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그러고 앉았었는지 잠시 어찔한 눈을 뜨고 민주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나버린 크레파스며 플라스틱 잔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태환을 올려다 봤다.
자신의 행동이 좀 심했다고 생각을 하는건지 태환의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히려 목소리는 더 화가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고함을 질러 댔다.
"넌 항상 그런식이야. 내가 혼을 낼때는 가만있어야 할 것 아냐.
이게 뭐야. 너만 좋은 엄마가 되면 다냐?
저기 바닥이 안보여? 뭘 잘했다고 애 역성을 드는거냐고..."
예전같으면 그냥 듣고 넘길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들어 부쩍 신경질적인 남편을 보면서 가만히 받아 주는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민주의 머리를 스치며 태환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목소리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착한 엄마가 되는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거야.
당신 지금 나한테 화가 난 거잖아. 그럼 내게 말을해, 돌려서 엄한 애들 혼내지 말고,, 물론 수아가 잘못한건 맞지만 당신이 애를 혼내는 방법도 옳은 방법은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자기 기분대로만 행동을 해?
당신이 기분 좋은날은 벽이며 바닥에 황칠을 해놔도 그저 웃으며 허허 거리고,
오늘처럼 자기 맘대로 안되겠다 싶은 날은 저 바닥에 크레파스로 한 두줄 낙서 된게 그렇게 거슬리면, 그렇다고 그렇게 애들을 다그치면 나중에 애들이 어떤게 정말 옳은 행동이고 그른 행동인지 어떻게 중심을 잡겠어.
오늘은 뭐가 또 당신 신경을 건드린건데.."
처음 입을 열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섞여 민주의 목소리도 조금씩 굳어져 가고 있었다.
대화로서 풀겠다는 생각을 접은게 벌써 몇년 전인데 아무 성과도 없는 일을 오늘 다시 재현하고 있다는것에 생각이 미치자 '더 끌지 말자..더 끌지 말자..'라는 마음만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어 그러면 너는 안그러냐? 네 기분 내키는 대로 밤이 늦건 말건 애 공부 시킨다는 핑게로 앉아서 혼내고 다그치고..지칠때 까지 , 알아서 나가 떨어질때까지 그러고 있는거..
지금 시간이 몇시야? 그렇게 아는게 많은 사람이 왜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난다는 그 간단한 진리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니가 의도 하는 바가 뭔지 나도 다 알고 있으니까 이제 엄한 애 잡고 시름하지 말고 그만하지 . 더 끌지 말라고..충분히 알겠으니까.."
'내 의도.. 뭘 알겠다는 거지..'
민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알겠다는 그녀의 의도라는게 어쩌면 너무 힘든 기억 속에서 막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던 그때 그가 품어 줬었어야 할 그녀의 마음의 짐을 의미한다면, 예물시계가 아닌 더한 것을 박살내버렸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언쟁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둘에게 12년이라는 시간은 세인들이 흔히 말하는 약으로써의 기능도 망각제로의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 채로 흘러 가기만 하는 시간들은 둘 사이에 생긴 작고 작은 골을 협곡의 크기 만큼이나 갈라놓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왜 말이 없어?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보지? 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누굴 탓 하겠어. 내가 인덕이 없어서 이러고 사는걸 .. 다 내 죄다."
비틀어 질대로 비틀어진 한마디를 남기고 태환은 대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내가 인덕이 없다는 말..
그래서 이러고 산다는 말..
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지만 민주는 이걸로 끝이 난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정도로 끝이 나지 않았다면 격한 감정에 쌓여 더 심한 말들이 오고 갔을테고 또 다시 서로에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채 상대의 가슴을 베고 상처를 내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고 있던 민주의 시야가 흐려졌다.
적어도 그 앞에서는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다시는 힘들다는 말도 이해를 바라는 말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 어째서 자기가 태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악연 취급을 받아야 하는건지 ..
거실바닥에 엉망으로 깨져버린 크레파스의 잔해를 치우며,
뒤에서 민주의 목을 꼭 끌어 안아 주는 수아의 작은 가슴을 느끼며,
다시 심호흡을 깊이 하고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딸을 보며 웃어 주었다.
괜찮아 질꺼야..
그날 그렇게 집을 나갔던 태환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술이 반쯤 취한 상태로 돌아왔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탓에 한 방을 사용하고 있었던터라 민주는 잠이든 딸아이의 옆에 누워 무거운 집안의 정적을 깨는 시계의 초침소리를 듣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태환이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자리를 여기 저기 훝어보고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아들옆에 비워둔 자기의 자리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이 귀여운 내새끼.."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추던 그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민주도 팽팽하게 당겨졌던 연 실같은 긴장감이 풀어지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아니 빛하나 들지 않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듯 꿈속으로 빠져 들었다.
주위엔 아무 것도 없다.
빛도 하나 없다.
소리도 없다. 무섭다며 고함을 치고 있는데 민주의 목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서 작은 빛..
어려서 부터 아주 익숙한 그 꿈을 그녀는 다시 꾸고 있다.
작은 실타래가 그녀의 눈 앞에서 빛나고 있다.
아니 빛나는게 아니라 실타래가 빛이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구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 손가락 끝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실이 손가락을 감고, 손을 감고, 팔을 감고, 어깨를 감고 ..
어느틈엔가 온몸이 실에 감겨 꼼짝 할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커다란 실패에 그녀가 묶여 있다.
서서히 구르기 시작하는 실패..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자신의 몸이 실패에 깔려 터져 버릴지도 모르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다.
아니 누가 있어도 그녀의 입에선 비명 한마디 나오질 않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린다. 뭔가 아주 신나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듯 그 소리가 너무 경쾌해서 숨이 막힐 것 같다.
누가 웃고 있는거지.. 나 좀,,
땀이 범벅이 된 채로 민주는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 였지만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아직 민주의 몸은 꿈에서 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바닥에 바짝 붙어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주위를 돌아 봤다.
어느 틈엔지 태환이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와 있었으며 옆으로 누워 칼 잠을 자는 그녀의 잠자리는 벽에 바짝 몰려 조금도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궁지로 몰리는 꿈.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꿈.
그건 분명 꿈이었지만 깨고 나서도 그 중압감에 가슴이 답답할 만큼 생생한 고통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른채 골아 떨어진 남편이 지금 그녀 옆에 누워 있다.
몸부림이 심해서 자는 동안에도 몇번씩 잠자리를 봐줘야 하는 애들을 보며 어떻게 된건지 자신의 옆에 뉘였던 수아가 베개도 베지 않고 저 쪽 구석으로 떨어져 잠이 든 걸 보고
수아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때마침 몸을 뒤척이던 태환이 그녀의 팔을 털쳐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민주는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나오고 나서 보니 저기 저 좁은 자리에 어떻게 자기가 누울 자리가 있었나 싶어지는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두 아이의 자리를 봐주고 그녀는 다시 수아 옆에 베개를 가져다가 누웠다.
다시 그 꿈을 꾸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얼마전 부터 시작한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며, 하나도 자신의 손을 떠나지 않은 집안일이며, 내일 또 아침 일찍 나가 봐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항상 끝에와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런 싸움을 되풀이 해야만 하는 민주로서는 1년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