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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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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12


BY 제인 2003-11-04

미연이 선물가게에서 바쁘게 일하다보니 어느새 5월이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로 각 대학마다 축제분위기였다.

H대학교도 이번 주의 중간시험만 끝나면 다음주부터 일주일간 축제였다.

시험기간 중인 이번 주는 손님이 뜸한 편이었다.

오늘이 금요일로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

오후에 고수가 가게로 일하러 오자 미연은 "시험 잘 봤니?"하고 인사를 한다.

"오늘은 컴퓨터 과목이라 장난이었지 뭐."

"작품은 잘 되어가? 전시한다고 그랬잖아."

"응, 다 완성했어. 설치도 벌써 다 끝났어. 다음 주에 누나도 와서 구경해."

"시간되면 가볼께. 그런데, 너 컴퓨터 잘 하니?"

"어떤거? 그래픽이야 전공인데 당연하지. 그래픽 말고도 컴퓨터라면 만들고 고치고 다 할 줄 알아."

"그래? 나, 컴퓨터가 좀 이상해졌는데, 어떻게 해야하지?"

"내가 가서 좀 봐줄까?"

"그럴래?"

"대신 밥한끼 먹여줘야 해?"

"당연하지. 언제 올 수 있는데?"

"이번 일요일 낮에 갈께."

"그래, 고마와."

금요일치고는 무척 한산한 편이라 미연과 고수는 앉아서 인형과 선물들을 포장하였다.

다음 주가 축제인만큼 분명 무척 바쁠거라 생각하고 미리 포장을 많이 해두고 있는 중이었다.

고수의 리본을 꼬아 묶는 솜씨가 아주 훌륭했다.

미연은 고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너 손재주가 참 좋은가 보네? 컴퓨터도 잘 고친다니..."

"컴퓨터뿐인가? 차도 고치고...웬만한 기계는 다 고쳐."

"굉장하다."

"난 아무래도 천잰가봐. 난 다 할 줄 안다니까? 어떤 때는 내가봐도 신기해."

"호호...맞아, 천잰가보다..."

미연은 고수 옆에 나란히 앉아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그때 자동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남자 손님이었다.

미연은 고개를 들어 "어서오세요"하고 웃으며 인사했다.

그 손님은 입구쪽에 진열되어 있는 큰 인형들쪽으로 향하다 미연의 인사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돌렸다.

미연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미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녀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고수는 하고 있던 포장거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이 계산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미연의 태도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 남자는 투명하게 포장해서 창가에 진열해두었던 커다란 고무고무 쿠션을 하나 집어들고와서 고수에게 계산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미연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돈을 내고도 계속 머뭇거리며 미연을 바라보았다.

미연은 계속 어색한 모양으로 다른 쪽만 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렇게 미연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가버렸다.

미연의 하얗게 질린 얼굴은 그가 사라지자 이번엔 붉게 물들었다.

"누나, 저 사람 누구야? 누군데 그래?"

미연은 시무룩한 얼굴로 "전에..."하고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고수는 궁금하여 "뭔데? 왜 그러는데, 응?"하고 대답하기를 재촉하였다.

미연은 옆에 내려놓았던 포장재료를 카운터에 올려놓고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내가 전에 사랑했던 사람이야."

"남편?"

"아니."

"남편말고 딴 사람을 사랑했었어?"

"후...."

고수의 호기심 어린 얼굴을 쳐다보며 미연은 한숨을 길게 쉬더니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가슴아팠던 지난 날의 사랑이야기였다.

 

지금 그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은 미연이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2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가을이었다.

미연과 전남편인 진희를 포함한 같은 학과 대학원생들은 오랫만에 직장에 다니고 있는 동창들과 만나 학교 앞에서 술자리를 갖기로 하였다.

모두들 세미나 수업이 끝나고 한꺼번에 약속한 카페로 몰려 내려갔다.

그 카페에는 진희의 고교 동창이자 같은 학교 법과대생인 명민이 자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들 조금씩 안면이 있는 터라 모두 한자리에 합석을 하였다.

한창 맥주병이 오가며 와글거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가 한창 어수선해져 있을 때였는데, 명민이 일어서더니 옆에 앉아있던 친구를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옆에 있던 친구는 같은 학교를 졸업했는데 이번에 가수로 데뷔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러냐고 신기해하며 그에게 노래 한곡을 부탁했다.

인원이 20명 가까이 되는 큰 술자리였기 때문에 미연은 그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가 합석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명민의 소개도 멀어서 작게 들렸을 뿐이었다.

미연이 따분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동안, 그 남자는 카라오케와 피아노가 마련되어 있는 작은 무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하려고 피아노앞에 앉았다.

카라오케에서들 흔히 그렇듯 그에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시켜놓고는 몇사람 빼고는 별 관심을 주지 않고 다시 잡담들을 시작했다.

미연도 별 관심없이 맥주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전주가 끝나고 그의 노래가 시작되자 그녀의 귀가 번쩍 뜨였다.

높은 고음의 맑은 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미연의 마음을 사로잡고 만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 줄 알고있지만

'아닌 것 같아, 난 네앞에 서면 자꾸 한숨이 나와

'내 깊은 곳에서는 아니라고 소리치는 걸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우리는 너무 다르고 너무나 어렸어

'진실을 묻기도 전에 말해버렸던거야

'사랑한다는 그말,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허공속에 떠돌기만 해

 

그의 노래는 미연의 가슴에 절실하게 다가왔다.

진희와는 만난지 5년이나 된 공인된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무미건조한 만남으로 이어져만 가는 그와의 관계.

모두들 두 사람의 관계를 돌처럼 묶어놓고 싶어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연은 진희와의 결혼이 자꾸 두려워져만 갔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을 자꾸 미루려고 석사, 박사라는 의무적인 진로를 만들어냈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마치 미연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연은 그 가삿말에 빨려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노래를 들려주고 있는 그 남자에게 흥미가 일고 있었다.

저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어떤 영혼을 가졌을까 하는.

'저 남자는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났을까.

내가 만일 저런 목소리를 가졌다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갔겠지.

그토록 원하던 음악의 길로...'

어릴 때 부모님의 헤어짐으로 한창 재미있게 배우고 있던 피아노를 더 이상 배울 수가 없게 되었었다.

미연의 오로지 하나의 꿈이었던, 그 어린 시절 열 손가락 깊이 못박아 놓았던 피아니스트의 꿈은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꺼져버리고 말았다.

'지금 저 남자는 저렇게 멋지게 연주하며 노래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런 회의에 빠져들면서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손님들은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정작 함께 자리를 하여 노래를 시켰던 친구들보다 다른 좌석의 손님들이 그의 노래에 더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손님들은 앵콜을 청했다.

의외의 환호에 그는 수줍은 몸짓으로 피아노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무대를 떠나려 했으나, 사람들이 앵콜을 자꾸 외치자 다시 자리에 앉아 노래를 시작했다.

미연은 그의 청아한 목소리에 한껏 빠져들어 꿈속을 헤메듯 그의 노래를 들었다.

다시 한번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은 후 그 남자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자꾸 미연쪽을 흘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미연은 그런 그를 의식하게 되었다.

한참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다."하고 친구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왜 벌써가?"

"나 내일 일찍 출장가야해."

"그래, 그럼 내일 출근할 놈들은 먼저 가라. 야! 우리는 2차 가자!"

진희는 술기운이 올라 기분이 좋아서 대학원 친구들에게 2차를 종용했다.

명민은 고시 공부 중이라 먼저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노래를 불렀던 그 남자도 명민을 따라 나갔다.

다른 여학생들도 집으로 가겠다고 하여 진희를 비롯한  몇명만 남게 되었다.

진희는 미연에게 "조심해서 들어가" 하더니, 집에간다는 친구에게 "야, 너 미연이 버스 좀 태워줘."하고는 2차를 향해 떠났다.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친구는 자기가 탈 버스가 오자 미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버스로 뛰어올라가버렸다.

취기가 가시지 않은 미연은 정류장에 홀로 남아 눈을 껌벅거리며 버스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한산한 버스정류장에 승용차 한대가 나타나 미연의 앞에 섰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내려 미연에게로 걸어왔다.

아까 노래를 했던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