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한파의 가장 큰 희생이 된 산업은 건설업이었다.
건설업체의 99%가 도산을 하였다.
고수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건축하청도 더 이상은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거래하던 대구 건설회사도 이미 문을 닫았고 어디서도 건축 주문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고수의 부모는 큰아들을 유학보내놓고는 1년도 채 못되어 더이상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줄 수가 없게 되었다.
고수는 공부를 하다말고 중도에 포기해야할 위기에 놓였다.
고수 뿐 아니라 당시 유학을 갔던 많은 유학생들이 비슷한 일을 겪고 있었다.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학생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하던 공부를 끝내려고 남아있는 학생도 많았다.
당장 대학교에 등록할 돈이 없어 많은 수의 학생들이 조그마한 어학원으로 학적을 옮겼다.
그러면서 돈벌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단 생활비라도 벌어 버텨본 후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편입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고수도 그랬다.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하였지만 미연에게 약속한 것을 꼭 지키고 싶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해내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더우기 동생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기도 하였다.
"형, 돌아오지 마. 지금 와봤자 어디 취직도 못해. 형 다니던 회사 있지? 거기도 망했어. 지금 완전히 엉망진창이야. 거기서 버틸 때까지 버텨봐. 차라리 거기서 영어라도 배우고 있으면 낫잖아, 여기와서 백수생활 하느니..."
동생은 지방대를 졸업하고 취직이 안 되어 집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가서 직장도 못구하게 되면 미연과의 결혼도 묘연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지만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이번 학기는 이미 등록을 해서 어떻게든 계속 다닐 수 있었지만 다음 학기부터는 어떻게 해야할지 정말 막막했다.
고수가 입학한 학교는 등록금이 아주 비싼 사립대학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학비가 싼 공립으로 옮기고 싶었다.
고수는 우선 생활비를 줄일대로 줄이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친구집으로 들어가서 머물며 집세를 아끼기로 했다.
그 친구는 양채석이라는 고교 동창이었다.
전에 한국에 나와 함께 놀러다니던 그 친구였다.
그는 고수가 어려운 처지라는 것을 듣고는 서슴치 않고 자기집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채석은 아직도 대학생이었다.
처음에 미국에 이민와서는 영어실력이 너무 딸려 대학을 갈 수가 없었다.
대학에 갈 필요도 별로 느끼지 못하여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며 지내다 보니 미국에서도 대학을 나오지 않고는 괜찮은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늦게나마 주립대학에 입학한 것이었다.
채석이 사는 집은 커다란 2층 집이었다.
집앞에는 잔디가 산뜻하게 잘 깎여 있었고 뒷뜰 정원에 큰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와, 집이 무지 크네? 방이 몇 개야?"
"방은 네개고 화장실이 세개다."
고수는 '굉장히 잘 사나보다...'하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니 넓은 집안에 가구라고는 낡은 식탁하고 소파 뿐이었다.
채석은 윗층 구석의 텅 빈 방으로 안내하며 그 방을 쓰라고 하였다.
고수는 차에 싣고 온 침낭과 옷가방, 그리고 노트북을 꺼내 올려다 놓았다.
"그게 다냐?"
"그렇지, 더 뭐가 필요해?"
"일단 씻고나서 밥먹자."
"부모님들은 어디계셔? 인사드려야지."
"이따 늦게나 들어오시는 걸."
"두분 다?"
"우리 엄마는 한 7시면 먼저 들어오실거야."
"그럼 기다리자. 인사 드리고 그때 같이 저녁먹지 뭐."
"그럴래?"
고수는 2층 목욕탕에 들어가 샤워를 하였다.
씻고 나니 얼굴이 뽀얗게 반짝여 잘생긴 얼굴에 빛이났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데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자였다.
긴 머리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젊은 여자였는데 가슴이 풍만하고 키가 늘씬하였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오다 계단에서 처음보는 남자가 걸어내려오는 것을 보더니 놀라 쳐다보았다.
"채영이 왔냐?"하고 부엌쪽에서 채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채영아, 오빠 친구야. 인사해."
채영은 계단을 내려와 자기 앞에 선 고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채석이 동생이야? 어릴 때 본 적 있었던 거 같은데, 무지 컸네?"
"그래, 얘가 걔야. 쪼그맣고 새카맣던 애."
채영은 오빠의 그런 소리에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고수를 계속 쳐다보기만 하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잘 생긴 남자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고수가 자기를 보았다지만 채영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채영아, 우리 저녁 차려놓자. 엄마 오기전에."하고 오빠가 얘기를 해도 계속 고수만 쳐다보았다.
고수는 그녀의 눈길이 민망하여 자리를 피했다.
그제서야 채영은 계단을 올라가 자기방으로 향했다.
고수는 부엌으로 가서 할 일이 없나 찾았다.
"야, 넌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아냐, 내가 쌀 씻을께. 내가 밥하는덴 선수다."
고수는 남의 집이라 이것 저것 열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신세를 지러온 판에 앉아서 얻어먹기가 미안했다.
채석이 알려준대로 쌀을 떠다 씻어 앉히고 반찬거리를 꺼내주는 대로 찌게를 끓이기 시작했다.
채영은 손을 씻고 내려와 일을 거들려다가 고수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것이 신기해 옆에서 구경을 한다.
저녁상을 막 차려놓고 있는데 채석의 어머니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하고 고수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채석이 친구야?"
"네."
"저녁들 먹었어?"
"아뇨, 어머니 기다렸어요."
"어머, 한 상 차려놨네? 금방 내려올께, 먼저들 먹고 있어."
네 사람은 앉아서 저녁을 먹었다.
채석의 어머니는 밥을 먹으며 고수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질문부터가 난처했다.
"어디 살아?"하고 물은 것이었다.
채석이 "당분간 우리집에 있을거야."하고 대신 대답을 하였다.
어머니의 표정이 바뀌었다.
"얼마나?"
"학교 옮기려고 알아보고 있는데요... 옮길 때까지만요..."하고 고수가 적당히 대답을 하였다.
"그래? 그럼 있는 동안 편히 지내."하고 어머니가 말을 했지만 어쩐지 푸근한 느낌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고수는 얼른 일어나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원래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인데다 오랜 자취생활이 몸에 배어 집안일은 뭐든 척척이었다.
채석의 어머니는 만류했지만 고수는 얼른 설겆이를 끝내고 말았다.
그리고는 인사를 꾸벅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채영은 아까 고수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잘 생긴 모습에 반하였지만 그런 싹싹한 모습을 보더니 더 마음이 끌렸다.
채영은 2층으로 올라가 채석의 방안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두사람은 TV를 틀어놓은 채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고수는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일자리부터 빨리 알아봐야 할 거 같아."한다.
채석은 "마땅한 게 있을까 몰라. 여기 신문 광고 좀 보자."하며 교포신문의 구인광고를 들척였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구인란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
"PC방, 노래방, 웨이터, 자동차 세일즈...."
"그런 거 말고는 없냐?"
"여기...프로그래머...웹 디자이너...그런데 이런데는 영주권 있어야 한대."
"꼭 있어야 돼?"
"너 노동 허가증 있니?"
"아니."
"그럼 안되지. 안 뽑을 걸? 영주권 없으면 괜찮은 일자리 얻기 힘들어."
고수는 이곳 사정이 어떤지 잘 알지 못하였다.
자기가 한국에서 유명한 미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이곳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큼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학생에게는 일자리가 별로 주어지지가 않았다.
주어진다해도 규정상 일주일에 20시간 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그 이상은 돈을 벌수가 없었다.
게다가 거기서 세금까지 떼어가기 때문에 겨우 한달 점심값정도 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인업소중에서 일할 곳을 찾기로 했다.
고수같은 유학생이 세금을 피해 현찰을 받아가며 시간 제약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곳은 교포들이 운영하는 소점포들이었다.
"너, 자동차 정비 할 줄 알지? 정비소에서 사람 구하는데는 많네?"
고수는 그거라도 일단 시작하기로 하였다.
광고를 보니 다른 곳보다는 시간당 급료가 조금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에 난 정비소들마다 전화를 해보았다.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쓰고 싶지 않아하는 곳도 많았지만 그 중 한 업소에서 와보라고 하였다.
고수는 그 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6시간씩 일주일에 5일 일하고 시간당 8불을 받기로 했다.
돈은 두주일에 한번씩 준다고 하였다.
그러면 한달이면 약 1000불 가까이 벌 수가 있었다.
그 돈으로 생활비에 학비까지 마련하기엔 전혀 충분한 것이 아니었지만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나은 편이라 기꺼이 시작하였다.
단 며칠 사이에 고수의 손과 얼굴은 거무스름하게 변해버렸다.
두 주일을 땀흘리며 그렇게 일했는데 주인이 돈을 줄 기척이 안보였다.
"저, 오늘 돈 받는 날인 거 같은데요?"
"첫 페이는 우리가 보류하거든."
"왜요?"
"일하다 갑자기 안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그래. 돈을 우리가 묶어놔야 그런 일이 없지. 그때그때 바로 주니까 연락도 없이 갑자기 안나온다니까? 그럼 우린 어떻게 해, 갑자기 어디서 사람을 구해? 그러니까 나중에 그만둘 때 합산해서 계산해 줄테니, 그리 알라구."
고수는 기가 막혔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다음 두 주일 후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돈을 받아 세어보니 생각보다 적었다.
"돈이 모자르는데요?"하고 주인에게 다시 세어보라고 봉투를 내민다.
"처음이니까 다 못주지. 아직 기술이 없는데..."
"제가 기술이 없다고요? 제가 못고치는 차가 없는데 무슨 말씀이예요?"
"아이, 첨엔 다 그러는 거야. 여기서 몇 달 일하면 그땐 보너스까지 다 챙겨줘. 얼마나 일했다고 벌써부터 다 받으려고 그래?"
고수는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저번에 돈을 받지 못했던 것도 기분이 나빴던 터였다.
다짜고자 욕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이 새끼야? 야, 내가 이까짓것 받고 일할 거면 왜 여기와서 이러고 있어? 너 저번꺼까지 다 내놔. 이런 개자식!!"하고 주먹을 쥐었다.
옆에서 보고있던 정비사가 놀라 뛰어와 고수를 말렸다.
"아서, 아서, 이 친구가 큰일 나려고."
주인은 고개를 들이밀면서 소리쳤다.
"그래 쳐봐라, 쳐봐! 깜빵에 쳐넣을테니! 니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모양인데, 너같은 건 경찰에 잡혀가면 당장 추방이야. 어디 쳐봐!"
"뭐야, 이 섀끼가 죽을려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도저히 사람을 때릴 수는 없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다.
고수는 폭력에 휘말리면 그야말로 그날로 추방당하는 외국인이었다.
"너 여기가 미국인게 다행인 줄 알아! 한국같았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하고 소리만 질렀다.
고수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이 채석의 집으로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벌써오니?"하고 채석이 물었다.
"에잇"하고 고수가 화난 소리를 하자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고수는 정비소에서의 일을 채석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너 돈은 받아왔어?"
"아니."
"일한 건 받아와야지, 그냥 오냐?"
"화가 나서 싸우다보니 돈받아 오는 것도 잊었네."
"이리 따라와."하며 채석은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탄다.
고수는 채석을 따라 옆좌석에 앉으며 "어떻게 하려고?"하고 묻는다.
"어떻게 하긴? 돈 받아 와야지."
채석은 차를 쌩하고 몰아 고수가 일했던 정비소로 달려가 차를 끽하고 세웠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 정비소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하고 주인이 물었다.
그런데 뒤에 고수의 모습이 보이자 인상을 쓴다.
채석은 "얘 일한 거 돈 주셔야죠."하고 주인에게 말했다.
"무슨 돈?"
"일했으니 한달 월급 주셔야죠."하고 힘을 주었다.
"이봐, 학생들이 뭘 모르나 본데 너희들 이민국에 신고하면 당장 추방이야. 어서 꺼져."
"아쭈? 일 시켜놓고 임금 안주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볼까?"
"누가 여기서 일했는데? 어디 기록있어?"
주인은 고수가 아까 잊고 두고간 돈까지도 주기 싫어 시치미를 뚝뗀다.
거드름 피우는 주인의 태도를 보자 채석도 열이 올라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 이 시발놈이 그런데..."
"뭐야? 너 이새끼 안 꺼져? 경찰 부르기 전에 빨리 꺼져 새끼들아."
"경찰? 그래, 불러, 새끼야. 경찰 아저씨오면 한번 물어보자. 이민국이 무서운지 IRS(국세청)가 무서운지. 일시키고 월급 떼먹는 거 보니까 세금도 엄청 떼먹었겠구만?"
"뭐야?"
"쟤야 뭐 추방당하면 공짜로 비행기타고 집에 가니까 돈 절약되고 좋지만, 나야 그럴 수 없지. 미국 시민권자로서 이런 불법을 자행하는 업소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고발 정신을 살려서 한번 IRS에다 전화해볼까? 여기 노동착취에 탈세를 일삼는 업소가 있는 거 같은데 함 와보시라고?"
주인은 둘다 유학생인줄 알고 유세를 부렸다가 채석이 시민권자라는 말에 쭈삣한다.
"존말할때 빨리 내놔, 이 씹새끼야!"
"이..."하고 주인은 대들려다가 안되겠다 싶은지 책상서랍에서 돈을 꺼내 세기 시작한다.
"고수야, 여기서 몇시간 일했냐? 시간당 얼마 받기로 하고?"하고 소리치더니 주인에게 "너 단돈 1불이라도 모자라면 알아서 해. 바로 신고들어간다, 엉?"한다.
주인은 돈을 챙겨 고수에게 넘겨주더니 얼른 뒷문으로 나가 도망쳐버린다.
고수는 서서 돈을 세어보더니, "맞어"한다.
두 사람은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야, 너 이제보니 배짱 좋다?"
"저런 새끼들은 쎄게 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저 지랄한다구. 시발놈들 맨날 멕시칸들 부려먹고 돈안주고, 유학생들 속여서 돈안주고, 한두번 본게 아냐, 저런 새끼들..."하며 양심없는 업주들을 욕해댄다.
"그런데 그 집 세금떼어먹는지 어떻게 알았는데?"
"에이, 뻔하지 척 보면 모르냐? 현찰주고 불법고용하는 업주들치고 세금 제대로 내는 집이 어딨냐?"
"그래? 허허..."
두 남자는 기분이 좋아 저녁 식탁에 앉아서도 히죽거린다.
"야, 우리 낼 바닷가 놀러갈까? 너 돈도 벌었는데?"
"아이, 나 돈 없어서 쩔쩔 매는 거 보고도 그런 소리하냐?"
"에이, 짜식, 햄버거 하나 정도 사줄 수도 있는거지..."
둘이서 놀러간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보고 있던 채영이 끼어든다.
"나두 내일 그레이스랑 바닷가 가려고 했는데...."
채석은 "잘됐네? 그럼 같이 가자." 한다.
토요일인 그 다음날 고수는 채석과 채영, 그리고 채영의 친구와 함께 바닷가로 놀러간다.
네 사람이 간 곳은 뉴포트 비치라는 곳이였다.
그곳은 채석의 집과는 남쪽으로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백사장이 무척 길고 한산한 편이라 파도타기하고 놀기에 아주 좋았다.
그리고 고등어 낚시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피어 근처에 자리를 잡은 후 네명의 남녀는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서 서핑보드를 타고 놀았다.
실컷 한바탕 놀고 나자 지쳐서 네명은 백사장에 길게 누워 쉬었다.
채영과 채영의 친구 그레이스는 풍만한 몸집에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입은 모습이 참으로 볼만하였다.
특히나 채영은 키가 큰 편에 다리가 길고 가슴이 무척 큰 글래머였다.
고수는 채영이 다리를 길게 뻗고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띄었다.
'미연누나가 저런 수영복 입으면 어떤 모양일까?'하며 미연이 비키니 입은 모습을 상상하였더니 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보며 웃음짓는 고수를 보고 채영은 '오빠가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역시 바닷가에 오길 잘했어. 이렇게 섹시한 내 몸매를 안넘어갈리가 없지, 후후...'하고 생각한다.
고수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미연뿐이 없다는 것을 채영이 알리가 없었다.
오후녁이 되자 네 사람은 파도타기를 그만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피어로 올라가 고등어 낚시를 하기로 하였다.
채석은 가까이 주차해두었던 차에 가서 트렁크를 열고 낚시대를 꺼냈다.
그러면서 차에 넣고 다니던 카메라도 함께 들고 와 "우리 사진 한장 찍자."하였다.
그레이스는 바다를 배경으로 함께 서있는 채영과 채석, 그리고 고수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네 사람은 고등어를 여러마리 잡아서 집으로 돌아와 소금을 잔뜩 뿌려두었다.
그 후로 고수는 기회가 생기는대로 일을 하였다.
수업시간을 피해 일하다보니 주로 저녁시간에 일을 하였고 주말에 청소나 페인트 칠하는 곳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워낙에 대학초부터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오던 그였기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익숙하였지만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해도 파트타임 일로 생활비에 학비까지 벌기는 불가능했다.
직업자체가 불안정하다보니 어떤 때는 겨우 한달 생활비 벌기도 힘들 정도였다.
원래는 일자리를 얻으면 채석의 집에서 나오려고 생각했었는데 사정이 이러하니 따로 아파트를 얻어 나올 수도 없었다.
번 것을 몽땅 아파트 월세로 주고나면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번 돈에서 200불씩을 채석의 어머니에게 하숙비로 주었다.
하숙비로서는 무척 적은 돈이었지만 채석의 어머니는 그렇게 단돈 얼마라도 고수가 내주니 기분이 좋아졌다.
또한 고수가 부지런하여 고수가 와서 지내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집안팍이 깔끔해졌다.
그리고 차를 잘 고치는 고수의 기술은 오히려 채석의 집에는 득이 되었다.
집안 식구들 차에 문제가 생길때마다 공짜로 봐주곤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야박했던 고수의 어머니도 차츰 고수가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수가 그 집에 머무르는 것을 누구보다도 좋아한 것은 바로 채영이었다.
고수를 첨 본 순간부터 좋아했고 갈수록 고수의 성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채영은 어떻게든 고수의 환심을 사고 싶었지만 오로지 미연의 생각뿐인 고수의 눈에 채영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채영은 바닷가에 놀러갔을때 고수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후로 데이트 신청은 커녕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음이 더욱 초조해지고 몸이 달아올랐다.
그렇게 몇 달을 그 집에서 지내고 있을 무렵 채석의 아버지가 몸이 아파 입원을 하였다.
허리가 좋지 않아 디스크 수술을 해야 했던 것이다.
함께 가게일을 보던 어머니도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아야 했다.
채석의 아버지는 채석과 고수에게 가게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하필 아버지가 입원하는 날이 마침 채석에게 야간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게다가 시험을 보는 날이라 빠질 수가 없었다.
낮에는 고수가 수업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고수에게 첫날부터 저녁시간을 맡기기가 불안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채석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먼저 가게에 나가있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고수가 나갔다가 가게 문을 닫고 오기로 하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채석이 그려준 약도를 보면서 찾아간 채석이네 가게는 리커였다.
리커란 주류판매 라이센스가 있는 구멍가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가게가 있는 동네분위기는 채석이네 집 동네하고는 영 달리 매우 우중충하였다.
가게 안은 어두스름하고 퀘퀘한 냄새가 났다.
놀라운 건 카운터 주변을 방탄유리가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고수는 채석의 부모님들이 이렇게 살벌한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얼른 들어와."하며 채석이 방탄막의 문을 열어주었다.
고수가 그안으로 들어가자 채석은 일하는 걸 가르쳐주었다.
"그런데....너네집 비지니스한다더니 이거였냐?"하고 고수가 물었다.
"그래. 몰랐어?"
"난 무슨 큰 사업하는 줄 알았어. 비지니스라고 해서..."
"미국에선 장사를 비지니스라고 하잖아. 그것도 몰랐냐?"
"그래?"
"하긴, 내가 있잖아, 한국가서 우리집 미국에서 비지니스 한다고 했더니 기집애들이 다 좋아하더라. 무슨 재미교포 사업가,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걸로 생각하더라구. 하여튼 미국은 되게들 오고 싶어하대? 교포라니까 기집애들이 내가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는 거 있지. 내가 그맛에 한국에 놀러가잖아. 흐흐..."
고수는 그 소리에 웬지 허함을 느낀다.
채석이 가고나서 밤 10시까지 카운터에 꼼짝없이 앉아있는데 미칠 것만 같았다.
방탄막 안에만 갖혀 몇시간을 지내는 것이 너무나 갑갑하기도 했고 누가 와서 총을 들이미는 건 아닌지 겁도 났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게 문닫을 시간이 거의 다 되자 고수는 부랴부랴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가보니 집안은 온통 어두웠다.
부모님들은 병원에 가 계시고 채석과 채영도 아직 안들어온 것 같았다.
고수는 2층으로 올라가 샤워부터 하였다.
꽉 막힌 곳에서 긴장하고 있었더니 땀이 많이 났던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고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벌거벗은 채로 욕실에서 나왔는데 머리가 긴 여자가 어두운 복도 끝에 서있는 것이었다.
"악, 놀라라...채영이었구나. 깜짝 놀랐어."하며 수건으로 밑을 가렸다.
채영은 고수에게로 가까이와 "오빠, 옷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내가 뭐 줄께."하곤 돌아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고수가 옷을 입고 내려가 보니 식탁에 촛불을 켜져 있었고 와인을 담은 술잔이 두개가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
"같이 와인 마시자구."
"나 술 못마셔."
"왜?"
"술마시면 죽어."
채영은 고수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이, 말도 안돼."
"정말이야. 나 술마시면 안돼."
고수는 채영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무슨 괴상한 장난을 치려고 그러는 건 아닌가 싶어 긴장이 되었다.
채영은 고수가 분위기를 그렇게 깨버리자 실망한 얼굴로 자기 잔에 담긴 와인을 들이켰다.
"이것도 다 마셔."하고 고수는 자기 잔을 채영에게 내밀었다.
채영은 그 잔을 받아들며 고수를 올려다본다.
촛불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오빠, 내가 할 말이 있거든."
"뭔데?"
고수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려나?'하고 채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빠 도와주고 싶어."
"어떻게? 뭘?"
"영주권 없어서 힘들지?"
"글쎄...?"
"나랑 결혼해."
"뭐라고?"
"정말로 말고, 그냥 결혼서류만 만들어서...그러면 영주권 바로 신청할 수 있거든."
"......"
"영주권 있으면 일자리도 좋은 거 얻을 수 있고, 학비도 싸서 오빠 공부 마칠 수 있어."
"그럼 너랑 결혼해서 영주권받고, 공부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때 이혼해?"
"응."
"그게 뭐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유학생들 여기 와서 그런 결혼 많이 해."
"채영아,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그런 신경 쓰지마."
"오빠, 나 오빠 꼭 도와주고 싶어. 여기와서 너무 고생많이 하는 것 같아서 옆에서 보기 안타깝단말야. 오빠도 빨리 공부끝내고 돌아가고 싶지? 그렇지? 맞잖아?"
"그렇지..."
고수는 미연이 생각났다.
2년만에 얼른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 결혼하려 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공부를 과연 마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나 하자는 대로 해. 내가 언제 정말로 결혼 생활하자고 그랬어? 그냥 서류만 넣는 거야. 그럼 당장 다음학기부터 돈 적게 내고 학교 다닐 수 있는데, 그런 걸 왜 안해? 영주권 있으면 주립대 같은데 얼마나 싼데...이런 거 아무한테나 오는 기회 아니야."
고수는 채영의 말이 처음엔 말도 안되는 얘기라 생각했지만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혼했다 이혼하면 너, 나중에 문제되지 않을까?"
"여기 미국이야. 누가 나 이혼한거 가지고 뭐라하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 게다가 아무도 몰라. 알면 또 어때?"
고수는 채영의 이런 은밀한 제의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뭐라 하실까?"
"아이, 당연히 안된다고 하겠지. 그러니까, 우리 엄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고..."
"그럼 어떻게 결혼을 해? 가족모르게 둘이서만 하냐?"
"맞어. 그냥 우리 둘이 시청에 가서 하면 돼. 거기서 결혼식도 다 하고, 증인도 다 세워줘. 정말 아무것도 아냐. 얼마나 간단한데."
"그래도 채석이한테는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치, 맘대로 해. 그런데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고수는 식탁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채영은 쫓아 올라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빠, 우리 아빠 퇴원하기 전에 얼른 하자. 응? 엄마 아빠 없을때..."
고수는 흘깃 채영을 돌아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