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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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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26


BY 제인 2003-11-10

유선아의 데뷔앨범은 대성공이었다.

한창 식상해 있는 댄스곡도, 현재 가장 인기있는 장르인 R&B 도 아닌 정통 발라드를 부르는 새로운 여가수의 모습에 대중들은 큰 호응을 보여주었다.

각종 연예기사난에는 복고적이면서도 신선한 바람을 몰고온 실력파 신인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런 인기에는 그녀의 뛰어난 용모도 크게 작용했다.

벌써부터 CF와 TV 프로그램으로부터 섭외가 쏟아져들어왔다.

선아는 영준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라며 그에게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가수의 길을 반대하던 선아의 아버지도 그녀의 그런 성공에 기뻐하셨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했다.

영준과 선아는 이후 더욱 가까와졌다.

둘이 사귀고 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알 정도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영준은 새로운 연인에게 마음을 흠뻑 내주었다.

그녀와 다시는 상처받지 않을 행복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대학 축제때 가요콘서트에 참가하기로 되어있는 선아를 데리고 영준은 자신의 모교인 U대학에 갔었다.

상경대 앞을 거쳐 올라가며 그 옛날 자신이 미연을 한없이 기다리며 서있었던 그 자리를 보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옛사랑의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몇일 전 그녀를 다시 보고야 말았다.

자신을 보고 눈길을 돌려버린 그녀...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그 여자...

이젠 그저 쓰라린 추억일 뿐인 그녀.

정리하고, 접고, 지우고 하기를 8년이었다.

그날 그는 그녀를 다시 보았지만 여태까지 그랬듯 그냥 꾹꾹 눌러 잊기로 했다.

그는 슬픈 추억이 어린 교정을 걸으며 다시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또 한번 다짐했다.

 

콘서트가 끝나고 영준은 선아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녀의 집앞에 도착하자 영준은 차를 세우고 호흡을 한 번 가다듬었다.

결심한 바가 있어 선아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먼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선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자신의 두손으로 꼭 쥐고 말했다.

"선아야, 우리 결혼하자."

"오빠..."

"아직 재학중이니까 일단 약혼식이라도 하자. 그리고 졸업하면 바로 나랑 결혼하자."

선아는 영준의 프로포즈에 감동하여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가 부모님들 모시고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자. 가까운 시일내에."

"오빠..."

영준은 손에 쥐어주었던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고 안아주었다.

잔잔히 밀고 들어오는 행복감에 두 사람은 도취되어 한참을 그렇게 서로 부둥켜 안고 있었다.

 

양가 상견례를 갖기로 한 날은 그 다음 주 일요일이었다.

S호텔 로비의 레스토랑에서 두 집안의 부모님들이 함께 만나기로 하였다.

영준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홀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누님이 하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맞선에 영준은 상당히 긴장이 되었다.

일찌감치 어머니와 누나를 모시고 약속장소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기의 신부를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되자 레스토랑 입구에서 웨이터가 선아의 가족을 안내하여 영준의 자리로 모시고 왔다.

선아와 부모님이 영준의 식구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영준의 어머니와 누나는 선아의 부모님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두 집안의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서로를 보았을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선아의 아버지가 영준의 어머니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부인과 딸의 손목을 잡아끌고 나가버린 것이었다.

영준은 깜짝놀라 그들을 따라가며 "무슨 일이십니까....왜,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으나 선아의 아버지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녀린 모녀를 질질 끌고 호텔밖으로 나가버렸다.

선아와 그녀의 어머니도 놀라 왜 그러냐고 바둥거리며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벤츠를 타고 떠나버린 선아의 식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영준은 어찌된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망연자실하였으나, 자기 식구가 있는 자리로 되돌아와서야 무슨 일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누나의 안색은 성이나 창백해져 있었고 어머니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영준의 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머니에게

"이제 당신하고는 인연을 끊겠어요! 저 찾지 마세요!"하고 소리치더니 호텔을 떠났다.

영준은 원인이 어머니에게 있음을 알게되었다.

'어머니...어머니.......'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주먹을 불끈쥐고 덜덜 떨었다.

영준은 온 몸에 힘이 죽 빠져 자신의 몸도 지탱하기 힘들 지경이었으나 역시 실의에 빠진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운없이 흐느적거리는 어머니를 방에 눕힌 후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한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영준의 어머니는 모 여대의 성학과를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예쁜 얼굴에 귀공녀같은 우아함을 갖춘 그녀는 사춘기시절부터도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였는데, 그 많은 남자들의 결혼제의를 모두 뿌리치고 색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자유분망하고 누구에게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인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뭇남성들과 염문만을 뿌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더니 어느 배우와 사랑에 빠져 잠시 동거를 하여 영준의 누나를 낳았으나 그와 오래 살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영준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어머니가 상대했을 어느 남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한 가정사가 영준을 더욱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어머니는 영준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여러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고교 3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다.

곧 다가올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영준은 막바지 공부를 하다보니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었다.

피곤하여 잠시 책상에 엎드려 있는데 밖에서 문닫는 소리가 쾅하고 들렸다.

깜박 잠이 들었던 영준은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떠 방문을 살짝 열고 마루를 내다보았다.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한 어머니가 어느 남자의 품에 안겨 어스름한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영준은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이런 곳에선 잠시도 있고 싶지 않아...'

옷걸이에 걸려있던 코트를 집어들고 집을 나가버렸다.

영준은 한겨울 추운 새벽길을 한없이 걸었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와진 뺨을 타고 흘렀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을 넘게 찬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인적없는 거리를 걸어다녔다.

영준의 얼굴과 손발이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숨결까지도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걸으니 낯익은 거리까지 오게되었다.

자신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느 선배의 음악스튜디오 앞까지 온 것이었다.

반지하로 난 창에 불빛이 보였다.

영준은 건물 지하의 스튜디오로 내려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후 문이 열렸다.

"어? 너 영준이 아니냐? 웬 일이야, 이 새벽에?"

선배와 또 다른 두 사람이 스튜디오 로비에 놓인 낡은 테이블에 모여앉아 그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 잘왔다, 이리와 앉아. 한잔해라."

영준은 술을 마실 줄 몰랐다.

하지만 그 술을 받아마셨다.

두어 잔을 연이어 마셨더니 온 몸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술기운이 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흐흐흐....흐흐흐흐......."

"얘 왜 이러냐? 짜식, 입시공부가 힘든가보다. 힘든 거 있으면 뭐든 얘기해, 이 형님이 돌봐줄께, 엉?"

선배는 영준이 허탈하고 넋나간 모습으로 웃는 것을 보더니 그에게 뭔가 가슴아픈 일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그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주었다.

그 후로 영준은 그 스튜디오에 자주 갔다.

선배가 늘 따뜻하게 대해주어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배워온 피아노와 노래 실력을 그곳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선배는 영준의 음악적 재능에 감탄을 하며 가수의 길을 제안하였다.

명석한 머리를 가졌던 터라 영준은 무리없이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진학 후 그는 스튜디오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다.

학교나 집보다도 그곳에서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