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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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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9


BY 제인 2003-11-03

미래는 월요일 아침 박영준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저, 장미래입니다. 안녕하세요?"

"가수 장미래씨 말씀이십니까? 어쩐 일이신가요?"

"좀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만나뵐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럼 오늘 중에 저의 회사로 들리시겠습니까?"

"저...그보다요, 저녁때 밖에서 만났으면 하는데요. H대학 앞에 제가 운영하는 클럽이 하나 있는데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네, 그러죠, 그럼. 저녁 7시경에 그리로 들리겠습니다. 클럽 이름이...?"

"미래클럽이예요. H대 정문하고 마주하고 있어서 찾기 쉬워요."

"네, 그럼 있다가 거기서 뵙겠습니다."

박영준은 장미래의 전화를 받고 매우 뜻밖이었다.

가수나 음악인들을 매일 만나야하는 직업이긴 하지만, 장미래와는 여지껏 마주칠 일이 전혀 없어서 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자기에게 매니저를 통하지도 않고 직접 연락을 해오다니 의외였다.

게다가 자기가 운영하는 클럽을 보여주겠다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말연시가 가까운 겨울철이라 날씨가 꽤 추웠다.

눈이라도 올 듯 흐린 날이었다.

영준이 클럽안으로 들어서니 꽤 넓은 홀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테이블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고 영준의 뒤로도 손님들이 줄이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요."하고 카운터 옆에 꼿꼿이 서있던 웨이터가 손님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장미래씨 만나러 왔는데요."

"아, 예. 박영준씨이신가요? 이쪽으로 오십시요."

웨이터는 박영준을 무대 바로 앞에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한 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요."라는 말을 남기고 내실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장미래가 나타나 테이블에 앉으며 인사했다.

"누추한 곳에 찾아주셔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장미래씨를 뵙게 되어서 제가 더 영광인걸요. 직접 초대를 해주시다니..."

"말씀으로만 들었는데, 정말 소문대로 아주 핸섬하시군요, 호호...아마 저랑 나이가 비슷하시죠?"

"예, 아마 그럴걸요. 장미래씨 TV로만 뵈었는데 직접 뵈니 정말 미인시군요."

서로 초면예의를 갖추느라 공허한 얘기만 오고가는 중에 한 여자가수가 무대 중앙에 나와 다소곳하게 선다.

하얀색 코트에 하얀색 모직 스커트, 그리고 흰부츠를 신었고, 긴 머리를 하얀 리본으로 묶은 모습이 너무나도 청초하고 아름다왔다.

그 여자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청초한 분위기와는 약간 다르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고 흔들림없이 노래를 하였다.

박영준은 그녀가 무대위에 나타나자 눈길이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는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장미래는 그런 박영준의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여가수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가 끝나자 클럽내에서는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구죠? 처음보는 가수인데요?"

"아직 가수라기보다는 가수 지망생이죠. 헌데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하는데요?"

"사실은 바로 이런 일로 박영준씨를 뵙자고 한거예요. 제가 이런 클럽을 열게 된 건 저렇게 실력있는 가수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그런 일이 하고 싶어서였죠. 제 오랜 꿈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막상 음반을 내게 해줄래도 생각처럼 투자자를 찾는 일이 쉽지가 않더라구요. 제가 아예 엔터테인먼트사를 하나 차리면 모를까...헌데 제가 거기까지 소화하긴 벅차요, 아시겠지만."

"네, 알죠, 몹시 바쁘신 분인거. 이 일에 제가 필요한건가요?"

"바로 그렇다니까요."

"잘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늘 신인들을 찾아다니고 있는걸요."

"호호호...말로만 들었지, 박영준씨 이렇게 시원하신지 몰랐네요."

"저도 작은 거지만 음반사를 차린 이유가 장미래씨와 같은 거였거든요. 수시로 이곳저곳 라이브 클럽들을 찾아다니고 있긴 하지만, 뭔가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그런지 실력있는 신인들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더군요. 저랑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분을 만나서 정말 기쁩니다."

"맞아, 박영준씨도 언더그라운드 출신이셨죠? 그래서 그렇게 언더가수들 발굴하는 그런 쪽으로 일을 해오셨던건가봐요? 아휴, 박영준씨, 그렇게 훌륭한 분인지 몰랐어요."

"하하...장미래씨야말로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런 말씀...좀...실례될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좀 거만하고 화려해만 보였는데, 뜻밖에 속이 참 깊으셨네요. 이런 면이 있는 분이신줄 오늘에야 첨 알았습니다. 정말 놀랍군요."

"아이, 뭘요...그런 칭찬...듣고보니 기분 좋네요, 호호..."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이야기가 척척 잘 진행이 되었다.

박영준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만 마무리되면 앞으로 클럽에 종종 들러 라이브 공연을 참관하고 마음에 드는 가수가 눈에 띄는 대로 기획을 잡아가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박영준은 맛있는 저녁까지 대접받고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는 만족스러운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미래는 그동안 연말스케줄이 너무 바빠 자기 가게에 와서 둘러볼 틈도 없었다.

오늘 모처럼 온 김에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클럽 매니저들, 종업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문닫는 시간까지 남아서 기다렸다.

주방을 정리하고 미연을 비롯한 주방식구들과 웨이터들이 둥글게 모여앉아 퇴근 전 야참을 먹고 있는데 미래가 나타나 자리에 합석하였다.

"앞으로 우리 클럽에서 많은 가수들이 배출될지도 모르니까 여러분들은 좀 더 신경써서 일해주세요. 물론 여러분들 덕분에 일년도 안되서 명실공한 라이브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거 잘 알고 있고 늘 감사드리고 있어요. 이번 연말에는 특히 무척 바쁠텐데 힘들더라도 열심히 일해주시기 바래요. 그리고 이번엔 500%보너스가 지급될 예정이니 기대하시구요."

"우와!!!"

종업원들은 보너스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미연도 함께 웃었다.

미연 옆에 앉아있던 웨이터 하나가 미래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아까 그 분은 누구세요? 한참 동안 이야기도 나누시고 저녁도 함께 드시던데? 혹시 애인이신가요?"

"아까 그분은 제 애인이 아니라, 박영준이라는 분이예요. 바람기획이라고 하는 음반사 사장님이세요. 프로듀서이시기도 하구요. 우리 클럽을 통해 가수를 배출시키는 그런 일을 해주실 분이죠."

밥을 먹으며 미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연은 '박영준'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숟가락을 툭하고 떨어뜨렸다.

미연의 안색이 나빠진 것을 보고 미래가 물었다.

"미연아,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아, 아냐...좀 피곤했나봐."

"저런, 내가 집에 데려다 줄께. 그럼 여러분들 잘 부탁해요."하고 미래는 미연을 부축하여 데리고 나가 차에 태워 미연의 집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너, 우리 가게에서 너무 오래 일했어. 그동안 너무 힘들었지? 미안해, 내가 너무 바빠서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

"아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우겨서 한 일인데...나 안 힘들어. 그 일 나 정말 좋아서 하는 거야. 알잖아."

"아휴, 힘든 거 다 안다."

"그런데...박영준이라는 그 사람....그 사람 맞지? 나랑 같은 학교 나온...."

"아, 그래 맞아. 그 사람 U대학교 나왔다고 그러더라. 그 사람 아는구나? 하긴 동창이면 서로 알겠네?"

미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 사람하고 무슨 일 있었니?"

"저기....그 사람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는 사이야?"

"오늘 첨 만났어. 내가 그 사람한테 일을 좀 부탁했거든. 지금은 좀 바빠서 그런데, 내년부터는 함께 일하게 될거야. 신인 발굴하는 것 때문에. 한달에 한두번씩 들러서 우리 라이브공연 보기로 했어. 그 사람은 항상 신인을 찾으니까... 자기도 오디션 따로 안보고 얼마나 좋아?"

"그랬구나..."

어느새 미연의 집에 당도하였다.

"미연아, 너무 무리하지 말구, 힘들면 언제든지 매니저한테 얘기해서 쉬도록 해, 알았지?"

"알았어, 고마와."

"그럼 갈께, 안녕."

"그래, 잘가"

 

미연은 아직도 친정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1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장미는 항상 잠들어 있었다.

'내년 봄이면 장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맨날 이렇게 늦게 들어오면 학교 생활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미연이 들어오는구나?"

불꺼진 마루로 들어서는데 방문이 열리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연은 마루등을 켰다.

"어? 언니왔네?"

"응. 잘 있었니? 늦게 들어오는구나?"

"웬 일이야?"

"나, 여기 신세 좀 지려고."

"왜? 집은 어쩌고?"

"...우리...문제가 좀 생겼어."

"형부하고 싸웠어?"

"...형부가 다니던 회사 문 닫았거든. 몇 달째 월급도 못받았었는데....일단 돈이 없어서 전세뺐어. 밥은 먹어야하잖아. 당장 이사할 데도 없고, 벌이도 없는데 월세부터 얻기도 그래서...일자리 얻을 때까지 당분간 흩어져 있기로 했어."

"그럼 애들은?"

"방에서 자."

"뭐?"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랫목에 엄마, 그 옆으로 장미와 두명의 조카가 나란히 누웠고, 웃목으로 겨우 두사람 누울만큼 공간이 빼꼼히 남아있었다.

"뭐야? 이렇게 좁아서 어떻게 다 같이 자?"

"그렇다고 추운데 마루에서 잘 수는 없잖아."

"형부는 어디갔어?"

"어디 잘 있겠지, 뭐."

"어디 간 줄도 몰라?"

"일자리 알아보러 지방에 내려갔어."

"언제 오는데?"

"일 구하면 연락한댔어."

미연은 답답해졌다.

"왜 시집으로 안가고 이런 방 한 칸짜리 친정집으로 온 거야?"

"그 집에도 방 없어. 시동생네 들어와 있대."

"뭐어?"

"요새 한 집 걸러 하나씩 실직하는 세상이야. 어쩌겠니?"

미연은 좁은 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 옮겨야 할 거 같아....직장도 집도 다....'