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바늘이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몇시간을 비디오와 책을 봤더니 눈이 뻑뻑했다.
안과에서 안구건조증이 있다는 얘길 듣고 약을 처방 받았다.
눈물약.......눈의 뻑뻑함을 없애기 위해서 가끔 눈이 아파오면 넣곤 했는데.....백을 뒤졌는데 약이 없다.
요즘 야근을 안하려고 집에가서 일을 하곤 했는데......아마도 책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야근을 하지 않으려고.....집에까지 일을 가져가서 한 이유.....진우 때문이다.
혹시 퇴근후에 만나자는 전화가 오지 않을까 싶어.....야근을 할 수가 없기에......집에가서 일을 다 마무리 짓곤 했었다.
그런 내 바램이 모두 헛 수고로 돌아 갔다.
진짜......서운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거.......그게 일방적 일땐 정말 피곤하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늘 생각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그런 나날......
신경이 피페해져 가는 기분.....
몸도 맘도 모두 상해져 갔다.
전화기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내 자신이 한심해 질 정도로.....
더구나 내 앞엔 늘 일이 있는데.....
어느것 하나 집중을 하지 못하는 내가 ......화가 났다.
뚜렷한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이 있음.....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신경이 날 이렇게 극한 막다름에 까지 몰고 가지만.....돌파구를 찾을 수 없어 ....속이 미식거릴 정도로 ......피곤했다.
자괴감......스스로의 한계을 너무도 빨리 느껴버리는 ......그래서 화나고 속상하다.
내가 이정도 뿐이 안되는 인간인가.......
눈에 잡히는 증거가 없음 아무것도 못할 만큼......결벽증은 아닌것 같은데......암튼 요즘은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 내가 마치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력자가 된것만 같다.
절망감에 비참함 까지......스스로 만든 덫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치면......상처만 더 커지는 그런 아픔은 느끼지 못하고.......차라리 잡혀 있는 부분이 끊어 버려지는게 더 속 편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한동안 ......상실감만 생각할 수 있으니......정신은 좀 나아지겠지......싶었다.
빌딩 관리실에서 인터폰이 있었다.
언제쯤 나올거냐는.....
야근은 늘 있던 일이지만.......자정을 기점으로 해서 관리실에 알려야 했다.
당직자을 제외한 남아있는 숫자가 몇인지 알고 있어야 하니까.....
이젠 나갈 거라는 얘길 했다.
더는 눈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할것 같았다.
거의 5시간 가까이 붙잡고 있었지만......건진건 아무것도 없다.
눈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었으니......결국 난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비틀거리는건 내 몸이 아니라 정신 이겠지......
연거푸 마셨던 커피 탓에.....속이 까끄럽고.....아픈것 같았다.
위와 폐안에 원두커피의 찌꺼기가 가득 쌓여 있는 느낌이였다.
저녁도 안먹고.....계속 커필 마셔 댔더니.......그래서 시장함을 못 느꼈겠지.....하지만......위에서 쓴물이 올라올것만 같았다.
전철 끊기기 몇분전 이라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엘리베이터안은.......좀 무섭다.
전엔 이런 느낌 없었는데......갑자기 혼자가 되니까......무섭다.
요즘 엘리베이터 안에서 강도사건이 속출한다고 하던데.....거의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왜이리 내려가는 속도감이 더딘건지.......초조했다.
무사히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순간 후련해지는 기분은......?
서둘러서 빌딩에서 나왔다.
비어져 있는 안내 데스크를 보면서.....회전문을 통과했다.
밖의 날씬....청명했다.
파란 하늘이 아닌 깜깜한 하늘이지만.......바람이 살짝씩 부는게......기분이 좋았다.
매연이 바닥으로 많이 깔려 있겠지만......갑자기 심호흡이 하고 싶어 팔을 들려 호흡을 들이 마셨다가 뱉어냈다.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것 같았다.
회사가 매연가득한 도심이 아니라 한적한 산속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빵빵....."
뒤쪽에서 클랙숀 소리가 들렸다.
차로변도 아닌데.......것도 여긴 회사앞 인도인데......
대체 누구야.......도로 규정도 모르나......
비켜서며 돌아다 봤다.
나를 향해 .....기막히게도 쌍라이트를 비추고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뭐 저런사람이 다 있어......?
욕이 절로 나오려 했다.
눈이 부셔 인상을 쓰는데 차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불 빛 옆으로 비켜 섰다.
"지금 나오는 거야....?"
세상에.......진우였다.
타이가 약간 느슨하게 풀어진.......
아마도 너무 놀라서 내 입이 벌어졌을꺼다.....
바쁘다고 해 놓고선.....
"타.....피곤할거 아냐.....데려다 줄께...."
멍하게 서있는 내쪽으로 걸어와서 날 차에 태웠다.
가슴이 심하게 콩딱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일이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면 안된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내가 애태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고작 내가 한다는 방어는 입술만 아프게 물고 있는 거였다.
차안엔 안드레 가뇽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아늑한 느낌.......차위로 빗방울 이라도 떨어지고 있는 느낌.....
밖의 날씬 맑은데......눈 감고 있음 음악에 심취해 마치 창밖에 가는 비가 오고 있는 기분이다.
차안의 체감온도도......차다는 느낌 보다는 딱 느끼기 좋다는 온도이다.
피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아로마 향.......그랬다.
은은하게 퍼져 있는 페파민트 향.
내가 좋아하는 향이다.
"어떻게 된거야.....?바쁘다더니....."
"11시쯤엔 끝난다고 했잖아.......집에도 서경이도 .....그래서 혹시 해서 와 봤지......용케 시간 맞춘게 다행이지.......온지 얼마 안됬거든...."
".......못 만날수도 있었을 텐데......여기서 기다린거야....?"
"여기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어렵지 않지 네 행동 반경......내 손바닥 안이지..ㅋㅋㅋㅋ"
"......너무 오만하군......좋지 않은 기분이야...."
여전히 날 보며 큭큭 거리는 진우다.
행동반경이 짧은 내 탓이겠지......
손 쉽게 잡히는 내가......약이 올랐다.
집 쪽으로 차을 몰았다.
회사와 집이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라......오늘따라 많이 아쉬웠다.
한시간 정도의 거리라면.....얼마나 좋을까.....
"저녁은 먹었어.....?난 간식만 먹었는데......"
"......나도.....근데 먹을 만한 데가 없지 않을까.....?지금 시간은......"
"거리의 포장마차가 있잖아.......거기 우동이 맛있잖아.....잠깐 들렀다 갈까....?"
".....좋아...."
사실....지금 속도 않좋은데.....고추가루를 풀은 우동은 ......당기지가 않았다.
하지만.....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따라갔다.
유부우동을 시키면서 고추가루는 빼달라고 했다.
차을 가져 왔기에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냥 깔끔하게 우동만 시켰다.
양이 작아......진우는 네번에 끝을 냈다.
난 좀 먹는데 신경쓰느라 시간이 걸렸다.
옆에서 다먹고 날 물끄러미 보는 진우의 시선 탓에 더 시간이 더디게 걸렸다.
"이빨이 틀니야....?먹는 속도가 너무 느려....?"
갑자기 진우가 던진 말이다.
넵킨으로 입을 딱으면서......
무슨소리냐는 내말에 진우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옆자리의 사람들도 있는데.....
"같이 있는 시간이 줄고 있잖아......빨리좀 먹어.....나가게..."
더는 먹을 수가 없지.....
더구나 사실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에.....
내 옆의 여자둘이 웃었다.
눈치 안체게 웃었지만......저 웃음의 주인공이 나라는걸 알수 있었다.
무안해진 난 진울 한 번 째리고는 일어났다.
반도 못 비우고.....
더 먹지 그러냐는 소리도 없이 계산을 꺼낸 진우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기분이......정말.....욱했다.
어디가서 뽑아온 커피인지 자판기 컵을 내게 내밀었다.
오늘 커핀 .......더는 아니였다.
고갤 흔드는 날 보더니.....자기 컵에 다 붓고는 컵을 겹쳤다.
커피 향이 좋았다.
집 골목 쪽의 공원 옆에 차를 잠시 주차 시켰다.
에프엠에서......이선희의 알고 싶어요가 나오고 있었다.
사춘기 소녀가 사랑을 시작할때 쯤에 가지는 감정......어설프고 .....좀은 유치한.....
밤늦게 전화해도 내 전화가 반갑나요........그런 가사가 나오고 있었다.
웬지 유치하다는 생각보단......절절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 좀 바봐......얼굴좀 보자...."
앞을 주시하고 있는 내게 진우가 그렇게 말했다.
노래에서 빠져나오며 진울 돌아다 봤다.
한참을 .....말없이 내얼굴만 보고 있더니......갑자기 피식 웃었다.
순간 당황이 되었다.
저 웃음의 의민......?
"그래로네......."
"뭐가.....?"
"내가 늘 그리는 얼굴 그대로 라구......아주 예쁘고.....아주 귀엽고.....무지 사랑스럽고.....그러면서 섹시하고......내맘에 너무나 꼭든 얼굴 그대로 라구...."
".....뭐.......?"
기막혀서........하지만......자꾸 뜨거워 지는 건 왜지.....?
쿨해서 이런 말은 절대 못할 것 같은 사람인데......
평소 느끼하다고 생각되어져 왔던 모든 단어들인데......왜 하나도 버터 냄새가 나지 않는걸까......?
오히려 깨끗한 유리그릇에 맑은 샘물이 통통 떨어지는 느낌....?
표현이 너무 과한건가....ㅋㅋ
암튼.....단어 하나하나가.....목소리 한땀 한땀이 가슴에 콕콕 새겨지는 기분이였다.
그러면서 얼굴이 당겨졌다.
아까 마셨던 커피향이 코 끝에 느껴졌다.
에고이스트의 미미한 향도......
내 머리와 등에 들러져 있는 양팔.......
포근하고.....아늑한 느낌......기분이 좋았다.
곧이서 내려온 입술......방금전 까진 이마에 닿았던 입술인데......촉촉함이 느껴져서 기분이 정말 좋았다.
딥키스는 아니고 그저 입만 살짝 데고 있다가 떼었다.
많이 아쉬웠다.
깊게 들어오길 바랬는데......이미 준비 만땅 이였는데......그냥 떨어져 나가니 갑자기 입술이 옷이라도 입고 있었던듯......한기가 느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자제해야지......이젠 그만 들어가봐.....너무 늦었어......지금도 많이 늦었긴 하지만...."
".......아직.....좀더 있었도 괜찮아......어차피 야근한다고 전화 했는데....뭐..."
"안돼.....계속 같이 있음 점점 더 헤어지기 힘들어........더구나 난 너만 보면 정신 못차리는 십대의 혈기왕성한 남자.....아니 짐승에 가깝다고 해야지......요즘 계속 일이 많아 체력관리 해야해.......너 만나면 너도 피곤하지만......나도 상당히 많이 지쳐......무슨 뜻인지 알지...?"
".......모르겠는데....."
"과도한 성생활.......너 매번 지치잖아...."
"......한번에 그렇게 많이 하니까.......그런거잖아......."
"자주 만날수가 없으니까.......콘트롤이 안되는걸 어떡하냐 그럼........"
멋적고 어색한 침묵.......
그럼 자주 만나면 되지......라는 말이 내 속에 있었지만......입 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정말 지금보니.....일이 많은지......피곤한 얼굴이였다.
"낮에 내 전화 받고.......되게 보고 싶었어......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매초 바뀌는 전광판을 뚫어져라 봤는데....그 모니터 화면 가득 너만 보이는 거야......미칠것 같더라....도저히 얼굴 보지 않고는 못 배길것 같아......보러 온거야......"
아마도 난 배시시 웃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회사에서 일하는 중간엔 앞으로 전화 하지마.......아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바빠서 만나기가 쉽지 않을거야.......전환 내가 할께.....내쪽에서 할테니까......전화 주지마....알았지.....?"
갑자기......상승했던 기온이 냉각기를 맞은 것처럼 하락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소린가.......?
'일하는데 상당한 지장이 되거든.......참을 수 있지 ? 나보고 싶어도......당분간만 참아......나중에 시간나면 그때 한꺼번에 예뻐해 줄테니까....."
"뭐야 지금.....?삐진 어린애 한테 사탕 주듯이......기분나빠...."
홧김에 문을 열고 나왔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냥 좋은 말로 해도 알아 들을텐데......
마치 성가신 여자가 된것만 같은 기분......
속된 말로 기분 더러웠다.
그냥 전화로 해도 될말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게 하다니.......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잠깐 서봐.....왜그래 ?화났어....?"
뒤 따라 오면서 팔을 잡았다.
화가 나서 걸음을 빨리 하고 걷고 있었지만.....금방 잡혔다.
"내 말이 기분 나쁜거야....?"
"....그런 말은 전화로 해도 됐어.....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었다구......"
"보고 싶어서 왔다구 했잖아.......진짜 만나고 싶었어.....몰라...?"
"......알았어.....무슨 얘긴지 알았으니까.....가봐.....너무 늦었어 ......"
".......이러고 들어가면.......내 속이 편할것 같아.......화 풀고 가..."
"화 안났어......그냥 좀.....서운했을 뿐야....."
"뭐가......?"
"앞으로 자주 보지 못한다는 말.......오늘도 아주 오랫만에 보는 거잖아.......그래서 그래....."
내안의 가득찬 감정을 최대한 죽이며 난 그렇게 말했다.
사실 하고 싶은말은 따로 많이 있었지만.......공기가 어색해질까봐......안으로만 숨기고 있었다.
갑자기 진우가 팔을 뻗어 날 가슴에 당겨 안았다.
"내 마음이 일방적인게 아니라는 생각 맞는 거지......?너도 내가 좋은거지.....그렇다고 말해줘.....그럼 풀어 줄께...."
"............"
"......그렇지 않다는 거야....?"
갑자기 팔을 떼려고 해서 내가 팔을 둘러 진울 안았다.
놀란듯한 얼굴.......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대답 안하면 정말 안풀어 줄거야...?"
".......?"
"그럼 계속 이러고 있자......난 대답안할 거야......."
"뭐.....?"
"이러니까......정말 좋거든...ㅋㅋㅋㅋ"
"뭐라구.....이 밝힘녀......"
아씨......밝힘녀 라니......
어찌 나처럼 이쁘고......가녀린 여자에게 그런 속된 말을 던지다니.....
아.....내가 얼마나 맘이 예민하고 여린데......
그러면서도 웃음이 계속 나왔다.
별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새벽녘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