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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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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36


BY 제인 2003-11-18

미연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다른 건 다 버려도 꿈은 버리지 않으시겠죠...'

박영준이 아까 한 그 말이 계속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토록 자기를 사랑했었던 남자.

자기도 그렇게나 사랑했으면서도 떠나야만 했던 그 사람.

바로 그가 한 말이었다.

'다른 건 다 버려도...라고...?'

미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기때문에 상처받았기에 그런 원망섞인 말을 했을것이다.

미연은 훌쩍거리며 그의 말을 되뇌이고 또 되뇌인다.

 

그리고 꿈이라는 것에 대해....

박영준은 자기의 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 만난 날의 의미를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미연의 상념도 깊어갔다.

 

미연은 자신의 꿈이었던 피아노를 계속 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부모의 이혼이, 또는 어려운 환경이 미연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 꿈을 버렸던 것이었다.

친구인 미래는 어땠던가.

자기보다도 더 가난한 가정형편속에서 자란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성악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래로 그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레슨비를 마련했다.

미래의 언니 오빠들은 집안이 어려워 모두 대학에 갈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교졸업후 바로 산업전선에 뛰어들어야했고 결혼하여 그다지 넉넉치 못한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미래는 그런 언니 오빠들을 찾아다니며 떼쓰고 졸라서 겨우겨우 대학입학금을 마련했었다.

학교를 다니는 도중에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친구들이며 교수님들한테까지도 돈을 구하러 찾아다녀야했다.

바로 그런 것이 꿈이라고 하는 것 아니던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루어내야하는 것.

미연은 자신이 엄마의 처지만을 생각하여 그렇게 쉽게 꿈을 포기했던 것이 알고보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엄마한테 조르지 않았는가.

왜 미친듯이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는가.

왜...왜...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말았을까...

그토록 갖고 싶은 것들을 자기는 왜 그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그렇게 사랑했던 사람까지도...

'비겁하달수 밖엔 없잖아...난 그렇게 비겁한 사람일 뿐이었잖아....'

진정 음악이 꿈이라면 박영준와의 관계가 아무리 껄끄럽다고 해도 이런 천우일조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녀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꿈마저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미연은 영준의 명함을 꺼내서 그의 이름을 내려다본다.

 

다음날 미연은 마음을 굳게 먹고 박영준의 회사로 전화를 하였다.

"저... 김미연이라고 하는데요..."

"미연씨?"

저쪽에서 박영준의 반가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희 회사로 와주시겠어요?"

"언제요...?"

"아무때나 좋습니다. 언제 오시겠습니까?"

미연은 다른 날엔 일주일 내내 일을 하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영준은 일요일도 상관없다며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일요일이 되었다.

영준의 회사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미연은 장미를 맡기려 친정집으로 갔다.

언니는 아이들과 외출을 했는지 아무도 없고 엄마만 방에 누워있었다.

미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킨다.

"미연이 왔니?"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에구, 한 여름에 감기가 왔나보다.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몸이 찌부둥하네..."

"약은 먹었어?"

"아침에 니 언니가 지어다 주었는데, 그거 먹었더니 이렇게 잠이온다."

"언니는 어디 갔어?"

"애들 데리고 어디 갔나보다. 애들이 갑갑하다고 하도 떼를 쓰잖니. 그래서 나갔다 오라했다. 나도 좀 쉬게. 애들이 벅적거려서 어디 쉴 수가 있어야지."

미연은 장미를 맡기러 왔다가 엄마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럼 엄마, 푹 쉬어. 나는 어디 좀 갈데가 있어서 그만 갈께."

"장미랑 같이 가냐?"

"응."

"그래 다녀와라."

엄마는 이부자리에 도로 눕는다.

미연은 장미와 함께 좌석버스에 올라탔다.

영준의 사무실이 있는 강남역에서 내려 바로 나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5층 건물 입구에 '바람 스튜디오'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 로비에는 응접세트와 책상이 여러개 있었고 양쪽으로 복도가 나 있었다.

장미는 기웃거리며 새로운 장소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

혼자서 복도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더니 복도로 문이 열려 있는 방안을 들여다 본다.

"와, 피아노다!"

그때 뒷편 복도에서 박영준이 나타났다.

"오셨군요."

"네...그런데 제 딸이랑 같이 왔어요. 맡길 데가 없어서...어머니가 아프셔서요..."

"잘 하셨어요. 아이 이름이 뭐죠?"

"장미예요."

영준은 웃으며 장미에게로 다가갔다.

연습실 문간에 서서 피아노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장미에게 영준이 물었다.

"피아노 좋아해?"

"네!"

"칠 줄 알아?"

미연은 "못쳐요."하는데 장미는 "네."하고 대답이 엇갈린다.

영준은 장미를 데리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간다.

미연도 함께 따라 들어갔다.

"한 번 쳐봐."하고 영준이 말하자 장미는 싱글거리며 피아노 의자에 올라 앉았다.

영준은 장미의 옆에 앉아 장미의 연주를 기대하였다.

장미는 처음 들어보는 간단한 연주곡을 쳤다.

미연은 장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게 무슨 음악이야?"

"엄마가 만들었어요."

"그래? ...피아노는 엄마한테서 배웠어?"

"아뇨, 엄마 키보드 가지고 혼자 쳐봤어요."

영준은 놀라는 얼굴로 미연을 쳐다본다.

장미도 함께 '엄마 놀랐지?'하는 표정으로 미연을 쳐다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렇게 미연을 향해 쳐다볼 때 미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럴수가...둘이 똑같아...'

영준과 장미의 얼굴이 너무나도 닮았던 것이었다.

영준은 "미연씨 닮아서 장미가 음악에 소질이 있나봐요. 지금부터 시켜보는 게 어때요?"하고 말한다.

그러나 미연은 '혹시 박영준 당신을 닮아서 그런건가...? 당신을 닮아서 소질이 있는 건가...?'하는 의문이 맘속에서 떠올랐다.

 

세 사람은 사무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아서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려니 서로 서먹서먹하였다.

"음악이 정말 좋더군요..." 박영준이 말을 꺼냈다.

"........"

"정말로...미연씨 음악이 마음에 들었어요."

"........"

"이번 곡에 대한 계약을 해야하고요..."

"........"

미연은 떨려서 영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영준도 미연과 이렇게 오랫만에 단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려니 무척 떨렸다.

하지만 어떻게든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서 두 사람의 과거지사는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고 싶었다.

영준은 얼마전부터 맘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미연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저의 회사에 소속되서 활동하셨으면..."

"네?"

"저랑 함께...일하셨으면 해요."

"...그렇게까지...."

"작곡에 소질이 많으신 거 같아요."

"글쎄요..."

"작곡을 취미로 해오셨다고....들은 거 같은데..."

"...네..."

"미연씨. 음악일... 하고 싶지 않은가요?"

"...하고 싶어요."

"그렇담...거절하지 마세요."

"제가 작곡을 잘 할 수 있을지...."

"두고 보면 안될까요? 열심히 하실거잖아요. 그렇죠?"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준은 그제서야 안심이 된듯 얼굴이 밝아졌다.

영준은 이제 일이 제대로 되었다 싶자 미연에게 식사를 청한다.

"우리 나가서 함께 식사할까요? 점심은 드셨나요?"

"죄송해요. 오늘은 저의 엄마가 아프셔서 제가 가서 돌봐드려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함께 해요. 여기는 내일부터 나오시겠어요?"

"여기 매일 나와야하는 건가요? 작곡가들도 매일 출근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그래도 처음이니까 여기 일을 익히시는게 좋을 거 같아서요."

"지금 일하는 곳에서 사람을 새로 구한 다음에나 그만둘 수 있을 거 같아요. 갑자기 그만두면..."

"그렇겠군요. 그렇게 하세요. 되도록 빨리요."

"네."

영준은 미연을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었다.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오후에 녹음스케줄이 잡혀있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장미는 영준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영준도 장미에게 잘가라며 웃음을 지어보인다.

미연은 버스에 올라타서 장미와 나란히 앉는다.

버스가 출발한 후 여러가지 생각에 젖어 있던 미연은 문득 창가에 앉은 장미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아까 두 사람이 동시에 자기를 향해 쳐다보았던 그 장면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영준을 처음 만났던 그날 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아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는다는데, 그때 영준씨를 너무 그리워해서 장미가 그를 닮게 되었을까...아니면...아냐, 아냐....'

미연은 혼자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