는 말에 설움이 북받쳐 진정제를 맞아야 할 정도로 울었다.
큰애가 아들인데 뭐가 그리 서운하냐며 속모르는 소리를 하는 간호사도 미웠고,
아들 낳고 딸 낳았으니 백점짜리라며 실없이 농담을 거는 주위 다른 산모들의 보호자들이 미웠다.
여자로서 산다는게 민주로선 쉽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고 수아도 자신과 별반 다르게 살지 못할꺼라는 생각이, 걱정이 그녀의 의식세계를 짖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수아는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너무 순해서 하루 종일 우유만 물려 주면 잠을 자는 날도 있었지만, 눈을 맞추고 민주를 보고 방긋 웃어주는 모습은 하늘의 천사도 따라 올수 없을만큼 예뻤다.
멈춰버릴것 같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어느덧 수아도 그들의 한 가족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날도 민주는 마지막으로 애들의 잠자리를 봐주고는 모처럼 TV앞에 앉았다.
좀처럼 채널권을 주지않는 태환으로 인해서 자신이 보고 싶은 프로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날이 많았지만 그 날은 샤워를 하러 간 틈을 타서 정규 방송 프로로 채널을 돌릴 수 있었다.
늦은 밤이라 저녁시간대에 방송되는 드라마는 다 끝이 난 뒤였고, 시사 고발 프로그램 외에는 별로 볼것이 없었던 터라 아쉬운대로 그 프로를 보기 위해 리모콘을 바닥에 놓았다.
오랜만에 책을 읽을 욕심에 귀만 열어 둔 채로 눈은 책을 향했다.
단조로운 아나운서의 목소리 끝에 얼핏 들린 유아 성추행이라는 말에 민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브라운관을 응시했다.
남루한 차림에 머리까지 점퍼를 뒤집어 쓴 남자가 경찰의 손에 이끌려 나오더니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모자이크 처리가 된 아이와 부모의 모습..
머리가 어지럽다..
저 인간이 과연 자기가 저 아이에게 한 짓이 일생을 살아가며 어떤 공포를 갖고 살게 될지,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
민주는 묘하게도 그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왜 얼굴을 가리는지 묻고 싶었다.
뭐가 부끄럽고 왜 부끄러워하는지 화면을 어지럽게 채우고 있는 그에게 물어 보고싶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는거야?"
어느 틈엔가 태환이 비누 냄새를 풍기며 방으로 들어서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런 인간들은 절대 용서 하면 안돼.. 절대.."
무슨일이건 냉정을 잃지 않는 민주의 모습은 이미 거기 없다.
뚫어져라 화면을 응시하며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는 주위의 모든걸 얼어붙게 만들것 같다.
"너는 남의 불행을 보면서 그렇게 즐기고 싶냐?
무슨 프로를 봐도 3류 소설같은 드라마 아니면 꼭 남이 잘 안되는 저런 프로나 보고..
난 맘이 아파서 저런건 보기 싫어. 넌 안그렇지. 말만 안됐다 그러면서 속으론 나는 저렇지 않으니까 다행이라는 고런 생각들 뿐이지.
니가 저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 하려고나 들면 몰라. 그러지도 못할꺼면서 뭐한다고 저런 프로만 골라 보냐?
저런거 아니면 병원 환자들 나오는 프로..
나는 매일 그런사람들을 직접 보니까 TV에서 그런 환자들 이야기를 그냥 볼거리 정도로 삼아서 다큐멘터리니 뭐니 그런거 만드는거 정말 이해도 안되고 보기도 싫어.
너 정말 병자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르지.. 저런걸 볼거리라고 ..."
태환은 다시 자기가 보던 야구 중계프로로 채널을 돌려 버렸다.
민주는 태환을 노려 본다.
"당신 눈엔 내가 그렇게 한심한 인간으로 밖엔 안 보여?
저런걸 보며 즐기는 그런 인간으로 밖엔 안 보이냐고.."
단순한 채널 다툼이 아니었다. 이불을 그러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환은 그런 민주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의 말투야 항상 그러했었는데 그것이 지금 새삼스럽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뾰족한가? 태환은 잠시 혼돈 스러웠다. 그러다가 한쪽 입꼬리가 씨 익 올라가며 민주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민주는 태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태환이 바짝 다가와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전혀 주제도 파악이 안되는 그런 소리를 하는 동안에도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너.. 또 이렇게 시간 끌려고 그러는 거지..
니가 무슨 갓 시집온 색시도 아니고 애도 둘씩이나 낳은 아줌마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게 많냐. 내숭 떠는 것도 이정도 했으면 귀찮아서라도 그만 하겠구만 너라는 애는 참..지치지도 않는가 보네..
그러고 있어봐야 너만 손해다. 이리와봐 내가 안아 줄테니까.. "
그러고는 민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싫어 . . 손 치워.."
항상 싫다라는 말을 먼저 앞세우는 그녀였다.
거부의 의사 ..
하지만 태환이 원하는 날은 어떤식으로든 묵살당하고 마는 말..
오늘도 그녀는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재밌다는 듯 '어디 또 싫다고 해봐라'
그러고는 민주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그에게 들어야 할 대답이 있는데 그는 이미 다른 일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꼭 그에게 대답을 들어야 겠다.
민주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민주는 순간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했다.
민주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낼때 까지는 불과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싫다고 했잖아. 싫다고 .."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민주의 모습에 태환도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단 한번도 첫마디에 그를 받아들여 준 적이 없는 민주였다.
오늘도 그 일련의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라고만 생각했던 태환은 다시 민주의 조금전 행동이 괴씸하다는 생각에 머리칼이 쭈뼛거리고 섰다.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엉? 나하고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여자가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남자를 흘겨 봐? 니가 아직 잘 모르는가 본데 .. 너처럼 부부간에 잠자리 거부하는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된다는 걸 말이야.. 너처럼 그렇게 하면 남자가 밖에서 바람을 피워도 너는 할 말이 없는거야. 뭘 제대로 알고 지금 니가 나한테 이러는 거냐? .."
태환의 언성도 높아져 있었다. 이미 그들의 대화는 애초의 주제에서 완전히 빗나가 있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전화벨이 울린건 그들이 그렇게 아무말도 않고 서로를 노려본지 2 분 정도가 지나서 였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벨소리에 수아가 뒤척이는 것을 보며 이제껏 몸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풀며 전화기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수민아. 벌써 자는 건 아니지?"
옆집 보미엄마의 목소리였다.
"..아.. 네.. 아직 안자고 있어요... 이렇게 늦게 무슨 일이세요."
"일이 있기는 있지. 한 잔 하는 일.."
그러고는 전화선을 타고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들이 제각기 수민엄마 놀러 오라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여느날 같았으면 자기가 먼저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다음에 불러 달라고 했을 민주였지만 오늘은 '지금 갈께요'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방안에서 대충의 전화 내용을 듣고 있던 태환이 수화기를 내려 놓기 무섭게 한마디 햇다.
"지금이 몇신데 밖에 나가겠다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