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물 비켜간 9월 초에 영인과 상현의 결혼식이 있었다.눈부신 하얀 웨딩드레스를 차려 입은 영인인 하늘에서 하강한 천사처럼 예뻤다. 시종일관 입이 다물지 못하는 상현씨...회사밖에서는 사장님이라 호칭하지 않지만 전보다 얼굴 보는 일이 잦은 나였지만 타고난 천성인지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형의 결혼으로 상준이 많이 바빠졌다. 회장님이신 아버님은 진즉에 끝낸 후계자 인수를 모두 마치신 상태라 회사에 나오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획실장에서 형대신 사장자리로 올라가게 되는 상준인 거의 쉬는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장 자리엔 형이 올라가니까.......아직 인수인계가 다 끝난건 아니지만 이미 임원회의에서 안건이 통과된 거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바로 인사이동이 있을거라는 얘기가 회사에 돌고 있었다. 상준이 회사일로 바빠 얼굴보기가 힘들어 지면서 나또한 영인이 혼수준비로 늘 영인이와 바쁘게 돌아 다녔다. 어머니를 제치고 날 끌고 다니는 영인이였다. 가을 프로젝트가 이미 끝나 좀 한가하긴 했지만......10월에 잡힌 파리 연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 입사한 후로 첨 생긴 일이라 난 가슴이 뛰고 벅찼다. 될까 말까하는 맘으로 신청을 했는데......의외로 결과가 빨리 나왔다. 내가 상준이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우리 사무실에선 성주정도만 아는것 같은데....아마도 위의 임원진들은 눈치들을 체고 있었나 보다. 첨엔 그점이 좀 맘에 걸렸는데......영인이와 성주가 어차피 위로 올라서는 고속승진이 약속 되어져 있는데......벌써 부터 맘 다치면 어쩔꺼냐는 걱정에 아무런 소리를 못하고 있는 요즘이다. 암튼 낙하산 인사이동이든 정석되로든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거짓없이 실력을 보여주면 되겠지 하는 좀은 안일한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다른 말이 없기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저녁에 간간히 부는 바람으로 팔위에 소소히 돋는 소름에 대비하기 위해 마로된 가디건을 가지고 다녔다. 은보라색의 가디건인데 상준이 전에 영국에 다녀오면서 사다준 선물이였다. 한달에 거의 보름은 외국 출장이 잦은 상준인 나갔다 올때 마다 내게 선물을 안겨다 준다. 성주가 화장품이나 향수종류를 선물하는 대신 상준인 마치 내 머리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마냥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내게 꼭 필요한 선물을 그때그때 마다 가져다 주었다. 상준이 내게 건네는 선물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게 그 나라으 특색을 담은 엽서 였다. 흔히들 볼수 있는 나라마다의 유명한 건물 그림이 그져진 엽서가 아니라 그 나라 사람 개개인이 직접 그린 삽화나 풍물,풍경 그림들.......냉장고나 유리벽에 겔러리 처럼 전시해놓고 보면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마치 그 그림속으로 빠져 들어가 걷고 있는 듯한 기분......뭐 받고 싶은 선물 없냐고 했을때 주저않고 말한게 엽서 였다. 상준인 그런 내 대답에 아무말 없이 피식 웃었다. 정말 아무런 욕심없고 꾸밈이 없는 이여경 답다는 말......상준이 날 보며 가끔 말했다.
너무 투명해서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물 같은 느낌인데.......그 물속에 담겨져 있는게 없어....보고 싶어도 볼수 없는 답답함을 제공하는 텅빈 유리병 같기도 한 사람이 나 같다는 얘길 상준이 했다.텅빈 유리병은 너무 쓸쓸해 보여 가슴이 아프다며 내 안에 행복만 가득 체워주고 싶다는 상준이........예쁘고 좋은것만 가득 넣어서 볼때 마다 같이 행복해 지는 그런 기분은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텅빈 유리병......속이 환히 보이는 유리병.......가끔씩 혼자서 되내여 보곤 하는 말이였다.투명한 유리병이라 안에 무언가를 담으면 그때부터 더이상 숨을 곳도 숨겨지지도 않은 존재감......상준인 날 알고 싶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걸 거다.예전에 얼음공주라고 하더니....얼음처럼 유리병은 차갑지 않으니 많이 나아진건가......?조금은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길렀던 머릴 조금 잘랐다. 어깨선에서 가지런하게 다듬었다. 숱은 작지만 머리올은 굵은 편에 속해 머리숱이 많아 보이는 머리였다. 들뜨거나 곱슬거리지도 않는 생머리다. 곱슬기에 올이 얇아 정전기 자주 일어난다며 영인이 자기 머리카락과 내 머리카락이 바귀였으면 좋겠다 늘 푸념이였다.미용실에서 나와 이른 저녁을 먹었다. 오늘 귀국한다던 상준이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는 일이........참 힘들었다. 예전에 어떻게 5년 가까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렸는지......이해가 안가는 요즘이였다. 친구도 자주 만나야 얘기거리가 많아진다더니.....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쉽게 수긍이 가는 요즘이였다.
들어오는 길에 동네 어귀에 새로 생긴 허브샵에서 초록빛이 나는 샤워 비누을 하나 샀다. 초록의 색을 옷으로 입고 있지만.....투명함이 깃든 초록이라 보고 있음 눈이 맑아지는것 같았다.해초향이 나는 비누였다.세개가 셋트라며 권하는 직원에게 고개짓을 해보였다. 예전과 달리 요즘엔 어느정도 생활의 여유가 많아졌지만....예전의 습관이 쉽게 지워지지 않아 난 새로운 물건을 살때 마다 몇번씩 망설이며 생각을 많이 했다. 정말 필요한거 아니면 쉽게 손이 나가지 않은.....나였다.
일이 바빠 늦게 시간이 나는 상준인 주로 내 원룸에서 만나는데.....여름내내 에어컨과 침대를 바꾸자며 날 꼬드겼다. 좀더 넓은 평수로 이사를 가던가.......욕조가 딸린 곳으로 옮기자는 말을 자주 했었다.좁은 내 원룸에 상준인 대놓고 불평은 안했지만.......많이 불편해 하는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쉽게 옮겨지지가 않고.....갑자기 쉽게 쉽게 변해가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별나고 모난 티를 낸다며 성주가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껴 입는것 같은 이질감에 난 여직 제자리에서 맴만 돌고 있었다.그런데 오늘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는데........샤워부스조차 없이 흰 타일벽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샤워기.......상반신이 체 보여지지도 않은 작은거울.......수건과 목욕용품을 넣어두는 물빛의 페인트가 칠해진 수납장.......괜히 가슴이 철렁해지는 기분이였다. 예쁜 비누에 맘이 들떠 있었는데......이런게 수준차 일까....?왜 자꾸 가슴이 먹먹해 오는건지.....청승을 떨구고 있는 내가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이 작은 거울에 담겨져 있었다. 지금것 바쁘게 사느라 몰랐던 생활의 때가 하나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하와이 출장 가기전 저녁이였다. 첨엔 혼자 계시는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본가로 신접살림을 차리려고 했던 영인이였는데 아버님이 회장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여행을 다니시겠다며 영국에 있는 별장에 몇년 머무르 겠다며 신혼생활을 즐기라고 해서 덩치가 큰 본가를 외국에서 파견나와 있는 영국인 영사관에게 임대하고 따로 빌라를 얻어 나왔다. 50평의 빌라를 이층 복합구조로 쓰는데 거의 한달을 따라 다니며 가구며 인테리어를 봐주었다. 상준이도 가끔 같이 들렀다. 거의 마무리가다 되어진 집을 보고 온 저녁이였다. 저녁은 영인이네와 같이 밖에서 먹고 들어왔다. 사온 메론를 갂아 접시에 담는 날 보며 상준이 말했다.
"영인이가 준비한 그릇들 말야......네가 골랐다며......맘에 들면 너도 몇가지 들여 놓지 그래...?"
아마도 가볍게 물어온 것이리라.........
영인이 들여논 접시셋트는 영국에서 들여온 거였다. 국내엔 아직 시판되어 나와 있는 메이커가 아니였다. 인터넷으로 영국의 쇼핑몰에 들어가 본거였는데.....핸드메이드 라서 인지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프로방스풍의 풍경들이 그려진 세밀화 였는데 보는 순간 맘을 빼앗겼다. 진짜 넘 이쁘다.....이런 그릇에 담긴 요리를 생각하는 것만 해도 행복해 질것 같다는 내 말에 영인이 바로 주문한 그릇셋트 였다. 내가 올때마다 그 릇에다 요릴 담아 줄거라며....자주 오라는 영인이 이였다. 그걸 상준이 어떻게 알았는지.....내게 그렇게 말한거였다. 내 한달치 월급으로도 반도 못미치는 그릇이였다.
"네가 좋아하는 풍경그림이던데......영국에 가게되면 사다줄까....?"
"됐어....나중에 우리쪽으로 들여오면 그때 가서 사게 되면 살께......대량으로 들여오면 가격이 낮아 질꺼잖아...."
"들어오게될 확률이 거의 없을것 같은데.........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도자기 장인집안 같은데.....대량으로 판매 되진 않을 거야......넌 가만보면 안목이 참 높아.......타고난 센스감각인가....?영인이 널 왜 쇼핑도우미로 끌고 다니는지 수긍이 쉽게 가....."
"분수도 모르고 눈만 높은거지.....예전에 울 엄마가 나보고 그러더라.....허영덩어리라고.....나도 그런것 같아.....가진건 쥐뿔도 없으면서 눈은 턱없이 높아서....사는게 지옥처럼 느껴질거라구.....맞는 말인것 같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것 아냐.....신데렐라가 될 운명을 타고난 건가보지...."
내게 시선 돌리며 쿡쿡 거리며 웃는 상준이였다. 가재미 눈으로 쏘다가 나도 따라 피식 웃었다. 정말 그런걸까.....?집에 들어가기가 힘든 시간에 근처에 있는 백화점의 인테리어 용품들을 아이쇼핑 하면서 맘을 가라안혔던.......10대의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괜히 씁쓸해 지는 기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