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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38


BY 제인 2003-11-19

미연은 선물가게를 그만두고 박영준의 사무실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출근이라해도 시간을 꼭 맞춰 나갈 필요가 없어서 아침시간이 여유로왔다.

대개 작곡가들은 프로젝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시간맞춰 출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연이 첫 출근하는 날 박영준의 사무실에 가보니 아무도 없고 박영준의 후배라고 하는 남자직원 하나만 있었다.

후배는 다른 직원들은 외근이 많아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적이 드물다고 했다.

박영준은 본격적으로 장미래와의 음반을 녹음하는 단계로 들어서자 더욱 바빠졌다.

영준의 회사에도 자체 녹음실이 있지만 이번 음반녹음은 장미래의 소속사에서 제공하는 스튜디오를 이용하기로 했기때문에 미연이 첫출근하는 날도 영준은 회사에 나오질 못했다.

그래서 미리 후배에게 미연을 안내해달라고 부탁해두었다.

"영준이 형하고 대학동창이시라면서요?"

"네."

"작사하세요?"

"아뇨. 작곡하는데요."

"여자들은 작곡보다는 작사쪽이 많은데..."

"그래요?"

"여류 작곡가는 별로 없죠. 작곡이란게 남성적인 일이잖아요. 힘도 많이 들고..."

"그런...가요?"

"그냥 곡만 쓰자면 그렇지 않겠지만, 음악으로 만들자면 아주 힘들죠. 가수들 가이드도 해줘야하고, 편곡에다,  연주 지도도 해야하고요..."

"그렇겠군요."

"프로듀서는 더 하죠. 영준형 같은 사람은 녹음 들어가면 아예 집에도 못들어가고 여기서 음반작업 다 끝날때까지 먹고자고 할 정도니까요."

미연은 영준이 집에도 못가고 여기서 먹고자고 한다는 얘기에 '여기 어디서 잔다는 거지?'하고 두리번거린다.

"스튜디오 한번 보실래요?"

"네, 좋아요."

미연은 후배를 따라 건물 지하의 녹음실로 따라갔다.

울퉁불퉁한 방음벽과 큼지막한 기계장치들이 커다란 방음 유리창 안으로 보였다.

녹음실 분위기에서 미연은 어떤 위압감같은 것을 느꼈다.

'저 사람말대로 남성적인 일이구나...'

녹음을 하게 되면 프로듀서나 녹음 기사들은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고 일을 하는 적이 많다.

그런 곳에서 여자들이 함께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생전 처음 와본 스튜디오를 신기한 눈으로 여기저기 살펴본 뒤 미연은 후배에게 할 일을 묻는다.

"제가 오늘 해야할 일은 없나요?"

"뾰족하게 하실 일은 없구요...그냥 여기 계시면서 분위기 익히시구요... 이따가 다른 분들 오면 서로 인사 나누시구요...심심하시면 연습실에서 곡을 쓰시던가....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영준형이 자기 올때까지 그냥 그렇게 계시라고 했어요."

"네, 고마와요."

미연은 연습실에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아 오른손으로 건반을 건드려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꿈이 아니겠지? 영준씨가 정말로 나의 꿈을 이루어준건가?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이건 꿈이 아냐. 현실이라구. 아...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어내야할텐데....영준씨가 실망하지 않게.'

음악실 문을 두드리더니 후배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한다.

"전화왔는데요. 영준형이요."

미연은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 "미연씨 나예요. 어때요?"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몰라서요..."

-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놀아요. 그리고 이따가 오후에 제가 거기 가니까 집에 먼저 가지말고 기다려요."

"네."

미연은 전화를 끊고 수화기를 후배에게로 가지고 갔다.

후배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저....뭐 좀 물어봐도 돼요?"

"예, 그럼요. 뭔데요?"

"녹음을 하려면 어떻게 하죠? 녹음기 같은 거 여기 있나요?"

"무슨 녹음요?"

"제가 피아노 치는 거 녹음하고 싶은데요...카세트같은 거 없나요?"

"아, 그거요? 이리 오세요."

후배는 연습실들 중 디지털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안내를 했다.

그 디지털 피아노에는 카세트 장치가 되어있어 피아노를 치며 녹음을 할 수가 있었다.

"이건 영준형이 주로 쓰는 건데요, 여기다 테입넣고 녹음하시면 되구요....아니면 플로피 디스켓 여기다 넣고 입력하면 나중에 컴퓨터에 옮길 수도 있죠. 테입이랑 플로피는 캐비넷안에 많으니까 얼마든지 쓰세요. 단, 꼭 자기거라고 표시해두셔야해요. 여기선 잃어버리면 못찾아요."

"네, 고마와요."

미연은 테입을 넣고 피아노를 쳐보았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미연은 작곡할 때 도입부를 잘 이끌어내면 그 다음은 실타래 풀리듯 술술 음악이 잘 펼쳐져나가는 편이었다.

건반을 두드려가면서 도입부 시도를 끊임없이 해본다.

그런 시도들을 테입에 녹음해 두었다가 나중에 들어보면 당시엔 별로 좋지 않았던 것도 단서가 되어 좋은 멜로디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피아노에 몰두하여 앉아 있으려니 어느새 오후녁이 되었다.

연습실로 난 창밖에 영준의 모습이 보였다.

미연은 일어서서 연습실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 어땠어요?"

"재미 있었어요."

"자, 이거 받아요."

"뭐예요?"

"장미랑 같이 먹으라고 사왔어요."

영준은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때는 6월이라 상당히 더운 날씨였다.

"냉동포장한 거라 집에 갈때까지 녹지 않을 거예요."

"고마와요."

"제가 집까지 태워다 줄테니 나가요."

"괜찮은데요...."

"저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 태워다 드리는 거예요."

영준은 웃으며 미연을 주차장으로 인도했다.

미연은 영준의 호의에 고맙기도 했지만 겸연쩍기도 하였다.

막상 차를 출발시켜 시내로 나가자 교통체증이 심했다.

"저때문에 공연히 길에서 시간보내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런 거 아니예요. 그리고 차가 막히니까 더 좋은데요. 함께 더 오래 있을 수 있잖아요."

미연은 영준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영준은 앞만 쳐다보고 있다.

그 옆모습이 쓸쓸해보였다.

영준은 그 후 아무말 없이 계속 운전만 하였다.

미연의 친정집에 도착한 영준은 미연이 장미를 데리고 나오길 골목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미연의 조카들이 기웃거리며 영준을 구경하듯 내다본다.

미연이 장미를 데리고 나오자 조카들이 '잘가'라고 인사를 한다.

장미는 미연과 함께 차의 뒷자리에 오르며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였다.

영준도 "그래, 잘 있었어?"하고 장미를 돌아 보고 인사한다.

그러더니 미연에게 이렇게 물었다.

"장미가 누굴 닮았어요? 미연씨는 안닮은 거 같은데....아빠를 닮은 건가요?"

"........."

미연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아무말 없이 차창밖만 바라본다.

영준은 미연의 집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려 미연과 장미가 내리도록 차문을 열어주었다.

영준은 차에서 내린 장미에게 묻는다.

"너, 방학하면 아저씨 사무실에 나와서 아저씨한테 피아노 배울래?"

"정말요?"

장미는 놀라운 눈으로 미연과 영준을 번갈아 쳐다본다.

"영준씨...."

"그럴래?"

"네, 좋아요. 정말 좋아요. 엄마, 나 피아노 배워도 되지? 응? 응?"

장미는 좋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영준씨, 바쁜데 왜 그런 일을....?"

"이번 기획 끝나면 좀 한가해질 거예요. 장미도 곧 방학하잖아요. 제가 기초부터 가르쳐볼께요. 재능이 아깝잖아요."

미연은 몸둘 바를 몰랐다.

영준이 왜 자기와 장미에게 이토록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자기를 작곡가로서 데뷔시켜준 것만도 엄청난 큰 호의였는데, 장미에게까지...

자기를 버렸던 옛사랑에게 왜 이러는 건지 알수가 없었다.

미연은 전에 고수로부터 영준이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영준이 자기를 잊지못해서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장미가 그렇게 불쌍해보이나?'하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

"그럼 저 이만 가볼께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고마왔습니다."

"...저 오늘 명민이 만나기로 했어요. 같이 갈래요?"

"명민이를요? 아, 아녜요. 그냥 명민이한테 제 안부도 전해주세요."

"그럴께요."

장미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영준이 떠나는 뒤에다 잘가라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 저 아저씨 피아노 잘쳐?"

"응. 그래."

미연은 장미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 장미가 그렇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자기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장미도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쉽게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연은 마음이 아팠다.

미연은 장미의 볼에 입을 맞추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