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공항에 도착한 미연은 적어온 번호로 전화를 하였다.
"여보세요"하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가 김고수 학생이 사는 곳이 맞나요?"
"예."
"고수 좀 바꿔주시겠어요?"
"집에 없는데요, 누구라고 전해줄까요?"
"저는...고수 데리러 한국에서 왔어요."
"그럼 이리로 오세요. 주소는 갖고 계시나요?"
"예, 가지고 있어요. 지금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미연은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린 후에 택시는 어느 조용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번지수를 찾아 동네안을 헤메던 택시운전사는 마침내 이층집앞에 차를 세우고 손으로 가르켰다.
미연은 차에서 내려 그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나이먹은 여인이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보는데, 몹시도 초췌한 모습이었다.
미연이 서있는 것을 보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고수 가족되시나요?"하고 여인이 묻는다.
"전...고수하고 친한 누나예요.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데리러 왔어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병원에 갔나요?"
"병원에서 퇴원한지는 한 이주일 되었어요. 한국에 돌아가래도 안가고는..."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하고 미연이 물었다.
여인은 목이 갈라진 소리로 "우리 애들 있는 곳에 있을거예요."한다.
미연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고 "어디요?"하고 다시 물었다.
그 여인은 "지금 고수 만나시려면 이곳으로 가보세요."하며 팜플렛을 한장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바깥을 내다보고 "저 택시 떠나기 전에 얼른 타셔야겠어요."한다.
미연은 "고맙습니다."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 그 집에서 나와 돌아서가려는 택시를 다시 잡아탔다.
미연은 차안에 앉아 그 여인이 건네준 팜플렛을 보았다.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사진위로 Memorial Park(공원묘지)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다.
미연은 그제서야 이곳이 그 죽은 남매의 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여인은 그 남매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30여분을 달려가 고수가 있다는 곳으로 가보니 그림처럼 아름다운 하얀 건물이 서있고 그 뒤로는 푸르른 잔디가 언덕너머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미연은 차에서 내려 공원묘지의 본관인 그 흰 건물을 통과하여 뒤쪽으로 나갔다.
방금 심은듯한 싱그러운 형형색색의 꽃들이 넓다란 붉은 벽돌길을 따라 예쁘게 피어있었다.
곳곳의 갈림길마다 세워진 표지판의 번호를 확인해가며 팜플렛에 표시되어 있는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짧은 계단을 여러번 거친 후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보니 멀찌감치 한 남자가 묘비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따가운 한여름 햇살을 등에 가득 실은채 두 무릎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고수...?'
미연이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
고수는 머리를 들어 미연을 보았다.
1년 반만에 본 고수의 얼굴은 전보다 검게 그을고 여위어보였다.
'아...'하고 놀라는 그의 표정이 이내 우울한 것으로 바뀌었다.
"누나... 보고싶었어...." 하며 눈길을 자신의 발끝으로 돌린다.
미연은 고수에게 "집에 가자."하고 말하였다.
고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고수의 오른 손목에는 하얀 석고틀이 붙어있었다.
"손...다쳤니?"
"......"
"아프지 않아...?"
고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미연은 고수의 다친 손을 두손으로 잡고 훑어보았다.
"다른데....다친데는 없고?"
".....다 나았어."
"왜 집에 연락도 안했어? 퇴원하고 집으로 안오고 왜 여기 있었어?"
고수는 아무 대답도 없이 땅만 내려다보고 있다.
한참을 시무룩하게 있더니 고수가 마침내 입을 연다.
"누나....나 여기와서 배운게 있어."
"......"
"어리석은 생각이 어리석을 일을 빚어낸다는 거...."
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수를 억지로 유학을 보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고수는 울음섞인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해가며 말을 한다.
"나...여기 맨날 앉아서 생각했어.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내가 조금만 더 일찍 가게로 갔더라면 그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아니면... 그날 채석이랑 시간을 바꾸지 말았어야 했는지....아니면... 더 전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어서라도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을가...도대체 어디로... 어디로 가야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고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그 집에 가지 말았어야했어...채석이 집으로 들어가지를 말았어야 했어...."하며 자신을 책망하였다.
"누나 미안해... 내가... 약속을... 못지켜서 미안해...꼭...돌아가서...누나랑 결혼하려고 했는데..."
고수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나랑 같이 돌아가서...그렇게 하면 되잖아..."
고수는 미연의 눈길을 피해 멀리 시선을 옮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난...난...못 갈거 같아. 나... 여기...채영이...이렇게 두고 못갈 거 같아..."
그렇게 말하고 고수는 흐느껴 울었다.
미연은 고수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수의 흐느낌에 그동안 겪었을 아픔이 실려와 미연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연은 눈물이 고여 아른 거리는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한점 없는 파란 하늘에 반짝이는 점하나가 하얀 비단길을 뒤로 남기며 사라져갔다.
미연은 고수를 일으켜 그의 눈물어린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어 고수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너의 아내...네 가슴에 깊이 담아서 함께 데리고 가자..."
고수와 미연은 채영과 채석의 묘앞에서 절을 하였다.
고수는 마음속으로 '잘있어 채석아, 잘있어 채영아'하고 인사를 하였다.
두 사람든 채석의 집으로 돌아와 짐가방을 챙겼다.
다 챙긴 가방을 방문앞에 놓더니 고수는 채영의 방으로 들어간다.
채영의 책상에 앉아 책상위에 놓여있는 앨범을 펼쳤다.
맨 첫장에 고수와의 결혼 증명서가 깔끔하게 펼쳐져있다.
그리고 결혼식때 채석이 찍어준 사진들과 바닷가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이 앨범은 채영에게 평생을 보물로 간직해둘 그런 소중한 물건이었다.
고수는 예쁘게 활짝 웃고 있는 채영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앨범을 접어 가슴에 안고 방에서 나온다.
'나와 함께 가자. 내 마음 속에서 넌 영원히 나의 아내로 살게 될거야, 채영아.'
고수는 방에서 내려와 채석의 부모가 앉아 있는 응접실로 오더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고 절을 하였다.
목이 메어 "어머니, 아버지...안녕히... 계세요."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채석의 부모님들은 "그래, 어서 가거라."하며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그날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영준은 장미를 만나고 난 후 차를 타고 어머니의 묘지를 찾아갔다.
묘앞에 앉아 죽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엄마, 엄마도 미연씨가 맘에 들었어요? 엄마는 왜 아무것도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왜 한번도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어요?"
영준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늘 차가왔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다른 엄마들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저녁시간을 밖에서 보내곤 했다.
그러자 나이 많은 누이도 집에 정을 못붙여 바깥으로 나돌았고 영준은 어린 나이때부터 늘 텅빈 집에서 외롭게 지냈다.
그렇게 자기에게 무심했던 어머니를 원망하며 살아온 지난 시절을 되새겨보니 어머니를 너무 몰랐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스스로 관리할 줄 몰라 늘 마음만 불안했던 어머니.
그래서 혹시 누가 자기를 해칠까봐 조바심이 나서 남들에게 더욱 인색했던 그런 어머니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애정에 굶주려 자기보다도 더 외롭게 자랐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반가왔으면 그 많은 재산의 거의 다를 장미에게 남겨주었을까.
진작에 결혼을 해서 손주들을 품에 안겨주었으면 좀 더 행복하게 살다 가셨을텐데.
"엄마...고마와요. 장미에게 많은 걸 남겨줘서요. 미연씨에게도 잘해줘서...고마와요. 미연씨는...정말... 좋은 여자예요....엄마도 느끼셨죠? 그래요...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런 여자예요...그런데, 엄마는 믿어요? 미연씨가 내게 돌아올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어요?"
영준은 그녀를 기다리는 일은 이미 포기하였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런 자신을 꾸짖듯 유언을 남긴 것이다.
"....그럼 나도 엄마처럼 믿어볼께요. 안올 것 같지만...엄마 뜻대로 믿어볼께요...."
서쪽하늘로 해가 기울며 하늘을 온통 빨갛게 물들어 갔다.
노을의 장관을 바라보던 영준은 작은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런데...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미연씨가 제게 오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해요?...그럼...엄마 곁으로 올까요?"
영준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묘지를 떠났다.
선아와 결혼식을 하기로 한 전날밤 영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선아야, 그 결혼식...취소해야겠다."
"안돼요! 오빠, 어디야? 거기 어디야? 나랑 만나서 얘기해. 오빠!"
- "......"
"오빠, 말 좀 해봐. 왜 그래요? 왜...?"
- "......"
"난 오빠 기다릴거야, 꼭 와야돼, 난 결혼식 꼭 할거야."
선아는 울부짖었다.
영준은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선아는 영준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이미 그의 핸드폰은 꺼진 상태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선아의 어머니를 비롯한 몇명의 가족들은 약속장소에서 영준과 그의 가족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20분, 30분...
영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선아가 영준이 자신의 삼촌뻘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