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는 그 소란이 있던 날 어머니와 동생의 손에 이끌려 시골로 끌려가게 생겼다.
병문은 고수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하여 형선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한 덕분에 한창 분주할 때 일손을 잃을 판이었다.
"어머니, 그래도 고수는 데려가지 마세요."
"왜? 이 녀석은 집에 데려다가 꽁꽁 묶어둬야 해. 이 놈이 정신이 나가서 여기 두었다간 뭔 짓을 저지를지 몰라. 고수야, 어서 짐싸!"
"저희 가게에서 일해야 하는데..."
"뭐야? 아니, 얘가 네 가게가서 일한다고? 너 이놈아, 고수야, 너 돈벌어서 그 여자 먹여살렸냐? 아이구, 그런 힘든 일 해가며 그 여편네 먹여살렸어? 이런 천하에 쓸개빠진 놈아."
고수는 병문을 노려보았다.
병문은 "그만 가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슬그머니 꽁지를 뺀다.
고수는 시골집으로 끌려갔다.
고수의 아버지는 고수를 보더니 머리를 쥐어박는다.
"이런 모자르는 녀석...쯧쯧... 서울가서 공부하랬지, 뭐? 애엄마하고 바람이 나? 너 이녀석 내일 당장 가서 선보고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얼른 약혼식 올려!"
"아, 아버지, 싫어요."
"너 나 죽는 꼴 볼려냐? 이 망할 놈아, 말 안들으면 나 죽어버릴란다. 이런 애비말도 안듣는 자식놈을 두고 내가 무슨 낯짝으로 세상을 사냐, 엉?"
고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아버지 저 바로 올라가야 해요. 포트폴리오 만들어야 취직한단 말예요. 이달 안으로 만들어서 접수시켜야해요. 네? 저 내일 아침에 올라갈께요."
"이 녀석이? 너, 이번 주말에 저번 얘기한 그 사장님 따님하고 선보고, 그러고 올라가. 일주일 집에 머문다고 그 포, 포..토.. 그거 못만드냐?"
"아버지, 저 선 안봐요."
"너, 나 죽는다. 애비 장례치르고 올라갈래?"
"아휴..."
우울한 일주일을 보낸 후 고수는 아버지의 죽는다는 협박에 못이겨 선을 보러나갔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여 화가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고수는 아버지의 그런 성격을 한번도 이길 수가 없었다.
대구의 큰 건설회사 사장의 딸이라는 아가씨는 못난 편은 아니었지만 세련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아가씨였다.
양가 부모들은 서로 흡족해 하며 웬만하면 얼른 약혼식 날자를 잡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부모들이 두 사람만 남겨두고 자리를 뜨자 고수는 한심한 얼굴이 되어 먼 창밖만 바라보았다.
맞선을 보러온 아가씨는 약간 사투리를 섞은 말투로 씩씩하게 말을했다.
"무슨 공부하신다고 그랬죠?"
"...디자인이요."
"어머, 저는 인테리어 디자인하는데..."
"아, 예...."
"저의 아버지 하시는 일이 그래서 그쪽으로 어릴때부터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건축은 좀 거칠고 해서 인테리어로 했거든요. 고수씨는 어떤 쪽으로 디자인을 하고 계시는데요?"
"저는..."
마주앉은 여자가 자기와 어떤 공통점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싫어 대답하기가 싫었다.
"...그냥... 디자인이죠 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쥬스잔에 자기 모습을 비춰본다.
미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성의없이 대하는 고수의 태도때문에 그 여자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야기를 몇마디 나누고는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고수는 곧바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대구 시내를 빙빙 돌아다니다 게임방에 들러 실컷 게임을 하였다.
느즈막히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 아가씨와 어떠했는지 물었다.
"아버지, 저 그 여자랑 만나기 싫어요."
"이놈아, 굴러온 복을 왜 차버려? 우리 집안 뭐 볼거 있냐? 그런 집하고 사돈맺어두면 나중에 너 팔자피는 거야. 다 널 위해 그러는 거라고. 너 약혼식 올리기 전에는 학교고 취직이고 다 안된다. 안 돌려보내. 그냥 올려보냈다가 그 여자하고 또 만나라고? 절대로 안돼."
고수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모면하고 싶었다.
"아버지, 졸업하고 해도 되잖아요. 아직 학생인데... 그러지 말고 저 직장잡히고 그때 해요. 사람들한테도 그렇지, 학생인데 무슨 식올린다고 하면 뭐라 하겠어요? 무슨 사고쳤나 오해나 사지."
고수의 아버지는 듣고보니 고수 말이 그럴듯도 했다.
"그런가? 흠...그럼, 일단은 마지막 한 학기 남은 거 마저 끝내고 보자. 그대신, 너 그동안 일주일에 한번씩은 그 아가씨랑 만나야 해. 주말마다 내려와서 만나. 알았냐?"
"......"
"대답안해?"
"네."
고수는 다음날 아침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함께 나들이 차림을 하고 따라왔다.
"엄마 어디 가?"
"어디 가긴? 너랑 함께 간다."
"엉? 나랑 같이 간다고?"
"그래, 너 딴짓 못하게 내가 올라가서 지키고 있으련다. 네 아버지도 그러라고 했어."
"할머니는 어떡하고?"
"할머니는 네 아버지랑 정수가 돌봐드리면 돼. 지금 할머니가 문제야? 우리 장손이 자칫하면 잘못될 판인데? 내가 가서 딱 붙어있어야 해."
엄마와 함께 올라온 고수는 당분간 미연에게 연락하는 것을 참기로 했다.
미연이 또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게 조심하기로 했다.
집에 쳐박혀서 그래픽 작업만 하였다.
헌데 엄마는 1주일이 채 못되어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와 정수가 엄마 없이 할머니까지 돌보면서 지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고수가 얌전히 지내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
미연은 영준의 회사를 그만 둔 후 상심이 컸다.
영준이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워졌다.
집에서 우울하게 지내고 있는데 고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나 고수야. 조금 있다가 그리 갈께."
미연은 고수가 자기 집으로 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냐, 집으로 오지 말고 미래클럽으로 올래?"
"그럴께."
고수는 미연을 보고 너무나 반가와하였다.
집에 내려가 선을 봤던 이야기, 엄마가 서울까지 쫓아왔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미연은 고수가 자기 앞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참으로 즐거웠었는데 이젠 더이상 그렇지가 않았다.
"누나, 이제 또 일요일마다 누나집 가서 밥먹을거야."
"고수야, 이젠 오지마. 너, 고아도 아니고...내가 너까지 먹여살릴 형편이 안된다."
"어라? 내가 그동안 밥을 먹어야 얼마나 먹었다고...알았어. 누나, 내가 돈벌어 올께. 응? 다시 병문이네 가서 일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고수에게 미연은 쏘아붙였다.
"그러지마. 너 그러는 거 싫어. 너, 일할 필요도 없었는데, 이 반지 사주려고 거기서 일한거였지? 그랬지?"
"그런 거 아냐. 병문이가 일손이 딸린다고 해서 그런거야."
"어쨌든, 이젠 그러지마. 나때문이라면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알았어. 누나가 싫어하는 거 안할께. 하지만... 그럼 우리 언제 만나? 누나 직장다니느라 바쁘고, 일요일날 집에도 오지 말라고 하고...그럼 언제 만나냐고?"
"......."
"나, 기다려준다고 약속했었잖아."
"......."
"누나 그새 마음이 변했어?"
"......."
미연은 손가락의 반지를 빼서 고수에게 내민다.
"누나...?"
"고수야, 이 반지...나 더이상 갖고 있을수 없어. 이건...말도 안돼."
"누나는 내가 꼭 고아이고 불쌍해야 좋아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런 건 아냐. 너 좋아해.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널 사랑하는 건 아닌거 같아. 그리고 우린...어울리지 않아."
"날 꼭 사랑 안해도 돼. 그냥 좋아만 해줘도 난 좋아. 그런데, 내가 고아였을땐 어울렸는데, 아니니까 안 어울린다고? 뭐가 그래?"
"당연히 그렇지 않니?"
"우리 부모님때문에?"
미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지금은 학생이라 내 맘대로 하기가 힘든 건 사실이지만, 나, 성인이야. 내 생각대로, 나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거야. 그래서 누나보고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거잖아. 직장구하고 돈벌면 그땐..."
"부모님하고는 영영 안보고 살거니?"
"적어도 그땐 내 주장을 내세울수는 있잖아."
"지금은 왜 안되는데? 그건 네가 학생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너네 아버지 죽겠다고 협박하셨다며? 또 그러시면 어떻게 할건데? 너의 아버지 목숨을 나하고 바꿀 수 있겠어?"
"그건... 시간이 흐르면 우리 부모님도 생각이 달라질 수 있잖아."
미연은 고개를 저었다.
고수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을 하였다.
"누나, 누나는 그래서 그렇게 된거야. 알아?"
"뭐가?"
"그래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결혼했잖아. 남들 눈치보다가. 그렇지? 그래서 행복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다 행복해해, 지금?"
"......."
"누나, 다른 사람들은 남 생각 안해. 누나만 바보같이 사는 거라고.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거야. 일단은 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궁리를 하라고. 남들은 거기에 따라야지 어떻게 해? 이게 내 인생이지 그 사람들 인생이야? 난 불행해지는데, 그럼으로써 남들이 행복해진다면, 그럼 나는 뭐야? 나는 그 사람들 인생 행복하게 해주는 들러리야? 결국 그 사람들은 자기 만족을 위해 나를 희생시키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 마음 아프게 할 수는 없어. 특히 너희 부모님들..."
"나는? 내 마음 아픈건?"
'내 마음 아픈 건...아나요?'
영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미연은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이고 만다.
영준의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고수의 기다려달라는 말이 교차되어 어지럽게 귀속을 울렸다.
미연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수야...당분간 만이라도 나 혼자 좀 있게 해줘, 응? 당분간만 우리 만나지 말자."
고수는 미연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하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연락안하면 안돼."
"그래... 몇일 직장좀 알아보고나서 연락할께."
"거기 그만뒀어? 왜?"
"그렇게 되었어."
"그 사람 웃기네? 나오랬다 말랬다..."
"그런 거 아냐. 내가 그만뒀어."
"잘했어, 누나. 잘했다구."
고수는 싱글거렸다.
고수는 미연과 영준과의 관계는 그렇게 완전히 끝이났다고 생각했다.
고수는 미연이 내밀었던 반지를 다시 미연의 손가락에 끼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